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6회차] Who are you?
판타지아 최강의 대마법사인 현자는 툭하면 코피를 쏟는 유감스러운 특수체질 때문에 동정이다.
그런데 공학자 출신의 잡것도 오랫동안 골방에서 골렘만 연구해온 탓에 여자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동정.
두 천재 동정이 만나니, 이런 끔찍한 골렘이 탄생했다.
개와 호랑이의 단합력이 엄청났다.
“가장 중요한 인공지능 부분이 빠졌습니다.”
“이 몸에 수컷 같은 감성은 쓸 수 없잖습니까?”
온갖 재료를 쌓아둔 현자의 탑에도 없는 게 있었다.
여자의 마음.
이런 게 있었다면 현자는 동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약해 보이는 골렘의 상태에는 ‘소켓’이란 게 있었다. 소프트웨어를 탑재할 공간을 비워둔 것이다.
“시제품이니까…. 참자, 참아.”
두 동정의 열정을 생각해서 봐주기로 했다.
저것에는 골렘D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에 생산될 양산형 푸른색 골렘은 변신능력과 드릴이 탑재된 7m의 슈퍼로봇이 될 것이다.
이건 내가 설계도를 꼼꼼히 확인했으니 틀림없다.
나는 슈퍼로봇군단의 초석이 될 푸른색 골렘의 개발을 두 동정에게 맡긴 후, 현자의 탑을 나왔다.
*
내게도 남들처럼 꿈이 있었다.
변신, 합체, 드릴, 로켓, 판넬, 폭주…!
손에 땀을 쥐는 박진감 넘치는 슈퍼로봇. 그걸 위해 아낌없이 투자한 내 하루가 두 동정의 만행으로 허무하게 낭비됐다.
그리고 남은 건,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누추한 여동생이었다.
늦게 도착한 경마장에서 확인해본 시합결과 또한 썩 좋지 못했다.
[강한수: 5번, 9번, 11번, 16번, 23번]
[라누벨: 5번, 8번, 11번, 22번]
라누벨이랑 공동으로 투자한 5번과 11번은 2연승에 성공했지만, 접전이 되었던 두 경기는 8번과 22번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6번은 첫날에 떨어졌고.
“라누벨에게 완패했다고…?”
우주의 기운이 다 떨어진 모양이다.
“에헴! 전혀 닮지 않았지만, 라누벨은 매우 유능한 여동생이야. 이런 뽑기에는 자신 있어.”
“큭.”
나에게 굴욕을 주다니!
직업 ‘도둑’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모든 골렘 경기가 끝난 후, 나와 라누벨은 도시 밖으로 나왔다.
경마의 최종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2연승을 달리는 시점에 이미 수익분기점은 넘겼다.
라누벨처럼 뽑은 선수가 전부 2연승 해버리면 이때부터는 몇 배의 수익이 나는지가 관건.
그러나 뭐든 간에 배당금을 받으려면 결승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버려. 그까짓 푼돈.”
그 결승전은 앞으로 6일 뒤.
시합을 빠르게 진행하고 싶어도, 골렘은 매번 수리와 정비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다.
이 유지관리비 때문에 골렘이 전쟁에서 쓰이지 않았던 건데, 훗날 그 상식과 편견을 암흑상회와 군신이 깨버린다.
돈?
이미 현자가 내 열렬한 추종자가 됐다.
북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내 스폰서인 셈.
밤새 제작한 골렘D에 들어간 재료비만 따져도, 이미 작은 도시를 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액수였다.
고작 경마장 배당금을 타려고 도시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다.
...슈퍼로봇을 갖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푼돈이라도 라누벨이 노력해서 번 돈이야!”
“누가 봐도 불로소득이다만…?”
“정신노동을 무시하면 안 돼!”
세상의 모든 정신노동이 죽은 모양이다.
경마장선수의 이력은커녕 이름과 얼굴조차 모르고 찍은 주제에 잘도 뻔뻔하게 노동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OwOoow~!”
“Trooog~!”
나는 누추한 여동생을 이끌고 원래 목표로 했던 숨겨진 유적으로 모험을 떠났다.
가는 길에 마주친 몬스터들은 내 성스러움에 놀라서 도망치기 바빴다.
추적해서 못 죽일 건 아니었지만, 마왕이랑 전투는 내 레벨이 낮을수록 유리하기에 굳이 찾아가서 죽이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용사가 성장할수록 불리해진다니?’
뭐 이런 개뼈다귀 같은 설정이 다 있어?
▶으쓱: 동료들이랑 협력해서 적당한 난이도의 마왕을 쓰러트리도록 기획된 거니까요. 마왕이 사랑과 우정을 압살해버릴 만큼 강하거나, 역으로 너무 약하면 승리의 감동이 없어서 곤란해요.
