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6회차] 음주모험 금지!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다.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내가 술집에서 돈을 뿌린 만큼 마을Q에 “한쑤 용사님이 얼음공주를 정복한대!”라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나를 아직 모르는 사람은, 술을 못 마시는 어린애들밖에 없었다. 아니, 어른들에게 주워들은 어린애들이 더욱 극성이었다.
마을Q의 주민이나 관광객, 모험가들은 “헛소리 작작해라!” 같은 식으로 내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미 선례가 많이 있었던 까닭이다.
“얼음공주를 복종시킨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허허! 유쾌한 용사가 정말 끊이지 않는군.”
“우리야 술만 얻어 마시면 그만 아닌가? 하하!”
“그렇지! 한쑤 용사님을 위해 건배!”
설산M 주변에는 용사들로 넘쳐났다.
능력치가 주민등록증 같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판타지아 대륙에서 ‘용사’는 ‘언젠가 마왕을 쓰러트릴 자’로 해석된다.
그렇다. 언젠가 쓰러트릴….
즉, 씩씩한 모험가는 전부 용사로 불린다.
나도 이 그룹에 편입됐다.
한 떨기 눈송이처럼 아름답다는 얼음공주를 제압하고, 그녀를 신부로 맞이하겠다는 사내 중 한 명으로.
북대륙에는 그런 허풍쟁이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를 그 총각들이랑 똑같이 취급해서 매우 불쾌했지만, 얼음공주의 모가지를 잡아서 마을Q까지 질질 끌고 올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지금은 나도 말뿐인 허풍쟁이들이랑 다를 게 없으니까.
증거는 중요한 법이다.
다음으로 할 일은,
“바텐더.”
정석(졸업)에만 치중할 생각은 없다.
대학입시 방법으로 수시와 정시로 나뉘듯이, 선배1처럼 판타지아 대륙을 탈출하는 길도 틈틈이 준비할 것이다.
그러자면 정보수집은 필수.
“부르셨습니까, 무시무시한 얼음공주를 곧 차지하실 용사님. 찾으시는 안주가 있으십니까?”
“아주 화끈한 놈으로. 이따가 점심때.”
판타지아 전 대륙에 퍼진 암흑상회에서만 이용되는 ‘약속의 언어’로 고객 인증은 밤새 끝내놓았다.
1회차 때, 내가 북대륙에서 활동하던 시기보다 너무 일찍 오는 바람에 암호가 살짝 틀리긴 했지만, 매상이 잔뜩 올라서 기분 좋아진 바텐더는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
내 신성한 신분도 크게 한몫했다.
유리잔을 닦던 바텐더가 씩 웃으며 답했다.
“최고로 대령해놓겠습니다.”
*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암흑상회는 무엇이든 판다. 그리고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융통성을 발휘할 줄도 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암시장처럼 불법적인 상품을 거래하는 게 아닐 때는, 손님이 번거롭지 않도록 찾아오는 서비스도 얼마든지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약속의 언어로 검증된 손님 한정이다.
“오빠 용사님. 라누벨은 배불러요….”
“오냐. 불룩 나온 배에서 술고래가 태어날 기세네.”
“너무해…. 딸꾹!”
“닥치고 잠이나 자.”
이번에야말로 보내버릴 의도로, 밤새도록 라누벨에게 도수 높은 싸구려 술을 퍼먹여 봤다.
그러나 3회차에 이어 이번에도 실패.
해롱해롱한 그녀를 술집의 2층 숙소 방구석에 처박아둔 후, 나는 1층에서 약속된 점심을 먹었다.
검은색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어여쁜 아가씨랑 함께.
“용사님.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식사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 식당의 닭고기는 정말 신선하네요.”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아가씨가 툭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눈치 없이 헛소리하는 손님은 없다.
만약에 있다면?
암흑상회는 이때부터 상대를 ‘대등한 손님’이 아닌 ‘멍청한 호구’로 보고, 아부와 아양으로 돈을 뜯어낸다.
아무튼,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물고기답게 멍청한 인어공주 아쿠아, 암흑상회 관계자만 보면 긴 귀를 틀어막는 요정공주 실비아 정도만 늘 호구로 취급된다.
아! 옛날 생각 하니 또 열 받네.
“최초의 용사에 대해 알고 싶은데.”
“마왕 페도나르를 최초로 쓰러트린 용사님 말씀이시죠?”
“그래.”
재확인한 아가씨가 달콤한 과일주로 목을 축인 후에 말했다.
“그분의 위인전이나 동화에 나오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궁금하신 건 아니시겠고…. 최초의 용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 마왕을 쓰러트리기까지의 기간은 7년. 짧긴 하지만, 이뤄놓은 업적과 흔적들은 정말 방대합니다. 범위를 정해주셔야….”
