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6회차] 최초의 용사
졸업자의 방은 4차원이었다.
동굴 안이 틀림없음에도 푸른 하늘이 보이고, 대지에는 푸른 잔디와 꽃들이 만연하게 피어나 있었다.
앞장서서 걷는 여사제가 나아가는 방향 저 멀리, 분수대와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정원 한복판에는 웅장한 신전이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광경.
이 신전은 내가 졸업생 페스티벌에서 보았던, K부녀를 가둬둔 지하감옥이랑 건축양식이 똑같은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궁전(宮殿)이 아닌 신전(神殿)이라고 느꼈다.
그건, 정원 출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동상 탓이다.
“최초의 용사….”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고 신(神)이 되었다는 전설의 용사.
남자고 이름은 ‘선배1’이다.
세계 곳곳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 초상화들을 참고한 화가들이 또 그려서 후대에, 후대에 남겼다. 그만큼 선배1은 판타지아 대륙에서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여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습니다. 이 앞의 신전은 그분의 업적을 찬양할 목적으로 아주 오래 전에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감추어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 테니, 저를 따라와 주세요.”
우리는 선배1의 거대한 동상 가랑이 사이를 지나서 정원을 쭉 가로질렀다.
정원사가 24시간 관리하는 걸까. 모든 초목(草木)이 빤듯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삐져나온 잡초, 나뭇가지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역으로 삭막해 보였다. 한밤중의 서늘한 사막을 보는 기분이었다.
“혼자 살아?”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후대의 용사님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쭉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참, 대단히 피곤하게 사네.”
나는 고결하신 여사제의 능력치를 살펴봤다.
▷종족: 올드 휴먼
▷레벨: 1
▷직업: 대사제(교세→마성↑)
▷스킬: 축복Z
▷상태: 관리
조금 전의 왕자처럼 이 여자도 ‘늙은 인간’이라고 표시됐다. 직업은 그다지 볼 게 없었지만, 스킬에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Z등급 축복.
초월영역이란 게 흔한 모양이다.
“이곳이 갑갑하긴 해도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초월영역에 든 후대의 용사님이 최초의 용사처럼 삐뚤어지지 않고 올바르게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음…?”
말하는 뉘앙스가 이상한데…?
“거의 다 왔습니다. 용사님.”
신전 내부는 넓기만 하고 황량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환상적인 예술성을 뽐내고 있었지만, 거기서 쏘아진 빛을 받아줄 예술품이 없었다.
과거에는 이 허전한 공간에 무언가 잔뜩 있었던 것 같지만, 전부 도굴되고 빈 창고처럼 신전만 오도카니 남은 듯했다.
얼마 안 가서, 우리는 신전 최심부에 도착했다.
거기에도 선배1의 동상이 있었다.
“성검?”
황금색으로 된 동상의 손에는 에메랄드를 녹여서 코팅한 것 같은 연녹색 검이 쥐어져 있었다.
내 용사로서 본능이 저것은 성검이라고 알려줬지만, 외형이나 색채는 요정왕에게나 어울릴 디자인이었다.
여사제가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최초의 용사랑 평생을 함께한 검입니다. 당시에는 성검이란 개념이 없었기에 최강의 마법검으로 불렸었죠. 저는 그분의 아내로서 오랫동안 이 검을 지켜왔습니다.”
“과부였군.”
“그런 식으로 해석해달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여사제가 앙증맞게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한차례 웃은 후에 말했다.
“성검 말고는 또 없어?”
이미 내게는 성검2가 있다. 여기서는 소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내 파트너가 영영 사라진 건 아니다.
용사가 소지할 수 있는 성검은 한 자루뿐.
굳이 더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
“과거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최초의 악마를 무찌른 최초의 용사는 500년도 안 돼서 폭주했습니다. 긴 세월 동안 내조해온 아내들에게 일방적인 이해를 강요한 후, 세상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네. 그래요. 바람피우기 시작한 거죠!”
아, 또 시작됐다.
유치찬란한 세상의 진실.
내 고향별 지구에도 비슷한 사례가 아주 많다. 그중에 유명한 예를 하나 들자면,
트로이 전쟁.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여신이 황금 사과를 남기고, 그걸 차지하기 위해 세 여신이 다투고, 해결사로 나선 트로이 왕자가 미의 여신에게 원흉의 황금 사과를 준다.
이 세상은 Give and take!
황금의 사과를 차지한 미의 여신은 감사의 표시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트로이 왕자에게 보쌈해준다.
졸지에 마누라를 빼앗긴 그리스 왕은 형이랑 트로이 왕국으로 원정을 떠난다.
