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65화 (65/430)

 065화

[6회차] 행복했던 얼음공주

설산M에는 다양한 경험치들이 숨어 산다.

몬스터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꿈 많은 마법사, 돈 많은 이웃집에 시집간 친언니를 납치하려는 백합 기사, 여자친구에게 차이자마자 왕궁에 불을 지른 로맨티시스트….

사람도 경험치를 준다.

하지만 오늘 목적은 설산M의 정상에 최대한 빨리 올라가서 얼음공주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웬만하면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노닥거릴 틈이 없다.

▶빼꼼: 달려서 올라가실 건가요?

교생 아가씨. 나는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쓰지 않아.

내 1회차 경험은 방대하다.

설산M이나 그 주변 마을에서 정체를 감춘 채 은거한 연놈 중에서 비행수단으로 쓸 수 있는 녀석을 알고 있다.

마을Q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어진 한적한 통나무집.

앞마당에는 꽃밭과 작은 연못이 있고, 뒤뜰에는 과일나무가 몇 그루가 있다.

이 누추한 집에는 비실비실한 요정을 마누라로 삼은 사냥꾼 청년이 살고 있다. 하지만 사냥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족: 드래곤

▷레벨: 505

▷직업: 사냥꾼(야생→사냥↑)

▷스킬: 냉기S 사냥A 내성A 근력A 몰살B…

▷상태: 의태, 수면

태생이 게으른 용(龍)인 탓이다.

하지만 이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만약, 모든 용이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부지런하게 패도를 걸었다면 판타지아 대륙은 진즉 멸망했을 것이다.

인간으로 변신한 용이랑 동침 중인 요정도 마찬가지다.

만약, 요정의 평균 가슴이 사하라사막이 아닌 로키산맥이었다면, 판타지아 대륙의 주축은 인간이 아닌 요정이 됐을 것이다.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기본수명 5000년과 안티에이징이 패시브인 요정들은 거의 죽을 때까지 몽정과 월경을 달고 산다. 그런데 애까지 쑥쑥 낳는다고 상상해보라.

번식력에서 인간이 상대가 안 된다.

“흠…. 이건 가슴만의 문제는 아닌가?”

지난 11년 동안, 나는 이 요정 여성처럼 다른 종족이랑 살림 차린 경우를 굉장히 많이 보았다.

긴 젊음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신체적 불리함에도 굴하지 않고, 결혼과 출산 등에 상당히 적극적인 편이다.

즉, 이건 비실비실한 요정 남성 쪽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조루이거나, 고자이거나.

뭐든 간에 정상적인 종족은 아니다.

“헉! 누구냐- 꾸엑?!”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찬바람을 느낀 용이 깨어났다. 그리고 내 손도 움직였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틈도 주지 않고 목을 붙잡았다.

“주인님?!”

한 박자 늦게 깨어난 요정이 깜찍한 비명을 질렀다.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다.

마누라를 노예처럼 부리는 변태 용(龍).

공격해도 전혀 문제없다.

“도마뱀. 얼른 원모습으로 변신해라.”

“이, 인간이여!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켁켁?!”

“내가 나쁜 말로 할 때 듣는 편이 마누라의 신상에도 좋을 거야.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좋다.”

내게 모가지가 붙들린 채 통나무집 밖으로 질질 끌려 나온 용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파아앗-!

작은 인간에서 거대한 날도마뱀 형태로.

추운 고산지대에서 살 수 있도록 가죽이 두툼한 편이고, 비늘은 주변 환경에 녹아들기 좋은 백색 계통이었다. 날개 또한 폭설과 눈보라에 저항하기 좋도록 짧은 대신 3쌍이나 달렸다.

하지만 놈의 덩치는 크지 않았다.

친애하는 동료인 망룡왕 뇌비우스랑 비교하면, 티라노사우루스 앞에 엎드린 이구아나 수준으로 매우 작았다.

“용이다!”

“헉! 용이 나타났다!”

“저 백룡(白龍)은 설마…!”

“얼른 용사들을 깨워!”

그래도 용은 용이란 걸까?

마을Q 인근에 갑작스럽게 출현한 조그마한 용을 본 마을주민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그들 심정이 조금은 이해됐다.

용은 판타지아 세계관에서 최강의 생명체로 통하기 때문이다.

고작 505레벨일지라도.

종족이 용이면, 레벨 계산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스킬 구성과 등급에 따라서 오차범위가 꽤 크긴 하지만, 능력치 레벨에 곱하기 3을 해주면 인간 레벨이 나온다.

즉, 용사든 영웅이든 혼자서 505레벨 용을 쓰러트리고 싶으면, 1515레벨을 찍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생 아가씨. 참 쉽지?

▶제안: 강한수 생도님. 믿음직한 동료들이랑 협공하면 공략이 더욱 쉬워져요.

그 새끼들은 도움은커녕 방해만 된다.

