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6회차] 목격자님! 도와주세요!
진한 입맞춤을 나누던 여사제의 눈동자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블랙박스 효과로 기억이 싹 사라졌다는 증거.
하지만 그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녹색 빛이 깃들면서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태도는 이전이랑 180도 달라졌다.
“주인님. 명령을.”
귀여운 척이 빠진 기계적인 음성.
이 얼마나 듣기 좋은가?
태도와 성격만 변한 게 아니다.
▷종족: 올드 휴먼
▷레벨: 1
▷직업: 노예(경험치 50%)
▷스킬: 축복Z
▷상태: 망각, 관리, 종속, 성검
고결한 여사제에서 비천한 노예로 추락했다.
기억이 깡그리 사라진 백치 상태가 된 그녀는 무력하게 성검의 조종을 받으면서 직업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사람에서 충실한 도구로.
노예란 표현은 결코 틀리거나 과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쓰임새를 고민할 때였다.
파스스···.
가만히 대기 중이던 여사제의 몸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경험치가 된 몬스터의 사체처럼 세상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내가 한 게 아니다.
“이게 뭔 일이래···?”
그렇다면 여사제랑 하나가 된 성검은 어떻게 됐을까?
이쪽도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빠직-!
검신에 균열이 생기더니 유리처럼 부서졌다. 하지만 성검에게 종속된 여사제의 힘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종족: 휴먼
▷레벨: 1
▷직업: 교황(신성=포교↑)
▷스킬: 신성Z 축복Z ■■C
▷상태: 수련
고스란히 내게 흡수됐다.
얼떨결에 두 번째 초월영역을 열어버린 셈.
“다음은 마기가 될 줄 알았는데.”
직업은 성기사에서 한술 더 떠서 종교지도자가 되어있었다. 성자보다는 직업 특전이 한 단계 낮아서 흥미가 동하진 않았다.
포교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날조의 하위호환이다.
날조하면 포교는 자연스럽게 딸려오는 거 아닌가?
▶빼꼼: 끝나셨나요?
교생 아가씨.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하마터면, 순진한 용사님이 굶주린 유부녀에게 먹힐 뻔했다구?
▶당황: 죄송합니다. 교생 신분으로 관여할 수 없는 수업내용도 있거든요. 무사히 이수하신 것 같아서 기쁘네요!
...그래?
교생에게 다 떠넘긴 교직원 일동이 처음으로 간섭했다.
수련 도중에 튀어나온 건 아니었지만, 내게 야금야금 정보를 제공하던 교생의 입을 막았다.
그것은 쉽게 볼 수 없었다.
최초의 용사(선배1).
블랙박스.
이 둘을 자세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었다.
축복Z만 남기고 사라진 여사제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선배1도 판타지아 세계에서 탈주했다는 듯하다.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선배1에게서 빼앗았다는 금단의 힘, 블랙박스에 그 힌트가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판타지 세계에서 처음으로 꿈과 희망이 보이는군!”
드르륵-
선배1의 동상이 안치되어있던 자리에 출구가 열렸다.
음흉한 안내자는 죽었고, 통로에도 나가는 길이라고 쓰여있진 않았지만, 여기서 또 이상한 수련으로 이어질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수련의 동굴을 빠져나왔다.
*
“환영합니다, 용사님!”
선량한 용사를 품절남으로 만들려는 유부녀를 무찌르고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며 나를 반겼다.
자동반사로 주먹이 나갈 뻔했다.
“갑자기 웬 존댓말?”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도, 건방지게 오빠라고 부르면서 반말 툭툭 던지던 계집애가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다.
이게 원래 내가 알던 라누벨이다.
하지만 이번 6회차는 여동생이란 설정 아니었나?
라누벨이 허리춤에 찬 성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선택받은 용사님이니까요. 성검 아줌마가 말하길,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용사는 가족도 벨 수 있어야 한대요. 그래서 지금처럼 사랑스러운 여동생으로 남아있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어요.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벨 수 없으니까요!”
“흠···. 그래?”
어째서 못 벤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 졸업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라누벨을 베어버릴 수 있다. 여동생이든 동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얘는 수련의 동굴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더니, 정말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듣기론, 교직원 일동은 수업 중에 간섭할 수 없다.
하지만 도덕 선생이 내게 끊임없이 잔소리했던 것처럼 간접적으로 참견할 순 있지 않을까?
