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6회차] 꿈과 희망을 위해
“공작님. 목격자는 성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 성스러운 분을 공격하는 건….”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공작님!”
모국의 왕자와 공주를 죽이는 건 괜찮지만, 성스러운 분을 공격하는 범죄는 꺼리는 새가슴들이었다.
하지만 다음 국왕이 될 남자는 부하들의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시끄럽다! 성스럽다고 살려두면 필시 화근이 될 것이다! 최대한 정중히, 고통 없이 보내드려라!”
그의 대사로 알게 된 사실 하나.
모든 원주민이 신성함에 취약한 건 아니다.
신성하다는 걸 알면서도 본인의 욕망이나 이기심 등의 사유로 “성스러워서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신성Z 효과가 판타지 원주민에게만 통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범위가 지구인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열린 까닭이다.
누구든 나를 보면 성스럽다고 느낀다는 뜻이니까.
신(神)의 존재가 확실한 판타지아 대륙보다는 덜하겠지만, 신성Z는 지구에서도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성스러운 분이시여! 용서를!”
흉흉한 무기를 쥔 사내들이 내게 덤벼들었다.
말들의 속도는 시속 60km로, 그걸 탄 인간들이 돌격해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매우 짧았다.
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인 법.
나는 그들이 도달할 때까지 수많은 생각을 했다.
이들을 죽임으로써,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채점관이 내게 불이익을 줄 것인가? 아니면 무난하게 넘어갈 것인가?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이만한 능력을 보유한 내가 굳이 위험부담을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586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성Z 축복Z 마기SSS 날조SS 소환S…
▷상태: 거룩, 성검, 성녀, 축복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상대방을 설득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면,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평화롭게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준비가 끝났다.
1) 자격증은 없지만, 10년 경력의 심리치료
2) 내 깨끗한 신분을 증명해줄 신성Z
3) 환자의 심신을 안정시켜줄 축복Z
4) 악마숭배자에게 효과적인 마기SSS
5) 변수를 줄이고 올바르게 이끌어줄 행운A
6) 이 모든 걸 아우르는 날조SS의 조화
신성Z 하나만으로는 살짝 힘들거나 번거롭지만, 수많은 스킬이 곁들어지면 얼마든지 극복하고 제어할 수 있다.
“싸움을 멈추시오!”
달그락-
내 우렁찬 한마디에 모두가 말을 세웠다.
나는 교황의 법의(法衣)처럼 신성과 축복을 몸에 두르고, 전의(戰意)로 흥분한 적들에게도 축복을 걸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마무리로 10년 노하우의 표정을.
“헉!”
“히익?!”
모두가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일국의 왕자와 공주를 살해하는 행위는 반역죄입니다. 집에서 여러분과 월급날을 기다리는 처자식을 떠올리십시오. 없다면 늙은 부모와 귀여운 동생, 여자친구를 생각하세요.”
“그런….”
“음….”
“듣지 마라! 다 죽이면 아무도 모른다!”
다음 국왕이 될 뻔했던 밤고구마 공작은 당황한 얼굴로 부하들을 열심히 득달했다.
하지만 왕족이란 지위와 D급 품위 빼면 아무것도 없는 그의 설득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십시오. 제 뒤에는 현자가 있습니다. 또한, 왕자와 공주가 아무리 무능한 철부지라도 왕족이며, 여러분이 따르는 공작은 조카를 죽이려는 냉혈한입니다. 왕이 무능하면 섭정을 새우면 됩니다. 굳이 왕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랜만에 신사의 언어를 썼더니 목이 말랐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저들은 여전히 선택을 못 하고 갈팡질팡했다.
신의와 충성.
그 둘로 꽤 끈끈하게 묶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도 히든카드가 있다.
판타지아 대륙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들.
“위대하신 분께 영광을-!”
“커억?! 어, 어째서…!”
부하의 검에 뒤통수를 찔린 밤고구마 공작이 경악한다.
그가 마법왕국의 국왕이 되었을 때, 이인자까지 팍팍 밀어주는 측근에게 배신당했으니 그럴 만했다.
믿기지 않고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종족: 휴먼
▷레벨: 235
▷직업: 귀족(족보=기품↑)
▷스킬: 검술C 품위C 사교C 마기D 정치D…
▷상태: 맹목
D급 마기.
우리는 충성보다 끈끈한 마기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옥좌에 앉은 채 빈둥거리며, 부하와 자식들을 용사의 경험치로 보내는 마왕 페도나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쿠데타 한 번 없다.
악마들이야말로 철저한 계급사회.
자기보다 마기 많은 자에게 절대복종한다.
철퍼덕.
뒤통수를 당한 밤고구마 공작이 말에서 추락했다. 왕족 이상의 자부심을 가진 마법 한 방 써보지 못한 채로.
