056화
[6회차] 최강의 대마법사
성검3의 가르침은 10분 만에 종료됐다.
애초부터 말이 안 되긴 했었다.
직업 페널티로 엄청나게 약해진 마왕 페도나르조차 쓰러트리지 못하고 죽은 한심한 용사가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물론, 가르칠 순 있다.
자격증 개념이 없는 무식한 판타지 세계에서는 변변찮은 B급 용병과 기사가 “내가 결혼해서 일찍 은퇴하지만 않았어도….”라고 둘러대면서 부족한 경력을 덮는 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검3은 노처녀였다며?
둘러댈 변명도 없다.
(용사님! 저는 변변찮은 노처녀가 아니라, 모두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 것뿐입니다! 제가 남아서 몰려오는 악마 대군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동료들이 죽었을 거예요.)
성검3은 모두를 구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그, 그런…?!)
나는 성검3을 라누벨에게 맡겼다.
페스티벌 당시, 부녀K를 공격해온 천사들이 다양한 성검이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은근히 기대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별거 없었다.
아니면 내 성검2의 성능이 지나치게 뛰어난 걸까? 이유가 뭐든 간에 성검3은 벌써 내 관심 밖이었다.
“오빠. 성검이 무거워…!”
“이 기회에 알통 좀 키워봐.”
“너무해!”
스르륵….
그때, 성검3가 칭얼대는 라누벨의 체형에 맞춰서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 어째선지 멈추지 않고 계속 줄어들었다.
라누벨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반대로 내 표정은 썩은 고구마처럼 변했다.
성검3은 스틸레토 계열의 얇고 뾰족한 단검이 됐다. 라누벨도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졌다.
“쳇. 이건 몰랐네.”
라누벨이 낑낑거리는 걸 보고 싶었는데.
성검3에는 전직 용사의 음성기능 말고도 검의 크기를 조절하는 부가기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라누벨은 커서 불필요해진 검집을 4차원 가방에 넣은 후, 단검에 적합한 크기의 검집을 소환해서 허리춤에 찼다.
착!
그리고 성검3을 꽂았다.
여기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아줌마가 말하길, 여기서 북쪽에 숨겨진 유적이 있대.”
그녀는 성검3랑 대화도 가능했다.
처음에는 “노처녀 용사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아줌마로 바뀌었다.
“북쪽이라면 설산M이 있는 방향이잖아?”
설산M에 유적이 있다!
...같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판타지아 북대륙의 대다수 유적, 미궁, 신전, 무덤 등은 설산M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아래쪽에는 도굴과 수련을 목적으로 찾아온 용병과 모험가들의 피로를 풀어줄 노천탕과 유흥가, 여관 등이 발달했다.
이렇게 형성된 마을들이 또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아니. 설산보다 한참 앞쪽이야.”
“앞이라….”
그렇다면 고려해볼 여지가 있다.
나는 라누벨이 가리킨 북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머릿속에 북대륙 지도를 그려봤다.
판타지아 북대륙의 대다수 던전이 설산M에 몰려있는 만큼, 산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아무것도 없는 맨땅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은 굉장히 정확한 편이다.
목숨 걸지 않고 도굴한 던전이 드물었기에 11년이 흘렀어도 하나하나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동료들의 실수와 헛짓으로 도배된 모험들.
아름다웠던 추억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튼, 성검3가 언급한 유적은 내가 안 가봤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줌마가 풋풋한 소녀이던 시절에 수련했던 장소래. 정식명칭은 수련의 동굴. 왕족들의 휴양지로 쓰이는 국왕 직할령이라서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장소라는 모양이야.”
“그 동굴은 용사만 찾을 수 있고?”
“응!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척하면 척이지.”
내가 용사 경력 11년이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 용사님이 모르거나 못 가본 던전이라면 조건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바닷속, 사막, 사유지, 무인도, 시공의 폭풍….
굉장히 제한적이다.
“유적까지 바로 가도 괜찮아. 식량도 친절한 마을주민들이 많이 챙겨줘서 빵빵해.”
의욕도 빵빵한 라누벨이 모험을 희망했다.
그거 안 됐구먼.
“아니. 일단은 도시부터 간다.”
옛 동료를 만나러.
반드시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다. 히쭉.
*
우리가 있는 곳은 북대륙의 마법왕국이다.
그 이름처럼 마법에 특화된 왕국.
설산M의 남부를 지배하는 마법왕국의 백성들은, 모태(母胎)에서부터 영험한 산의 기운을 받고 자라서 마법적인 재능이 우수했다.
마법사 꿈나무의 출생비율이 주변 왕국보다 약 2배쯤 높으며, 다른 대륙의 나라들이랑 비교하면 10배쯤 차이 난다.
이런 마법왕국에는 대도시가 2곳 있다.
첫째는, 왕국의 수도.