숱한 영웅과 젊은이가 이 전쟁으로 죽고, 승리에 취한 트로이군은 성문 앞에 버려진 목마를 안으로 들이는 바람에 패배한다.
결론.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여자의 행패가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진실은 역시 부질없도다….”
나는 벌써 흥미를 잃었다.
이 수련의 동굴을 깬 보상만 챙겨서 얼른 나가고 싶다.
“용사님. 쉽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니에요.”
여사제는 그간 남편에게 쌓인 분노를 터트리며 내게 하소연했다. 여태까지 어떻게 참아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콩가루 같은 가정사를 폭포수처럼 떠벌렸다.
“남의 가정사에는 관심 없어.”
슬슬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흠. 죄송합니다. 살짝 흥분해버렸네요.”
눈치 빠른 여사제가 찔끔하더니 바로 사과해왔다.
“알아들었으면 빠르게 본론만.”
“네. 동고동락해온 동료들의 사랑과 우정을 무시한 채 날뛰던 최초의 용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동료들의 협공에 패배한 최초의 용사는 세상 저편으로 도망쳤고요. 그분은 여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게 과부란 호칭은 잘못된 겁니다. 아셨죠?”
진짜로 알 바 아니다.
“후대의 용사님께 제 슬픈 과거사를 이야기해드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최초의 용사처럼 타락하지 않도록 유념해주세요.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더라도 힘에 취하지 않고 정의로운 용사로 계속 남아주세요. 부탁합니다.”
“오냐.”
나는 여자 문제에 있어선 대단히 깔끔한 남자다.
선배1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이 앞에 남은 시련은 총 3가지입니다.”
여사제가 손가락 3개를 펴며 말했다.
“읊어봐.”
“최초의 용사를 닮은 저 동상이랑 싸워서 이길 것. 승리 후에 성검의 인정을 받을 것. 마지막으로, 동상 안에 깃든 그분의 힘을 당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겁니다.”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여사제는 3가지 시련이라고 했지만, 동상을 쓰러트리는 첫 번째 시련 외에는 무난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딸려오는 보상 같은 느낌.
여기서 문제는, 저 동상이 얼마나 강하냐는 것이다.
“난 준비가 끝났으니 얼른 시작해.”
가볍게 몸을 푼 후에 여사제에게 말했다.
그녀가 답했다.
“가까이 가시면 저절로 시작됩니다.”
“그래?”
“약간 수세에 몰리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한때는 용사의 동료였습니다. 후대의 용사님께 사랑과 우정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해드리기 위해서라도 가세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동상의 전투력을 알 수 없는 이상, 공짜로 도와주겠다는 축복Z의 여사제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내 1회차 동료들처럼 도움은커녕 민폐만 끼친다면 바로 허리디스크로 응징해주겠지만.
나는 천천히 동상에 접근했다.
드드드드…!
성검을 노리는 도둑놈을 감지한 동상이 흔들렸다.
번뜩!
놈의 황금으로 덮여있던 두 눈이 뜨여졌다.
눈구멍에 박힌 흑요석이 요요한 빛을 내뿜었다. 저것이 골렘의 핵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능력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종족: 카오스 골렘
▷레벨: 100
▷직업: 영웅(경험치 200%)
▷스킬: 혼돈Z ■■C
▷상태: 해동
동상의 스킬을 확인한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눈에 흙이 들어가서 잘못 본 게 아니다.
■■C
C등급 블랙박스였다.
선배1의 힘이 깃들었다는 황금색 골렘도 나처럼 블랙박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스킬 등급이 나보다 높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휘이익-
유감스럽게 고민할 틈이 없었다.
황금으로 된 무거운 몸뚱이란 게 믿기지 않는 속도로 골렘이 내 쪽으로 도약해온 탓이다.
첫수는 찌르기.
혼돈의 회오리가 성검의 연녹색 칼날을 감싸고 있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믹서기처럼 갈아버릴 기세다.
“미친!”
내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해볼 만했다. 하지만 그건 인형들도 나랑 똑같이 1레벨이었던 덕분이다.
그런데 눈앞의 놈은 100레벨.
나 같은 1레벨이랑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스킬 효율이 급격히 상승해버렸다. 심지어 등급도 초월영역에 접어들었기에 내 이점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역으로 불리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용사님!”
아니, 열세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여사제가 가세하듯 멀리서 내 등 쪽으로 양 손바닥을 뻗었다.
솨아아!
그녀의 손을 떠난 새하얀 빛이 내게 스며들었다.
