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6회차] 아니다! 이 골렘아!
또 코피를 쏟고 사경(死境)을 헤매기 시작한 현자는 경마장 곳곳에 배치된 안전요원이 들것에 실어갔다.
아무리 수혈로 보충했다고 해도 연달아서 피를 저렇게 많이 흘려버리면 몸이 견디지 못한다. 그가 순수한 인간이었다면 진즉 죽었을 것이다.
“찰떡을 대뇌 재생했다고 코피라니···.”
얼마나 망상이 심했기에?
저 증상은 눈을 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현자의 동정을 탈출시켜줘야 할까. 하지만 그리되면 직업 ‘현자’가 사라지거나 쓸모없게 된다.
이 문제는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나와 라누벨은 경마장 시합을 계속 지켜봤다.
“5번 마법사 승리!”
“와아아!”
“젠장!”
“오예!”
우리의 경마접수번호는 이러했다.
[강한수: 5번, 9번, 11번, 16번, 23번]
[라누벨: 5번, 8번, 11번, 22번]
행운만 믿고 대충 찍은 5번이 수월하게 승리했다. 그 뒤에 7번과 8번의 대결은 8번이 이겼고, 9번과 10번은 9번이 승리를 거뒀다. 이어진 시합에서도 11번이 무난하게 승리.
현재까진 나와 라누벨 둘 다 틀리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네!”
“룰루~♪”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경마는 한 번 승리하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마장에서 돈 좀 만지려면 배당률이랑 상관없이 자기 선수가 최소 2연승은 해야 한다.
우리는 시합을 계속 지켜봤다.
“15번 마법사 승리!”
“사랑해!”
“너무 예쁘다!”
“결혼해줘!”
유감스럽게도 내가 뽑은 16번 멍청이는 패배했다. 정말 열심히 분투했지만, 상대가 지나치게 좋지 않았다.
나는 16번 마법사를 이긴 15번 마법사를 보았다.
굉장한 미인이다.
“찾았다.”
“오빠. 뭘?”
“그런 게 있어.”
아리따운 미모가 눈부신 15번 마법사는, 대륙 곳곳에 뿌리내린 암흑상회에서 이 현자의 탑 경마장에 투입한 특수요원이다.
우승해서 돈 좀 만져보겠다는 게 아니다.
15번 마법사가 조종하는 붉은색 골렘.
저것은 오락이 아닌 전쟁을 위한 양산형 병기다. 저렴한 가격 대비 성능이 매우 우수하다.
암흑상회는 15번 마법사로 경마장의 최종우승을 노리고 있다. 북대륙의 각국 핵심인사들에게 붉은색 골렘을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하지만 한 번으로는 검증이 안 된다.
그렇기에 저 여자는 수시로 경마장에 참가해서 수십 번 우승한다.
“재미있게 흘러가네.”
하지만 암흑상회는 그 야망을 일찍 이루지 못한다. 저기서 패배하고 부들부들 떠는 16번 마법사 탓이다.
▶빼꼼: 아는 신사분이세요?
아주 좋은 질문이야. 교생 아가씨!
전 재산을 쏟아부은 경기에서 패배했다고 질질 짜는 저 한심한 청년 마법사가 나중에 ‘군신’으로 불리게 되거든.
▶깜짝: 정말요?
내 1회차 기억 속에 있는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군신(軍神)은 군신.
현재 이름은 16번 마법사!
북대륙에서 절대적인 전쟁억제력을 가진 무쌍의 현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어서 끝끝내 현자의 탑마저 무너트린 천재마법사다.
당시에 군신이 만든 황금색 골렘은 무적이었다.
그의 골렘도 결국에는 비겁한 우정의 힘에 파괴되고 말았지만, 판타지아 대륙의 전쟁 패러다임이 바꾸는 시발점이 된다.
인간에서 골렘으로.
이때부터 암흑상회의 붉은색 골렘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고, 기존의 사회질서가 붕괴한다.
그야말로 혼돈! 파괴!
“라누벨. 나는 급한 볼일이 생겼으니 내일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귀여운 여동생을 버려두면 안 된다고 칭얼대면 영원히 버릴 줄 알아. 이해했지? 이 기회에 자립심 좀 키워.
“우우···.”
라누벨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영원히 버린다는 내 협박에 굴복해서 따라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곧장 움직였다.
경마장에서 승리한 마법사들은 내일 2차전을 위해 지금부터 골렘 수리에 들어가야 해서 바쁘다.
하지만 패배자들은 아니다.
처참하게 망가진 자기 골렘을 고철처리장에 보낼지, 재활용할지 결정한 후에 바로 경마장 옆의 임시창고로 이동한다.
“저기 있군.”
16번 마법사는 털레털레 길을 걷고 있었다.