“전부.”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아요.”
이마를 가볍게 찌푸린 아가씨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나도 웃는 얼굴로 넌지시 찔렀다.
“그러면 이렇게 할까? 중복되지 않는 정보로만 모아서 얇은 법전 두께를 만들어주면 이걸 주지.”
탁.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창고’에서 꺼낸 설계도면 하나를 보여줬다.
시큰둥했던 아가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보다시피 골렘의 설계도다. 흔치 않은 물건이지. 원한다면 첫 장을 선수금 대신 미리 줄 수도 있어. 대신, 내가 제시한 양만큼의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면 설계도는 여기서 끝, 정보는 무료제공. 어때?”
“...잠시만요. 저는 이쪽 전문가가 아니라서요.”
아가씨가 바텐더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약속의 언어가 쓰이긴 했지만, 골렘 방면의 전문가를 호출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암흑상회의 또 다른 장점.
여기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법이 없다.
서비스라면서 술집에서 제공해준 디저트를 천천히 음미하며 다 먹을 때쯤, 아가씨가 부른 사람이 도착했다.
내가 1회차 때 보았던 암흑상회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종족: 드워프
▷레벨: 145
▷직업: 공학자(지식=마도↑)
▷스킬: 마도S 마술A 마력A 지력B 세공C…
▷상태: 기대
난쟁이가 술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영어로는 드워프(Dwarf).
판타지 세계관에서 가장 손재주가 좋은 종족이다. 하지만 인간 장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우직한 성격, 평균 500년을 살며 쌓은 연륜과 경험의 힘이 더 크다고 본다.
종족성향과 재능이 반반이랄까.
내게 다가온 난쟁이는 자기네 종족의 평균 신장인 1m쯤 했으며, 덥수룩하게 자란 붉은색 턱수염은 허리까지 앞치마처럼 쭉 내려와서 덮었다.
난쟁이답게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동안(童顏)의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이 천진난만했다. 턱수염만 자르면 인간의 아이로 충분히 오해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수염을 정리하고 인간 행세를 하면서 여행하거나 사회에 녹아든 난쟁이도 있다. 그러나 수염이 풍성할수록 ‘미남’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수염을 정리하는 난쟁이는 드물다.
하지만 뭐가 됐든 간에,
“안녕하시오. 문제의 설계도를 보러 왔소.”
어린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난쟁이는 절대 착한 종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의 죽을 때까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는 난쟁이들의 사고방식은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무서운 구석이 있다.
웃으면서 곤충의 다리를 뜯는 아이를 본 적 있는가?
난쟁이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대량살상무기를 만든 후에 걸작이나 예술 같은 헛소리로 포장한다.
이 검은 너무 위험하니 봉인….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후에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이다.
수염이 붉은 난쟁이를 본 내 입에선 한숨부터 나왔다.
“하필 너냐….”
이건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아니, 암흑상회 소속이니 당연히 짐작하고 있어야 했던 걸까.
눈앞의 난쟁이는 평범한 공학자가 아니다.
북대륙의 전쟁을 주도한 원흉이다.
별명은,
핏빛 난쟁이
이 난쟁이는 판타지아 대륙의 전쟁 패러다임을 바꾼 붉은색 골렘의 제작자다.
나는 편하게 난쟁이L이라고 부른다.
군신(軍神)이 황금색 골렘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에게 대적하는 조연과 악역이 없었다면 절대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핏빛 난쟁이라고 불렸던 난쟁이L이 바로 그 역할을 했었다.
“음? 하필 나라니? 신성한 인간분께선 나를 아시오?”
“일단은 한 번 봐봐.”
내가 암흑상회에 제시한 설계도면은 ‘골렘D’였다.
그래서 문제다.
내가 기억하는 붉은색 골렘은, 올려다보는 인간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공격성과 강인함이 넘쳐났었기 때문이다.
오른손에는 성문을 파괴할 거대한 망치를 쥐고, 왼손은 상대 골렘과 성벽을 뚫을 드릴로 무장했다.
골렘D처럼 온몸이 흐느적거리게 생기지 않는다.
여자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흐음….”
내게 골렘D 설계도면 한 장을 넘겨받은 난쟁이L이 신중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난쟁이L이 차분한 어조로 결과를 말했다.
“진품이 틀림없소. 설계도 전부를 살펴본 건 아니지만, 이 한 장에는 핵심기술 외에도 골렘 설계자의 철학과 열정이 담겨있소. 무척 분하지만, 그자는 나보다 뛰어난 실력의 골렘 공학자요.”
난쟁이L이 힘없는 얼굴로 항복선언을 했다.