정치와 경제가 집중된 수도가 번창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수도의 발전을 가볍게 뛰어넘은 도시가 있다.
“오빠. 이 앞의 번쩍번쩍한 도시에….”
“현자의 탑이 있지.”
“우우…! 모르는 게 대체 뭐야?!”
6회차는 토착민 취급이라서 이거 하나는 편했다.
내가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해도 라누벨과 성검3은 의심하지 않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물론, 라누벨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불만스러워했지만.
현자의 탑.
판타지아 최강의 마법사가 사는 도시.
근사한 도시 이름이 따로 있지만, 나는 싸잡아서 ‘현자의 탑’이라고 대충 부른다.
마법이 극도로 발전한 이 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관광명소였으며, 도시 단위의 군사력으로는 북대륙 최강이었다.
이 모두가 한 사람의 영향이다.
“현자 놈. 지금쯤 탑에 있으려나?”
현자(賢者).
직업도 용사처럼 유일무이한 현자다.
부활이란 사기적인 특수능력을 보유한 ‘성녀’도 셋이나 있는데, 어째선지 ‘현자’는 세계를 다 뒤져도 한 명밖에 없었다.
“웅? 현자님을 만나려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만나서 놈의 지팡이를 빼앗을 생각이다.
용사 페스티벌 때, 시작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동정A가 “현자의 지팡이로 얼음마녀를 포섭할 수 있어.”라고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그때,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판타지 경력 11년인 내가 3년짜리 동창에게 얕보인 것이다.
그래서 정말인지 시험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로 들어가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출입을 기다리는 행렬이 매우 길었다.
“오빠! 어디 가? 줄의 끝은 여기야.”
“라누벨.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현자의 탑은 북대륙에서 유명한 대도시 겸 관광명소인 만큼 방문객도 매우 많았다.
그렇기에 도시의 검문도 철저했다.
인구가 밀집된 시장이나 건물에서 흉악한 테러리스트가 날뛰면 대형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이쯤은 처음부터 예상했다.
“이봐. 줄을 서라고…. 오오!”
“야! 새치기하지…. 헉!”
“비켜! 신성한 분이 행차하셨다!”
“어쩜 이리도 신성하실 수가…!”
나는 규칙과 예의를 준수하지 않는 양아치가 아니다. 사람들이 알아서 반나절 넘게 기다린 줄을 양보해줬을 뿐이다.
교생 아가씨. 문제없지?
▶혼란: 분명히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없긴 한데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네요!
이걸 문제 삼으면 진짜 양심 없는 거다.
신성하게 태어난 것도 잘못인가?
나와 라누벨은 곧바로 검문소 앞까지 도달했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이 앞까지 거침없이 쭉쭉 지나온 나는 처음으로 막혔다.
대문 좌우에 창 들고 선 경비원들은 “신성한 분께 얼른 길을 열어드리자!”라는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경비 책임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그자의 능력치를 살펴봤다.
▷종족: 휴먼
▷레벨: 254
▷직업: 파수꾼(방어→오감↑)
▷스킬: 내성D 색적D 창술E 오감E 체력E…
▷상태: 강화
정신을 보호해주는 보조계열 스킬 ‘내성’을 갖고 있었다. 상태에도 스킬 성능을 올려주는 ‘강화’가 표시되어있다.
저것들이 나의 신성함을 거부한 원흉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내 앞을 가로막아선 책임자를 밀어붙였다.
“토, 통과…!”
한 차례 움찔한 책임자는 허겁지겁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내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연신 굽실거렸다.
고작 D등급 내성.
그 미미한 저항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쓸려갔다.
“오빠, 뭔가 이상해.”
내게 편승해서 쫄래쫄래 따라온 라누벨이 투덜댔다.
애는 반나절 동안 땡볕에서 안 기다리게 해줘도 불만이다.
“이상하면 밖에서 줄 서던가.”
“우우….”
현자의 탑은 관광지답게 길거리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질서와 규칙이 있었다.
중간중간 배치된 경비원들이 교통신호등을 대신했으며,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답게 사람이 다니는 길과 마차가 다니는 길을 철저하게 구분해놨다.
그리고 판타지답게 하늘에도 길이 있었다.
“오빠! 봐봐! 마법의 양탄자야!”
라누벨이 언제 불만이었냐는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택시 같은 ‘마법의 양탄자’는 이 도시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명물이다.
운전기사는 연구비에 쪼들리는 마법사.
주요이용객은 돈이 넘쳐나는 상인과 귀족이다.
고급 대중교통 외에도 마법으로 이것저것 잘해놨다.
예를 들어,
지구의 수세식 변기와 비대 기능을 합쳐놓은 ‘슬라임식 변기’는 내게도 문화충격이었다.
좌변기 속에 들어있는 슬라임이…. 여기까지.