▷종족: 휴먼
▷레벨: 1
▷직업: 성기사(신성=축복↑)
▷스킬: 신성Z ■■D
▷상태: 수련, 축복, 신성
고위급 여사제에게 축복을 받은 탓일까? 내 직업이 바뀌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
“허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몸이 축복으로 충만해졌다. 안전한 뒤편에서 여사제가 나를 축복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새로운 스킬이 추가됐다.
▷종류: 직업스킬
▷명칭: 축복
▷등급: Z
▶ZZ: 영원한 축복을 발현한다.
▶Z: 축복을 축복한다.
▷SSS: 부정한 축복을 발현한다.
▷SS: 신성한 축복을 발현한다.
▷S: 행운의 축복을 발현한다.
▷A: 자신을 축복한다.
▷B: 전투의 축복을 발현한다.
▷C: 수호의 축복을 발현한다.
▷D: 죽음의 축복을 발현한다.
▷E: 생명의 축복을 발현한다.
▷F: 대상을 축복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직업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초월영역 스킬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것도 무척 알찬 효과로 가득한 보조계통이었다.
나는 곧장 셀프(Self)로 축복을 걸었다.
쏴아아-!
여사제 2번, 나 2번. Z등급 효과로 축복이 4번 중첩됐다.
그 성능은 실로 놀라웠다.
“하핫!”
웃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나는 골렘의 연녹색 성검을 맨손으로 잡아챘다.
혼돈의 회오리가 내 오른팔을 갈기갈기 찢을 기세로 휘저었지만, 신성함과 축복으로 떡칠한 내 피부에 상처를 주진 못했다.
골렘의 흑요석 눈동자에 짙은 당혹감이 깃든다.
빠각!
나는 그 틈에 무릎을 쳐올려서 골렘의 사타구니를 뭉개줬다.
물건은 없지만, 무게중심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그 뒤에는 일방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나를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안간힘 쓰는 골렘의 손에서 성검을 강탈한 후, 한 방에 목을 쳐줬다.
댕강- 푹!
그 뒤에 골렘의 핵인 흑요석 눈알을 찔러줬다.
뚝.
머리가 날아갔어도 계속 날뛰려던 골렘의 몸뚱이가 멈췄다. 그리고 관성에 의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그걸로 전투는 종료됐다.
“이 녀석, 손맛은 제법 괜찮네.”
하지만 내 파트너는 앞으로도 성검2다. 이 연녹색 성검은 비실비실한 요정처럼 너무 가볍고 얇아서 휘두르는 맛이 없었다.
특별한 기능이 탑재된 것 같지도 않고…. 어?
스멀스멀~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손바닥에서 성검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로 모자라서 녹색 기운이 내 몸을 잠식하듯 넘어왔다.
이건 대체 무슨 기능이지?
내 의문을 풀어주듯 여사제가 끼어들었다.
“축하합니다, 용사님! 성검의 인정을 받으셨군요? 그것은 현존하는 성검의 원형입니다. 용사님의 정신에 스며들어서 앞으로의 전투를 도와줄 겁니다. 원래라면 그렇습니다.”
스르르르….
파괴된 골렘의 눈에 박혀 있던 흑요석 잔해에서도 검은색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것도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다는 건가?”
내 질문에 여사제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함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용사님! 최초의 용사에게서 빼앗은 금단의 힘이 당신 소유가 됐습니다. 그 대가로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성검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만, 너무 심려치 마세요. 용사님은 앞으로도 훌륭한 용사로서 활약하실 겁니다. 저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동료로서 영원히….”
뜬금없이 사랑을 속삭이며 내 넓은 가슴을 쓰다듬는 여사제.
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례해줬다.
“축하해줘서 고마워. 힘은 잘 받아갈게.”
“네-? 꺄읔?!”
■■D→■■C
우득.
너무 고마워서 그녀의 목을 비틀어줬다.
하지만 이 수련의 동굴에선 몇 번을 죽여도 죽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 새롭게 얻은 블랙박스 효과를 그녀에게 시험해보기로 했다.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C
▷B: □□□ □□□□□.
▷C: 대상을 망각시킨다.
▷D: 혼동하지 않는다.
▷E: 파괴되지 않는다.
▷F: 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한 키스.
사랑한다고 고백해준 여사제에게 보내는 작별선물이다.
“음.”
“우읍?!”
스멀스멀~
블랙박스로 형성된 강력한 정신방어 탓에 갈 곳 잃은 성검의 연녹색 기운이, 내 혀를 타고 여사제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러면 어떻게 된다고? 히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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