친구가 만든 찰흙 인형이 자기 것보다 더 근사해서 시무룩해 하는 어린애 같았다.
“...그래?”
개똥도 약으로 쓰일 때가 있다더니!
슈퍼로봇도 아닌 이딴 쓰레기 인형 설계도가 호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설계도를 내려놓은 난쟁이L이 이어서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나는 이 골렘의 설계도가 무척 탐나오. 내가 제작 중인 신형 골렘에 꼭 참고하고 싶소. 내 의지와 소망이 협조자에게 잘 전달됐으리라 믿겠소.”
그는 암흑상회 소속 아가씨에게 힘주어 말한 후에 몸을 돌렸다.
“...손님께서 대단한 물건을 제시해주셨네요.”
난쟁이L을 술집 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어여쁜 아가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떻게 할래?”
“진품이 확인된 이상, 저희도 신뢰로 보답하겠습니다. 판타지아 대륙에 흩어져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해드리겠습니다. 최초의 용사부터 그의 동료, 애인, 친구, 원수들까지 전부. 사소한 소문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기록해서 드리겠습니다.”
“훌륭해.”
내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바로 단서를 달았다.
“얼음공주를 처치하실 용사님? 실례인 줄 알지만, 주문하신 정보가 다 모일 때까지 이 마을에 머물러주실 수 있을까요? 전송마법까지 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수집한다면 보름쯤 걸릴 겁니다. 그동안 숙식은 저희가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손님을 붙잡아두지 않지만, 내가 얼음공주를 사냥하러 떠난다는 이야기를 접한 모양이다.
암흑상회로선 꽤 정중히 돌려 말한 셈이다.
얼음공주에게 살해되기 전에 그 설계도를 넘기라고.
“보름이라…. 좋아.”
이번 6회차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마왕 페도나르가 여태 살아있는 게 그 증거!
느긋하게 준비하자.
*
“우웅…. 용사님. 이 시간에 어딜 가세요?”
잠옷 차림의 라누벨이 눈곱 낀 눈을 비비면서 물어왔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귀여운 척하다니? 정말 징글징글하다.
우리는 여태까지 각방을 써왔다.
하지만 설마, 라누벨이 ‘현자의 지팡이’를 인형처럼 꼭 끌어안고 잘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흔들어 깨워야만 했다.
“쉿! 아침까지 닥치고 더 자.”
암흑상회에는 보름 동안 마을에서 얌전히 관광할 것처럼 이야기해뒀지만, 내가 그 말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없었다.
보름.
지나치게 길다.
마왕 페도나르를 15번 죽일 수 있는 시간이다.
▶황당: 예시가 지나치게 잘못된 것 같은데요…?
교생 아가씨. 전혀 잘못되지 않았어.
판타지 세계에서 보름이면, 판타지아 차원보다 시간이 10배 느리게 흐르는 지구에선 36시간쯤 흐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내가 대한민국 문화시민으로 활동할 수 있는 36시간이 그냥 낭비되는 셈.
이딴 게 용납될 리 없잖아?
“저도 같이 갈래요.”
나는 라누벨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답변을 미리 준비해놨다.
“음주모험(飮酒冒險)은 안 돼.”
“에엣?!”
“자, 라누벨. 내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봐.”
“후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라누벨이 시키는 대로 입김을 불면서 또 귀여운 척했다.
그 탓에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칠 뻔했다.
라누벨. 내 인내심에 감사하렴.
“혈중알코올농도가 0.5로 심각한 수준이네. 이 상태로 모험을 떠나면 민폐 끼칠 확률이 99%야.”
“용사님! 라누벨의 정신은 멀쩡해요!”
“술주정뱅이는 자기가 취했다고 순순히 인정하지 않지.”
“그러면 시험해보시던가요.”
오늘따라 라누벨이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나왔다.
나는 손가락 둘을 펴며 물었다.
“라누벨. 내 손가락이 몇 개로 보여?”
“헷! 쉽네요. 둘이요.”
“하나야.”
“에엣?! 오빠- 아니, 용사님! 이건 아무리 봐도 둘인데요?!”
“그만 인정하렴. 네가 취했다는 증거야.”
“아우우….”
라누벨이 뺨을 부풀리며 분한 표정을 짓더니, 얌전히 침대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갔다.
그 뒤,
나는 마을Q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설산M의 꼭대기.
그 정상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제어가 안 되는 힘 때문에 홀로 떨어져서 사는 공주님의 성채(城砦)가 있다.
“어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착각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볼까.”
진짜 불행을 체험시켜주자.
그러면 자기가 여태까지 행복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수업료는 공짜다.
“1회차 동료들만 욕할 게 아니군. 나도 이놈의 오지랖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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