용(龍)은 개체 수가 적기 때문에 아무튼 보호해야 한다고 지껄이는 몽상가들이다.

여기서 더 웃긴 건?

자기들 기분 내킬 때는 여자 1명을 구하려고 용 1마리를 사냥하는 파격적인 등가교환의 법칙을 따른다.

행동과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

“Quuuuuuu…!”

백룡이 아가리를 쫙 벌리며 포효를 터트렸다. 그리고 주둥이 안쪽에 냉기(冷氣)를 머금는다.

용의 숨결,

쏘아지면 이 일대는 꽁꽁 얼어붙으리라.

순수한 위력만 따지면, 얼음공주의 폭주보다 이쪽이 위력이나 범위나 훨씬 윗줄.

그러나 용의 숨결이 터지기 직전, 내 웃음보가 먼저 터졌다.

“하핫! 그 레퍼토리는 1회차랑 다를 게 없네.”

순순히 하늘로 도망치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백룡이었다면 아가리 벌리고 조준할 시간에 제공권부터 확보했을 것이다.

이미 나는 놈의 면상 앞에 있었다.

빠각!

Z급 축복이 깃든 Z급 신성한 주먹이 용의 턱주가리에 박혔다.

용의 종족 보정 따위 간단히 씹어버렸다.

“Quuu-?!”

푸확!

입안에 머금은 냉기의 숨결은 토해지지 못하고 내부에서 폭발!

추하게 파란색 혀를 빼문 백룡의 푸른색 눈동자가 뒤집혔다.

일시적인 기절과 뇌진탕.

하지만 내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C

길들이기 좋은 수준까지 용의 기억을 지웠다.

인간 형태의 놈을 제압했을 때도 망각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까지 까먹으면 안 되기에 기다려줬다.

그리고 지금은?

“내 눈을 바라봐.”

“Quuu…!”

팔락! 쿵! 콰직!

백룡이 날개와 꼬리 등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내게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기에 그 저항과 반발은 금방 잦아들었다.

“대갈통 숙여.”

“...Quuu.”

나에 대한 공포와 본능만 남은 백룡은 순순히 내 지시에 따랐다.

조련F→조련B

사육F→사육D

교감F→교감E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다.

경험치 500%의 용사다운 성장세였다.

일반직업 기준으로는 용 5마리를 길들인 거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 성장은 역으로 모자란 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오를 게 자명한 사실.

“이것도 업적으로 쳐주려나?”

“마, 맙소사….”

허겁지겁 란제리와 담요만 몸에 걸친 채 통나무집에서 뛰쳐나온 요정이 보였다. 백룡의 머리 위에 앉은 나를 괴물처럼 쳐다본다.

무척 귀찮지만….

“이봐, 요정.”

“뭐든 할 테니 살려주세요!”

요정은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암흑상회에 소리소문없이 납치되어 경매장 상품으로 올라갈 터.

뒷수습은 내 전문이다.

“마을에서 가장 큰 술집에 가면 라누벨이란 이름의 누추하게 생긴 여자애가 있을 거야. 지금 같은 노예가 아닌, 현자의 탑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줄게.”

“저는 강제로 그분의 노예가 된 게 아니에요!”

요정이 답답한 소리를 했다.

“정상적인 아내도 아니지.”

“그, 그건….”

“본인이 마법으로 세뇌당한 적이 없다는 확신은? 노예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에 아무런 위화감도 없어? 가족과 부모는 그런 너에게 뭐라고 하지? 그들이랑 마지막으로 만난 날짜는?”

내가 해봐서 안다.

성녀H는 순도 100% 세뇌이기 때문이다.

“아….”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인생을 살도록. 가자, 백구야.”

“Quuuuu-!”

펄럭!

자기 요정 마누라를 한 차례 갸우뚱 쳐다본 백룡이 3쌍의 날개를 활짝 펼친 후, 기세 좋게 날아올랐다.

나중에 시간 되면 색깔별로 수집해봐야겠다.

황구, 청구, 흑구, 은구, 녹구….

*

설산M의 정상.

그곳에는 꽁꽁 얼어붙은 모험가들이 만년설에 덮여있다.

상대가 아름다운 공주님이라고 해서, 혈기왕성한 남정네들만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찬찬히 이 ‘얼음 무덤’을 둘러보면 여자가 훨씬 많다.

얼어붙은 여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첫째, 하렘 파티를 짠 남자를 쫓아온 여자들.

얼음공주를 노리는 건 하렘의 주축인 남자지만, 이 파티가 전멸하면 사망자는 남자 1명과 여자 다수가 된다.

색골의 엄한 남자를 따라와서 얼어 죽은 셈이다.

둘째, 얼음공주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여자들.

북대륙을 대표하는 남성이 현자라면, 여성은 얼음공주다. 그래서 북대륙 여자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얼음공주랑 비교된다.

재능, 외모, 혈통, 인지도….

그래서 얼음공주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여성이 매우 많다.

...현자?