교생 아가씨. 그걸 우리 동네에선 조작이라고 해.
사랑과 우정이 우수하다는 식으로 꾸민 사기행각!
여기에 속아서 한심한 동료들에게 “우리 함께 힘내자!”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멍청이들이 지구에 엄청나게 늘어났다.
멍청이 육성계획으로 피해받는 나 같은 선량한 일반인을 얼른 지구로 돌려보내 줬으면 좋겠다.
▶난감: 사랑과 우정은 굉장히 중요해요. 이유는 고등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알 수 있어요.
교생 아가씨는 이 뒤로 말을 아꼈다.
비밀 친구에게 너무하네!
“오빠. 이 앞이야.”
성검3를 소지한 라누벨이 길을 안내했다.
길목마다 세워진 경계초소의 보초들이랑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내 성스러움은 그 어떤 통행증보다 신분보장이 확실했기에 설렁설렁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마법왕국의 국왕 직할령.
만두 국왕처럼 은밀한 야외플레이를 위해 출입금지구역으로 설정해두는 왕족도 있지만, 대다수는 왕족 전용 사냥터로 이용한다.
이 사냥터 독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구인 감성으로 표현하면 동물농장, 양식장이라고 할까.
몬스터를 사냥하면 경험치가 들어온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력한 사냥감이랑 마주치면 역으로 사냥당하는 수가 있다.
왕족과 귀족의 사냥터는 이걸 조절한다.
가령,
▷종족: 오크
▷레벨: 31
▷직업: 용병(재산→생존↑)
▷스킬: 정찰E 생존F 체력F
▷상태: 평온
이렇게 약한 오크만 끊임없이 생성되는 지역을 독점하면, 빠르고 안전하게 레벨을 올릴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사냥터는 모두랑 공유하면 좋지만, 씨가 마를 정도로 사냥하면 생태계가 바뀌면서 생성되는 몬스터가 바뀌어버린다. 그렇기에 사냥터 제한은 필수.
독점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물론, 내가 거기까지 신경 써줄 이유는 없다.
“KuKu~!?”
“BuBu...!”
나의 성스러움에 놀란 31레벨 오크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더니, 옆의 비슷한 친구들이랑 애처롭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놈들, 잘도 뛰는구먼.
“이얍!”
그때, 내 옆에 있던 라누벨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움직였다.
계속 창고에 처박아두긴 아까워서 빌려준 ‘현자의 지팡이’를 쥔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라누벨이 지팡이를 빨리 써보고 싶어서 엉덩이를 근질근질할 때부터 예상했다.
파지지직-!
지팡이 끝의 황금색 구슬에서 번개가 쏘아졌다.
“VuVuuu~?!”
“NuNuu...?!”
오크들이 연쇄적으로 돼지 멱 따는 비명을 지르면서 고꾸라졌다.
치이이….
검게 탄 놈들의 몸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났다.
해코지는커녕 음욕조차 품지 않은 선량한 오크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여동생 마법사에게 몽땅 살해당했다.
▶당혹: 틀린 말은 아닌데 좀 그렇네요….
오크들의 비명이 꽤 크긴 했지만, 울창한 사냥터에서 몬스터의 단말마는 일반동물의 울음소리보다 흔한 편이다.
그렇기에 출입금지구역인 사냥터 주변을 지키는 마법왕국 병사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어갔다.
나는 라누벨의 안내를 받으면서 사냥터 깊숙이 들어갔다.
도중에 무슨 특수한 결계의 방해가 있었던 듯했지만, 성검3을 소지한 라누벨과 용사인 나는 문제없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느 동굴을 발견했다.
“성검 아줌마가 여기래.”
“딱 봐도 알겠다.”
동굴 주변의 석벽(石壁)에는 용사와 마왕이 싸우는 모습이 고풍스럽게 양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 벽화에 동의할 순 없었다.
마왕 페도나르의 모습을 흉측한 괴물처럼 표현해놨는데, 실제로 만나본 그는 머리 좌우에 뿔이 달린 신사였다.
역으로, 마왕에게 납치된 요정왕 마누라가 훨씬 악마 같았다.
나는 동굴 위쪽을 올려다봤다.
[수련의 동굴]
황금색 판자에 동굴의 용도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성검3의 경험담에 따르면, 여기서 용사로서 진정한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오빠. 이 동굴은 용사만 들어갈 수 있대.”
라누벨이 따라오지 못해서 무척 아쉽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게는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오냐. 성검3. 그 진정한 강함이, 우정이나 사랑의 힘을 홍보하는 수련이면 불쏘시개로 쓰일 각오해.”