순수하게 마법만 탐구했다면 현자가 됐을 거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남자의 허무한 최후였다.
“숙부님이 우리를 죽이려 했다니….”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공주님. 얼른 왕궁으로 돌아가요.”
공주와 여기사, 시녀들이 눈치 없이 조잘거렸다.
역모죄에 연루돼서 패가망신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가득한 사내들 앞에서 저딴 말을 하면 어쩌라고?
그래서 살짝 어루만져주기로 했다.
“숙부님이 왜 여기에...?”
“어라? 어머나!”
“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왕궁에 돌아가자마자 골골 앓는 국왕에게 고자질할 것 같았던 네 여자의 기억을 블랙박스로 지웠다.
너무 편리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혼란: 강한수 생도님.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교생 아가씨.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불행해지게 하지 않았다.
일단 엮인 이상, 뒤처리는 완벽하게 한다.
내 두 번째 히든카드.
성녀H를 소환했다.
“부활시켜.”
“네. 주인님. 아아아~♪”
오크들에게 살해된 인간들이 몽땅 되살아났다. 레벨이 다소 하락하긴 했지만, 그건 차근차근 다시 올리면 될 문제.
왕자, 기사, 마법사, 병사….
밤고구마 공작 빼고 전부 부활시켰다.
나를 죽이려 한 죄는 무겁다. 살려두면 어차피 또 조카들을 죽이려 하거나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가 둘로 쪼개질 터.
여기서 분란의 씨앗을 제거해두는 편이 낫다.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헉! 성녀님이 어째서 여기에…!”
“기적이다! 이건 기적이야!”
이후에 자잘한 소란이 있었지만, 날조와 망각의 환상적인 콤비로 깔끔히 해결했다.
밤고구마 공작은 조카들을 구하려고 사냥터까지 달려왔다가 정체불명의 자객에게 살해된 것으로 처리.
진실을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부활하지 못한 사망자는 시체의 훼손이 심한 병사들이랑 밤고구마 공작을 합쳐서 4명밖에 안 됐다.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다만,
“천한 너희가 나를 구해줬다고 들었다. 이, 이놈?! 감히 왕자인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다니! 썩 비켜라. 신성한 자라서 이번만 특별히 용서해주마. 그리고…. 흠흠! 옆의 귀여운 마법사 여자. 나를 구한 공로를 높이 사서 내일 파티에 초대해주겠다. 영광으로 알도록.”
부활한 왕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몸을 음탕한 시선으로 훑어보는 건 얼마든지 괜찮다. 하지만 나를 무시하는 태도는 용서할 수 없다.
이번에도 재확인된 셈이다.
왕자, 왕족, 현자, 귀족, 여사제….
직업이 대단하거나 고귀한 신분들에게는 내 신성함이 통하지 않는 경향이 강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왕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보는 눈이 일단 많다.
다시 죽이면 기껏 정리된 일이 또 복잡해진다.
안 그래도 “공작님은 왜 부활이 안 될까?”라는 의문을 품은 자들이 있는 상황이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자.
그러니,
“왕자님. 제 얼굴을 한 번 봐주십시오.”
“흥! 천박한 네놈 얼굴….”
“뭐가 보이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언어랑 기초생활능력만 놔둔 채, 왕자의 기억을 싹 지웠다.
이대로면 어차피 등신 같은 왕이 돼서 나라를 말아먹을 게 틀림없으니, 아예 소프트웨어를 초기화해버렸다.
이것으로 마법왕국의 미래는 밟아졌다.
내 업적을 공표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
이놈의 오지랖과 무료봉사는 직업병이 틀림없다.
▶혼란: 깔끔한 뒷수습이 맞겠죠…?
교생 아가씨는 걱정이 너무 많다.
차근차근 따져보자.
밤고구마 공작을 따라온 자들에게도 가족과 친구가 있다. 그들이 죽으면 슬퍼할 자들이 적지 않다. 생계가 위험하거나 힘든 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유능한 고급인력이 늘 부족한 판타지 세계에서 이들의 죽음은 왕국의 치안악화와 백성의 인명피해로 이어진다.
왕위찬탈을 노리는 밤고구마 공작은 죽었다.
무능한 왕자는 기억상실로 다시 시작한다.
이것으로 왕위서열은 멍청한 공주에게 넘어갈 터.
하지만 마법왕국의 왕위계승권은 대대로 ‘남성’이 맡아왔다. 그 전통과 역사를 고려해보면, 마법의 재능이 특출난 데릴사위를 섭정(攝政) 자리에 앉힐 확률이 대단히 높다.
논리적으로 완벽하다.