마음만 먹으면 국가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대마법사다. 그렇기에 현자에게 시비 거는 멍청이는 없다.

게다가 한결같이 여자를 멀리하는 탓에, 시기하긴커녕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를 존경하는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자는 북대륙 최고의 인기스타!

정작 당사자는 과다출혈로 죽기 싫어서 관리하는 거지만, 남들이 멋대로 착각해줘서 존경받는 위인 반열에 올랐다.

▶초롱: 강한수 생도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교생 아가씨. 이건 기본이야.

나는 판타지 야만인들이랑 질적으로 다르다.

아름다운 녹색별 지구의 정보통신사회에서 살아왔기에 정보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폭력이 지배하는 낯선 세계에 납치된 지구인이라면 누구든, 나랑 같은 판단을 내릴 터.

뭐든지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판타지 원주민들의 텃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정보수집부터 철저하게 했을 것이다.

나만 했을 리 없다.

▶움찔: 그, 그렇죠. 호호!

나와 백구가 설산M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는 치열한 신경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죽기 싫으면 떠나세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으리으리한 성채 위.

최고급 핫팩으로 안성맞춤인 몸매의 미녀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순백의 웨딩드레스 같은 아름다운 복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눈보라 치는 이 끔찍한 날씨에 입으니, 예쁘다기보다는 미친년이란 감상이 앞섰다.

저 미친년이 바로 얼음공주다.

▷종족: 휴먼

▷레벨: 486

▷직업: 공주(국력=매력↑)

▷스킬: 광기S 냉기S 마성A 생존A 살인B…

▷상태: 폭주, 슬픔

능력치는 1회차 때랑 변함없이 화려했다.

S급 광기와 냉기의 콤비도 환상적이고, 찾아오는 모험가를 죽이면서 올린 경험치 또한 준수한 편이다.

얼음공주의 경고를 들은 성벽 아래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고귀한 얼음공주여! 내 아이를 낳아주오! 오우거 학살자인 나와 북대륙 최고의 미녀인 그대가 결합한다면, 분명히 용도 잡을 수 있는 굉장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오!”

예쁜 아가씨들을 줄줄이 달고 온 미남이 이상한 주장을 펼치며, 얼음공주에게 프러포즈했다.

진화론? 창조론? 유전법칙? 자연주의?

저 교집합은 무슨 근거로 나온 자신감일까.

“용이라…. 백구야?”

“Quuuuuu-!”

눈보라 속에서 백룡이 포효를 터트렸다. 그리고 지상의 보잘것없는 연놈들이 경악할 틈도 없이 냉기의 숨결로 덮어버렸다.

휘이이잉~!

쩌저적-!

한 방에 하렘 파티가 전멸했다.

용의 숨결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남자는 물론이고, 이 추운 날씨에 짧은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까지도 예쁘게 얼어붙었다.

백룡은 모험가들에게 최후의 발버둥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성벽 위에 착지해.”

“Quuu.”

쿠웅-

백구가 눈 덮인 망루 위에 날카로운 발톱을 찍으면서 착지했다.

나는 얼음공주 옆으로 뛰어내렸다.

“어떻게 용을…. 어멋?! 잠시만요! 가까이 다가오면 폭주하는 냉기가…!”

넋을 놓고 백구를 올려다보던 얼음공주가 경고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슈우우우-!

그녀의 몸에서 줄기차게 뿜어져 나온 냉기가 현자의 지팡이 끝에 달린 황금색 구슬로 흡수된 까닭이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내 체감상으로는 영하 50도에서 영하 10도로 온도가 상승한 수준쯤 됐다.

동정A의 말이 맞았다.

얼음공주의 힘은 현자의 지팡이로 제어된다.

“그, 그 지팡이는 설마…?”

이 흡수현상에 놀란 얼음공주의 하늘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지팡이의 정체를 아는 눈치.

당연했다.

그녀도 일국의 공주이기 전에 우수한 마법사.

북대륙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마법사 중에서 현자를 모르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자가 애인처럼 늘 끼고 다니는 지팡이도 포함해서.

“그 지팡이만 있으면 폭주하는 저의 힘을 제어- 꺄악?!”

“어딜!”

내 손에 쥐어진 현자의 지팡이 쪽으로 건방지게 손을 뻗는 얼음공주의 머리통을 힘껏 후려쳐줬다.

평범한 무기나 마법이었다면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꽁꽁 얼어붙었겠지만, 현자의 지팡이는 아니었다.

슈우우우-

진공청소기처럼 얼음공주의 냉기를 빨아들였다.

몽둥이로 아주 쓸만했다.

“하으으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착각하는 공주님. 지금부터 힘의 제어에 실패할 때마다 피똥 쌀 만큼 처맞을 거야. 아! 죽어도 걱정하지 마. 40번은 부활시킬 수 있어. 다른 질문?”

진정한 불행이 뭔지 가르쳐주겠다.

검왕 알렉스가 보증한다.

6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