나는 성검3에게 윽박지른 후,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습하지 않고 건조했으며, 갑갑하리란 내 예상이랑 달리 환풍도 잘 되어있었다.
우우웅-
연료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은은한 빛을 내는 주홍색 야광석(夜光石)이 어두운 내부를 곳곳에서 밝혔다.
동굴의 모든 벽은 제법 반듯하게 깎여있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그려져 있다.
“악마C, 악마K, 악마M…. 흠. 저건 악마D인가? 저 휘어진 뿔은 왕자1 같은데?”
벽화에는 다양한 악마가 그려져 있었다.
마왕 페도나르처럼 무척 사악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용케도 실물을 알아볼 수 있게 그린 화가의 실력이 그저 놀라웠다.
악마들은 공통으로 용사에게 쓰러졌다.
소년 용사, 청년 용사, 소녀 용사, 하렘 용사….
나 혼자서 몽땅 쓰러트린 악마를 이들은 대체 몇 명이나 대동한 건지 실로 황당할 따름이다.
나는 벽화를 구경하면서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수련장에 도착했다.
[초심자의 방]
방의 이름부터 사람을 완전히 어린애 취급이었다.
내 앞에는 성인 여성 크기의 목각인형이 서 있었는데, 손에는 나무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음?”
목각인형을 간단히 박살 내주려던 나는 발걸음을 멈추면서 흠칫했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진 탓이다.
능력치를 살펴보니,
▷종족: 휴먼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신성Z ■■D
▷상태: 수련
종족, 레벨, 직업, 스킬, 상태.
몽땅 사라지고 맨몸뚱이가 되어버렸다.
초월영역 초입에 들어선 신성Z는 끄떡없었지만, 나머지는 회귀한 직후보다 더 최악이었다.
종족과 직업마저 원주민 수준으로 격하됐다.
블랙박스는….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D
▷C: 대상을 망각시킨다.
▷D: 혼동하지 않는다.
▷E: 파괴되지 않는다.
▷F: 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름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자이크로 가려져 있던 다음 효과를 알 수 있게 변했다.
이 수련장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지금은 일단, 눈앞의 목각인형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퍽-
내가 1레벨로 변했어도 몸은 여전히 무쌍이었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과 생명과학의 결합으로 탄생한 이 육체는 판타지 능력치랑 별개의 산물.
나무가 아닌 돌로 된 골렘이 튀어나와도 끄떡없다.
콰광-!
주먹으로 목각인형 하나를 흔적도 없이 박살 내줬다.
그 직후,
척, 달그락달그락.
척, 덜그럭덜그럭.
어두컴컴한 방 천장에서 목각인형 둘이 뚝 떨어졌다. 놈들 또한 나무몽둥이를 들고 내게 덤벼들었다.
퍽, 퍽-
하지만 먼지가 늘어났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그런데 둘을 파괴하니 셋으로, 다시 셋을 부수니 넷으로 목각인형의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거참….”
신성Z로 동굴을 통째로 부수고 싶지만, 기껏 진행 중인 메인스토리를 망쳐버릴 순 없기에 목각인형들을 차근차근 부숴갔다.
▶난감: 강한수 생도님. 수련이 좀 되는 기분이세요…?
전혀.
이게 뭐하는 삽질인가 싶네.
▶무안: 제가 봐도 그런 것 같네요.
목각인형이 천장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저것들을 미리 부숴버리는 게 나을까?
드르륵-
내가 계획을 막 실현하려는 순간, 내가 들어온 입구의 건너편에 출구 하나가 생겼다.
너무 약해서 부수기도 귀찮은 목각인형 또한 더는 추가되지 않았다.
초심자용 수련장을 통과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설마, 계속 이런 식인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
[숙련자의 방]
[전문가의 방]
[지배자의 방]
[승리자의 방]
[도전자의 방]
...
상대만 바뀌는 지긋지긋한 수련이 계속됐다.
난이도가 점차 오르면서 후려치는 손맛이 생기긴 했지만, 내 성스러운 주먹 앞에선 모든 인형이 평등했다.
퍽- 콰쾅!
퍽- 우득!
숙련자의 방부터 보스 같은 게 나왔고, 지배자의 방부터는 수련장 지형이 괴팍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도전자의 방 이후부터는 ‘동굴 나가기’ 선택지가 추가됐다.
하지만 내 선택과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진격! 진격! 진격!
이 수련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걸까?
[초월자의 방]
이전 방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어서던 나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
방에 이미 선객이 있었던 탓이다.
▷종족: 올드 휴먼
▷레벨: 1
▷직업: 왕자(국력=기력↑)
▷스킬: 기력Z 침투Z
▷상태: 수련
이 새끼는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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