마법이 극도로 발달한 현자의 탑은 판타지아 대륙의 500년 뒤 도시 모습을 보여준다.
어째서 500년이냐면, 마법물품은 지구의 산업혁명처럼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살짝 그리운걸.”
암흑상회의 음모로 도시가 몰락한 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북적북적한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백색의 상아탑을 향해 산책하듯 천천히 나아갔다.
저것이 판타지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마탑(魔塔)이다.
현자도 결국은 마법사.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자신만의 연구를 하길 원한다. 그렇기에 탑을 높고 튼튼하게 건설했다.
콘크리트처럼 이음새 하나 없는 벽은 순도 높은 마력으로 보호받기에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없다.
용사의 동료들이 웬만하지 않아서 문제지만.
“바로 탑에 들어가려고?”
“당연하지.”
우리는 현자의 탑 입구에 설치된 접수처로 향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선객들이 많았지만, 친절한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아낌없이 순서를 양보해줬다.
그렇게 도착한 접수처.
매력적인 마녀 코스프레를 한 아가씨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성스러운 손님. 현자의 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무슨 용무로 오셨나요?”
“현자를 만나고 싶은데.”
“미리 약속을 잡고 오셨나요?”
“만나고 싶은데.”
“...그러시군요. 현자님께 바로 기별을 넣어둘게요! 성스러운 손님. 3번 출입문으로 곧장 올라가세요~”
“고마워.”
어여쁜 접수처 아가씨가 사근사근하게 일을 참 잘한다. 나중에 남편에게 사랑받을 게 분명하다.
▶난색: 약속도 안 잡고 막 찾아가도 되는 걸까요…?
교생 아가씨.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나는 평화적으로 해결했다구?
공갈E→공갈D
사기F→사기E
스킬 성장은 사소한 문제니 넘어가자.
“이것 봐. 마법계단이야. 굉장해…!”
나와 라누벨은 접수처 아가씨가 알려준 3번 출입문으로 들어가서 도르래 비슷한 걸 탔다.
위이이잉-
지구인 감성으로 표현하자면 엘리베이터.
가난한 수습마법사들의 노동력을 쥐어짜는 마법의 양탄자까진 아니지만, 이것도 희귀한 편의시설에 속했다.
“라누벨. 촌년처럼 호들갑 떨지 마.”
“우우….”
딩동♪
뺨을 부풀리며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을 훈계하는 사이, 마법계단에 설치된 초인종이 울면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현자의 탑 최상층.
이 도시가 속해있는 마법왕국의 국왕조차 열흘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올라올 수 없다고 전해지는 진귀한 장소다.
그 소문은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다.
이 방의 주인은 혼자서 왕국도 쓸어버릴 수 있는 대량살상마법의 귀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북대륙의 누구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을 하지 않는다.
자살행위나 다름없기에.
“성스러운 손님이란 건 당신들입니까? 약속도 없이 접수처에서 통보하고 올라오다니. 배짱이 참 두둑하시군요.”
끄트머리에 야구공 크기의 황금색 구슬이 박힌 지팡이를 쥔 금발의 소년이 우리를 환대해줬다.
▷종족: 휴먼
▷레벨: 350
▷직업: 현자(동정→마력↑)
▷스킬: 마력SSS 마법S 마술S 마기A 마성A…
▷상태: 만전
신사적인 말투와 어린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상대는 인어공주 아쿠아마저 학을 뗀 진정한 대마법사.
그의 SSS급 마력도 진짜다.
“저기, 오빠? 지금이라도 현자님께 사과하자.”
현자의 방대한 마력을 느끼고 겁먹은 라누벨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귀여운 척했다.
쓱쓱.
나는 그런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건방진 말을 한 대가로 오라비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길 줄 알았던 라누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기분 좋은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든다.
“잠깐! 당신들! 무단침입으로 모자라서, 제 앞에서 염장 지르는 애정행각은 그만두십시오! 안 그러면 후회하게 해주겠습니다!”
지팡이 끝에 번개를 휘감은 불덩이를 생성한 현자가 경고했다.
“오, 그래?”
나는 함정카드 성녀H를 소환했다.
“주인님. 부르셨나요.”
소환되자마자 스스럼없이 안기는 성녀H의 흐트러진 수녀복 아래로 발칙한 검은색 속옷과 가터벨트가 살짝 드러났다.
“크어엌-?!”
푸확!
방금까지 기세등등했던 현자가 코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
▷종족: 휴먼
▷레벨: 350
▷직업: 현자(동정→마력↑)
▷스킬: 마력SSS 마법S 마술S 마기A 마성A…
▷상태: 출혈, 행복, 혼절
그렇기에 이 녀석은 판타지아 최강의 대마법사일 수밖에 없었다. 약점이 너무 뚜렷한 게 흠이지만.
▶혼란: 이건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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