라누벨의 갑작스러운 태도전환.
내게 ‘귀여운 여동생’이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한 교직원이 그녀를 설득해서 틀어버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때 가장 의심스러운 건?
“성검3이 그런 말을 했다고?”
“네, 용사님.”
“...그렇군. 앞으로도 기대가 커.”
지난 여정을 돌이켜봤다.
내게 성검2가 없었다면 어쩔 수 없이 성검3를 쥐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검3의 조언을 온종일 들었을 터.
그 포지션은 도덕 선생이랑 완벽하게 일치했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나는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 우연을 가장한 조작을 너무나 많이 겪어봤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랬다.
“YuYuuu-!”
“헉! 오크다! 숫자가 많아!”
“누가 좀 도와주세요~!”
“BuBu···!”
“이놈들! 여자는 안 된다!”
울창한 수풀 너머로 환청이 들려왔다.
정말일 리 없다.
“용사님!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요!”
라누벨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정의감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녀의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리는 엉덩이는 솔직했다.
현자의 지팡이를 또 써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넘실거렸다.
“라누벨. 잘못 들었겠지.”
사람과 오크의 비명과 절규가 동쪽에서 더욱 크게 들려왔다.
흠. 갑자기 서쪽으로 가고 싶어지는군.
“라누벨의 귀가 잘못된 거라고요?!”
“그래.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여기는 국왕 직할령으로,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야. 곳곳에 경계병들이 배치되어있고, 왕족 전용 사냥터라서 출몰하는 몬스터들의 수준도 매우 낮아. 제삼자의 도움을 요청할 만큼 한심한 인간들이 들어올 리 없어.”
“그, 그건 그런데요···.”
부스럭부스럭.
그때, 뒤편에서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녀의 애절한 외침이 이어졌다.
“도와주세요!”
사냥터에 나풀거리는 치마와 높은 굽의 구두 차림으로 들어온 멍청한 여자였다.
그녀는 신사답게 생긴 오크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NuNu···!”
오크가 개뼈다귀처럼 가느다란 소녀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남자다운 기세로 확 끌어당겼다.
“꺅?!”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얻는 법.
소녀가 앙탈을 부리다가 마지못해 오크의 품에 안긴다.
앞으로 예쁜 사랑 하길···.
“얍!”
“KuKu~?!”
라누벨의 귀여운 척이랑 오크의 구슬픈 절규가 거의 동시에 터졌다.
현자의 지팡이 끝에 달린 황금색 구슬에서 쏘아진 마법의 화살이 오크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털썩.
머리에 구멍이 뚫린 오크가 자빠졌다.
사랑이 뭔 죄라고···.
“용사님! 제가 오크를 처치했어요!”
200레벨 마법사가 20레벨 오크를 죽이고 기뻐한다. 약자를 괴롭혔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쯧쯧. 불쌍한 오크 녀석. 귀여운 척하는 여자애보다 약하게 태어난 네 운명을 저주하거라.”
“어째서요?!”
여전히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라누벨을 무시하고, 나는 여전히 수풀에 주저앉은 채 오들오들 떠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신분파악에 용이한 능력치 확인은 기본이다.
▷종족: 휴먼
▷레벨: 15
▷직업: 공주(국력=매력↑)
▷스킬: 애교C 매력D 사교E 마법F
▷상태: 공포, 불안
왕족과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금지구역에 들어온 화려한 복장의 소녀가 공주인 건 너무나 당연한 걸까.
일단은 내 기억에 없었다.
1회차에서 내가 북대륙으로 넘어오기 전에 죽었다고 해석하면 될 듯했다.
“귀찮게 하는구먼.”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공주를 라누벨에게 맡긴 후, 나는 수련이 끝나면서 복구된 스킬들을 일제히 활성화했다.
화아아아-
나를 중심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수련의 동굴은 단순히 용사를 엿 먹일 용도로 제작된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손발처럼 당연하게 의존해온 스킬과 직업 특전 없이 불리한 조건에서 자신을 쥐어짜는 훈련.
나는 신성Z로 거의 모든 방을 손쉽게 격파했지만, 졸업자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조금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아주 조금.
반골F→반골D
극복F→극복E
열혈F→열혈E
요령이 없어서 정말 힘겨웠던 1회차 때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스킬이 다수 생성됐다.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서 거기에 걸맞은 스킬이 줄줄이 성장한 것이다.