저 멍청하게 생긴 녀석이 훗날 현자마저 질색하며 도망치게 한 황금색 골렘의 제작자다.
그러므로 포섭하든 처리하든 해야 한다.
단, 걸리는 점이 있다.
▷종족: 휴먼
▷레벨: 113
▷직업: 학자(지식=마술↑)
▷스킬: 마술B 마도C 마법D 마력E
▷상태: 침울, 절망
이렇게 쓰레기 같은 능력치로 어떻게 그 강력한 황금색 골렘을 제작할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물론, 범인을 뛰어넘는 수재임은 틀림없다. 명문 아카데미에서 전체 3위나 4위를 다투다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경마장에는 널려있다.
현자에게 비빌 수 있는 천재는 아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
무엇이 16번 마법사를 군신으로 만들어준 걸까?
일단은 조용히 16번 마법사의 뒤를 밟아보기로 했다. 이대로 허탕이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경마장에서 무의식적으로 16번을 뽑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
나는 우주의 기운을 믿었다.
“거기, 젊은 마법사! 콜록콜록!”
등과 어깨에 칼침 맞은 남자가 16번 마법사를 다급히 불렀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암흑상회 끄나풀들에게 쫓기고 있네! 그놈들은 내 골렘 지식을 탐내고 있어. 그것만은 막아야 해. 온 세상이 골렘에 짓밟히고 말 거야! 그러니 부디 도와주게!”
“하지만 무슨 수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남자가 16번 마법사의 귀에 작게 속닥거렸다.
청력을 곤두세운 나는 엿들을 수 있었지만, 일부 심성이 고약한 마법사들의 동문서답식 비유와 속어로 가득해서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다.
딱 하나,
저것이 특정 장소를 암시한다는 것만은 알겠다.
나는 그 남자의 능력치를 살펴봤다.
▷종족: 휴먼
▷레벨: 12
▷직업: 공학자(지식=마도↑)
▷스킬: 마도SS 마술S 지력C 체력F
▷상태: 출혈, 중상, 빈혈
이쪽은 그야말로 진정한 순수학구파였다.
레벨이 낮고 마력도 없는 반쪽짜리 마술사였지만, 그의 스킬은 마도공학(魔道工學)의 정수라고 불리는 골렘 개발에 특화되어 있었다.
숨넘어가기 직전이란 게 흠이지만.
“이 장소는 대체···?”
“인류의 평화를 부탁하- 크흨!”
털썩.
생명의 불씨가 다한 남자가 죽었다.
“헉!”
놀란 16번 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줄행랑쳤다. 무시무시한 암흑상회랑 엮이거나 살인자로 몰리기 싫다는 얼굴이었다.
저런 겁쟁이가 훗날 군신으로 불린다니···.
“두목! 숨을 안 쉽니다.”
“하! 이 미친놈아! 적당히 찔렀어야지! 아이고.”
“죄, 죄송합니다.”
“빌어먹을. 집에 있는 설계도만이라도 챙겨.”
“알겠습니다, 두목. 애들아, 가자.”
양아치라고 하기에는 레벨이 지나치게 높은 사내들이 남자의 시신을 살펴본 후에 조용히 떠났다.
여기는 경마장 뒤편의 임시창고.
출입금지구역은 아니지만,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떠날 때까지도 남자의 주검은 차가운 대지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렇다면,
“부르셨나요, 주인님.”
나는 성녀H를 소환했다.
그녀는 고급 핫팩 기능을 활성화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지금은 그걸 위해 부른 게 아니다.
“이 남자를 부활시켜.”
“네. 아아~♬”
성녀H가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나라, 나의 노예여.”
벌떡.
피가 채 식기도 전에 죽은 남자가 멀쩡히 일어났다. 찔린 상처는 이미 깔끔히 회복되어 있었고, 멈췄던 숨도 제대로 쉬었다.
▷종족: 휴먼
▷레벨: 2
▷직업: 공학자(지식=마도↑)
▷스킬: 마도SS 마술S 지력C 체력F
▷상태: 양호, 부활
레벨은 위험한 수준까지 감소했지만, 죽자마자 부활시킨 덕분에 스킬은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이, 이게 대체···.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잡것.”
레벨이 턱없이 낮긴 해도 SS급 스킬이 있으면 영웅 수준인데, 이름을 붙여주기엔 모호했다.
그러니 대충 부르자.
“당신은 누구- 헉! 아무튼, 성스러운 분이시여! 바로 몰라 봬서 송구합니다. 비천한 소인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가 좋은 만큼 눈치도 빠른 잡것.
그는 주절주절 설명해주지 않았음에도 “성스러운 분이 어련히 구해주셨겠지!”라고 스스로 상황을 이해해버렸다.
덕분에 구차한 전개를 몽땅 생략할 수 있었다.