이보다 행복한 뒷수습은 있을 수 없다.
“용사님. 뭔가 이상해요.”
옆에서 걷던 라누벨이 투덜댔다.
“뭐가?”
“아무튼, 이상해요!”
“투덜대는 네가 더 이상하거든? 전혀 닮지 않은 오라비에게 엉덩이 까이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
“우우….”
기억상실에 빠진 왕자 대신 우리를 초대한 공주에게는 정중히 사양의 뜻을 전했다. 마법왕국에는 볼일이 더 없으니까.
성검3도 ‘일단’은 자율모험을 권장했다.
우리는 다시 모험을 떠났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는?
현자의 지팡이를 시험해볼 때가 왔다.
*
설산M.
북대륙 중앙에 자리하는 거대한 설산이다.
설산M 곳곳에서 펑펑 솟아나는 천연온천은 수많은 여행자를 이곳으로 끌어들였고, 사람이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들은 관광지로 점차 발달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일반인만 몰렸을 터.
유황온천수랑 함께 흘러나오는 거대한 마력에 이끌린 몬스터들 때문에 설산M 주변의 평균 레벨이 급격히 올라갔다.
몬스터 레벨이 올라가면?
이것들을 천연방파제로 삼은 악당들이 설산M 깊숙한 곳에 은신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흉악범, 산적, 마법사, 추방자, 살인마, 탈옥수….
그 구성도 참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바늘 가는 곳에 실이 따라가는 법.
악당이 있는 곳에 영웅도 있다.
온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광지를 습격하는 악당들을 처단하기 위해 영웅들이 설산M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설산M이 보이는 아름다운 관광지의 치안을 지켜주면서 낭만을 즐겼다.
그리고 이 영웅들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또 몰려들었다.
우리가 방문한 마을Q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헉! 저 귀여운 고고학자는 설마…?”
“진짜다! 고고학자 라누벨이야!”
“오! 북대륙에 있다더니 정말이었네!”
골프장에 야구선수가 가면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야구선수는 야구장에 가야만 “혹시? 당신은 어느 팀의 선수가 아니신가요?”라며 인정받을 수 있다.
이건 판타지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물론, 엄청난 유명인이라면 어딜 가더라도 알아보는 자들이 많겠지만, 라누벨의 지명도는 그리 높지 않다.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거나, 혈혈단신으로 강력한 몬스터나 악마를 쓰러트린 게 아닌 탓이다.
그녀의 직업은 얍삽한 도굴꾼.
고상하게 표현하면,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고고학자다.
그래도 설산M의 어느 마을에선 꽤 먹혔다.
“그런데 옆의 남자는 누구지?”
“오오! 어쨌든 신성한 분인 건 확실해.”
“혹시, 라누벨의 남자친구는…. 히익?!”
지나가던 마을주민5가 불쾌한 착각을 해서 노려봐줬다.
“용사님! 제가 좀 유명해요!”
라누벨이 기분 나쁘게 어깨와 엉덩이에 힘을 주며 우쭐거렸다.
“라누벨, 잘 들어. 이 동네에서는 피 묻은 칼을 음유시인과 술주정뱅이들에게 보여주면서 공짜 술을 뿌리면, 하루 만에 오크 학살자 아무개로 둔갑할 수 있어.”
“엑!? 정말요…?”
라누벨은 현지민인 주제에 지구인보다도 세상 물정을 몰랐다.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안 그래도 ‘최초의 용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던 참이다.
설산M에 터를 잡은 수많은 마을 중에서 굳이 마을Q를 고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암흑상회.
이들은 돈만 되면 뭐든지 판다.
고객과 수요만 확실하다면, 성녀C가 자주 입는 속옷 색깔과 디자인까지 알아올 독종들이다.
참고로, 불사조가 그려진 분홍색이다.
탕!
나는 마을Q에서 가장 큰 술집 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 떠들던 잡것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우선은 평판 작업부터다.
“내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도록! 설산에 사는 흉악한 얼음공주를 복종시킬 신성한 용사님이다! 이봐, 바텐더! 술 창고를 활짝 열어! 내일 해가 뜰 때까지 이 술집은 내가 접수한다!”
“오오! 또 용사님인가!”
“신성한 용사 오빠! 힘내세요!”
“술? 도리를 아는 친구군!”
환호하는 술주정뱅이들.
금세 마을Q에 소문이 쫙 퍼졌다.
교직원 일동이 무슨 수작을 부리더라도 상관없다.
Z등급 왕자가 또 공격해오면 쳐죽일 뿐.
지구의 고등학생들이 합격한 대학교에 입학하듯이, 나도 졸업하든 탈출하든 지구만 가면 된다.
막연했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험가 여러분! 꿈과 희망은 살아있습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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