기존 스킬도 골고루 성장했다.
“그 왕자랑 다시 붙어도 해볼 만하겠는데?”
나도 이젠 초월영역 스킬이 둘이다. 그리고 똑같은 초월영역이라도 순수한 전투력이란 측면에선 스킬 구성이 내가 훨씬 유리했다.
여기에 성검2의 증폭이 곁들어졌다.
“우선은 가볍게 정리해볼까.”
내 몸에 신성한 축복을 걸었다.
두 번 걸었다.
성검2의 증폭기로 효과가 증폭된 신성Z 위로, 마찬가지로 강화된 축복Z의 신성한 축복을 추가로 2번 더 중첩했다.
단순 계산으로만 5중첩.
극한까지 물오른 신성함이 내 몸을 휘감았다.
탁!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나를 중심으로 사냥터 전역에 퍼져나간 신성한 기운이 모든 몬스터를 박멸했다.
종족, 레벨, 스킬, 상태···.
싹 무시하고 평등한 안식을 선사해줬다.
몰살C→몰살B
오크들의 습격을 받은 현장으로 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팔다리와 머리가 절단된 채 죽은 사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중 일부는 오크에게 먹힌 자국도 있었다.
“흑흑, 흑흑···.”
“우으으으···.”
공주의 시녀로 짐작되는 두 여인과 여기사는 찢어진 옷차림으로 길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을 튕기기 직전까지 여기에 오크들이 바글바글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을 터.
충격과 공포로 정신이 붕괴한 표정들이다.
▶우울: 불쌍해요···.
나도 공감이야, 교생 아가씨.
앞으로 이 여자들은 몸의 상처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끌어안은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보통은 말이다.
이 여자들은 운이 좋았다.
전문해결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내 경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작정 나서기 좋아하는 동료들의 뒤치다꺼리만 10년 넘게 해왔다.
그 과정에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뻔했던 원주민들의 정신상담도 적지 않게 맡았었다.
성과는 노하우가 쌓이면서 점차 좋아졌다.
▶깜짝: 심리치료도 하셨다고요? 강한수 생도님은 도대체 안 해본 게 뭔가요···?
교생 아가씨. 너무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마.
하지만 그건 구닥다리 방식이다.
오늘부터는 쉽고 빠르게 가려고 한다.
“기름진 삼겹살 파티에 겁먹은 얼굴을 한 아가씨들. 내 눈을 바라봐. 그러면 끔찍했던 기억이 사라질 거야. 상처받은 몸은 내 축복이 상쇄해주고.”
그녀들의 안 좋은 기억을 블랙박스로 말끔히 지웠다. 더럽혀진 몸은 축복으로 말끔히 정리하고.
“...아!”
“...어머!”
가슴과 국부를 가린 채 웅크리고 있던 여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자기들이 흙바닥에 누워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들.
하지만 얼마 안 지나서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으며, 주위에 남정네들의 시체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꺅꺅!” 호들갑 떨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절망에 찌든 얼굴은 아니었다.
심리상담 없이 말끔히 해결!
나는 여자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서, 라누벨의 부축을 받으면서 어슬렁어슬렁 나온 공주랑 그녀들이 재회했다.
“공주님! 어디 가셨어요!”
“미, 미안.”
여기사에게 혼난 공주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 지워지면서 약간의 혼선이 있었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큰일이에요. 왕자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첫 사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구출된 여자들은 샌님처럼 생긴 청년의 시체를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자가 죽었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었다.
바로 그때,
달그락달그락.
일련의 무리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이 주위에 널브러진 자들이랑 질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정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 무리의 선두였다.
▷종족: 휴먼
▷레벨: 285
▷직업: 왕족(혈통→품격↑)
▷스킬: 마법C 마력C 마술D 악령D 품위E···
▷상태: 당황
밤고구마처럼 생긴 까무잡잡한 얼굴과 준수한 능력치가 내 기억이랑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마법왕국의 다음 국왕이다.
친형인 현직 국왕이 투병 끝에 죽는 3년 뒤, 백성과 귀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화려하게 왕위에 오른다.
일도 제법 잘했던 거로 기억한다.
마법사답게 계산이 빠르고, 등가교환의 법칙을 준수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그도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전부 죽여라.”
뭐,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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