▶당혹: 무언가 엉킨 느낌인데요···?
교생 아가씨는 걱정이 너무 많아.
야만적인 판타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친구를 공짜로 부활시켜줬는데 뭐가 문제라는···.
아! 그렇군.
형평성에 어긋났다.
공명정대해야 하는 용사님이 사람1은 공짜로 부활시켜주고, 어딘가의 사람2는 외면한다면 심각한 차별대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부활시켜준 대가를 받아야 한다.
“잡것. 오늘부터 나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해라. 되살아난 걸 후회할 만큼.”
이러면 사람2도 불만 없겠지.
“아, 알겠습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내 공명정대한 판결에 탄복한 잡것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
나는 잡것이 비밀장소에 숨겨둔 중요한 연구자료를 몽땅 창고에 담아서 현자의 탑으로 옮겼다.
여유 부릴 순 없었다.
자기 죽음을 예감한 잡것이 16번 마법사에게 그 비밀장소의 위치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가 한 걸음 더 빨랐다.
잡것이 말하길,
“그가 마도A 이상이 아니라면, 제가 가르쳐준 암호문을 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16번 마법사는 A급은커녕 C급 아마추어다.
힘들게 잡것의 암호문을 풀고 기대하며 찾아갔더니, 텅텅 빈 비밀장소가 반겨줘서 황당하겠지. 푸히히히.
“사부님. 이 기름 냄새나는 자를 대체 왜···.”
빈혈로 핼쑥해진 현자가 질문했다.
그는 경마장에서 쓰러지고 반나절도 안 지나서 퇴원했다. 바뀐 종족과 마기S가 생존력과 회복력을 올려준 듯했다.
잡것을 바라보는 현자의 시선은 좋지 못했다.
마법사는 혈혈단신(孑孑單身) 지팡이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보수파다운 반응이었다.
“현자님은 여전하시군요.”
만나자마자 비하당한 잡것의 표정이 썩어갔다.
둘의 관계를 쉽게 표현하면 개와 고양이.
아!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로군.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슬라임식 변기통에 머리 처박혀서 몰랑몰랑 당하기 싫으면 신경전은 그만둬라. 잘 듣도록. 지금부터 우리는 암흑상회의 붉은색 골렘에 대항할 푸른색 골렘 개발에 착수한다!”
남자의 로망은 자고로 슈퍼로봇이다.
공감 못 하면 남자 아니다.
1회차 동료들이 비겁한 우정의 힘으로 협공해서 군신의 황금색 골렘을 파괴했을 때, 내 가슴이 파괴되는 것처럼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때 맺힌 한을 풀 기회가 왔다.
▶당혹: 저기, 강한수 생도님? 장르를 혼동하시면 곤란한데요. 저희는 마왕을 무찌를 용사의 모험 중이에요.
오! 교생 아가씨가 예리하네.
하지만 교생 아가씨의 지적은 잘못됐다.
누추한 여동생이랑 모험 따위 하지 않아도 마왕 페도나르는 언제든지 무찌를 수 있으니까.
▶난감: 보통은 그게 안 돼야 정상인데 말이죠···.
교생 아가씨. 걱정하지 마.
메인스토리는 제대로 진행할 거라구?
“앞으로 몇 년 이내에 북대륙에선 암흑상회의 붉은색 골렘이 대유행하면서 전쟁이 벌어질 거다. 우리는 그전에 선수 쳐서 푸른색 골렘으로 암흑상회와 북대륙을 정벌한다.”
“헉!”
“오오!”
우리는 그 기세를 살려서 시제품을 제작했다.
골렘 재료는 현자의 탑에 넘쳐났고, 슬라임식 변기통에 머리가 처박히기 싫은 두 천재가 합력하면서 정말 터무니없는 골렘이 탄생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감처리로 내 성스러움이 곁들어졌다.
▷종족: 아크 골렘
▷레벨: 900
▷직업: 무녀(미녀→근력↑)
▷스킬: 신성SS 근력A 금강A 몰살A 마성A···
▷상태: 소켓, 대기
신성이 깃들면서 능력치가 폭등했지만, 시험 삼아서 만든 수제품답게 크기는 사람이랑 별 차이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뽀얀 백색으로 코팅한 골렘의 계란형 얼굴은 위압감이 없었고, 팔다리 또한 무척 가늘었다.
튀어나온 두 가슴은 몰랑몰랑해서 전투력에 전혀 도움이 안 됐으며, 불필요한 푸른색 생머리는 쓸데없이 튼실한 엉덩이까지 쭉 내려왔다.
...이건 내가 꿈꿔온 슈퍼로봇이 아니다.
“네놈들! 내 꿈에 대체 무슨 짓을···!”
“흐흐···.”
“흐흐흐···.”
뒤를 돌아보니, 현자와 잡것이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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