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66화 (66/430)

 066화

[6회차] 이 용사님 경력이 벌써...

▶의문: 인생은 짧지만, 불행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는 격언이 있는데요. 그런데 어째서 제가 그걸 실감하는 걸까요?

교생 아가씨가 철학적인 질문을 하네.

얼음공주 교육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녀는 내가 목표로 했던 하루도 안 지나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벽한 성장을 이뤄냈다.

그동안 가슴과 엉덩이에 지방이 덕지덕지 쌓일 만큼 얼마나 행복하고 나태한 삶을 살아왔는지 바로 깨달았다.

이젠 마무리 점검단계다.

“공주님. 정말로 혼자 살았다고 생각해?”

“이, 이젠 아니요.”

옷이 넝마가 된 얼음공주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맞아. 풀 한 포기 안 자라는 만년설 속에서 공주님이 생활할 수 있었던 건, 누군가의 보조와 사랑이 있었던 덕분이지.”

탑이나 감옥에 갇힌 아름다운 공주님.

...정말로 아름다울까?

사람이 단 며칠만 관리 안 해줘도 얼마나 거지 같은 몰골이 되는지는 굳이 상상해볼 필요도 없다.

외모관리는커녕 목욕조차 못 한다.

목욕은 질병을 예방하고, 죽은 피부와 기름때 등을 벗겨내며, 혈관을 확장해서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해준다.

이때 피부의 독소가 빠짐으로써, 미녀의 필수조건인 뽀얀 피부가 완성되는 것이다.

즉, 청결과 미녀는 정비례.

이걸 탑이나 감옥에 갇힌 채로는 절대 못 한다. 동화 속의 ‘탑에 갇힌 아름다운 공주님’은 현실성이 없다는 뜻이다.

“공주님이 그간 지원받은 생활용품들을 떠올려봐.”

하다못해, 싼 후의 엉덩이 닦을 휴지까지도 전부 설산M 아래에서 지원받은 물자다.

피가 부동액이다시피 한 얼음공주는 온종일 벌거벗고 있어도 얼어 죽진 않겠지만, 그녀가 매일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는 것도 전부 누군가의 원조 덕분이다.

먹는 것들도 마찬가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영양소 개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는 무식한 판타지 세상에서도, 골고루 먹는 식습관의 중요성은 안다.

얼음공주의 몸매는?

편식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굴곡을 자랑했다.

그녀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차가운 방에 쌓인 편지들 또한 그 증거.

편지를 보낸 이들은 꿈과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 얼음공주의 폭주가 끝날 거라고.

“용사님 덕분에 제어할 수 있게 됐어요.”

제어해내기까지 10번쯤 죽은 듯하다.

못 하는 게 이상한 거다.

▷종족: 휴먼

▷레벨: 286

▷직업: 공주(국력=매력↑)

▷스킬: 광기S 냉기S 생존S 마성A 내성A…

▷상태: 안정, 복종

내 마기를 주입해서 악마숭배자로 만들었다면 훨씬 쉬웠겠지만, 나는 동정A처럼 ‘순도 100% 얼음공주’를 원했다. 치트키는 공략으로 쳐주지 않으니까.

마기에 오염된 얼음공주는 필요 없다.

그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

얼음공주는 현자의 지팡이 없이도 힘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훈련 과정에서 그녀를 10번 넘게 부활시킨 ‘성녀’는 치트키가 아닌 합법이기에 문제없다.

▶난감: 동료를 때려죽이는 건….

교생 아가씨. 이건 교육이었다구?

검왕 알렉스가 보증한다.

“공주님. 오늘 안에 설산 아래의 마을로 내려갈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빡빡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 일단 나를 따라서 마을에서 며칠 보낸 후, 이곳으로 돌아오든 고향에 가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해.”

얼음공주에게 용무는 끝났다.

현자의 지팡이에 의존했던 동정A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이젠 얼음공주랑 마을Q로 가서 “강한수 용사님이 사악한 얼음공주를 복종시켰다!”라고 소문만 내면 평판 작업이 완료된다.

“예? 저를 계속 데려가시는 게….”

“내가 왜?”

동료를 늘려봐야 민폐만 끼칠 뿐이다.

지금도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는데 전혀 문제없고, 이미 현자가 동료로 가입된 상태. 여기서 더 군식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얼음공주의 가치는 딱 평판용이다.

북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악녀(惡女)를 복종시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홍보가 될 것이다.

그 뒤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얼음공주는 성채 중앙에 고여있는 온천수로 몸을 씻었다.

혼자 살아온 삶의 지혜란 걸까?

목욕시설이 꽤 잘 갖추어져 있었다. 어째서 그녀 혼자 사는 곳에 탈의실과 남탕이 구분되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떠날 채비를 마친 얼음공주는 거의 맨몸이었다.

보석과 금화가 든 주머니가 끝.

슬쩍 물어보니….

“마을에서 새로 구할 생각이에요.”

살던 곳에 미련 없다는 어조로 대답하는 얼음공주. 추억이 분명 담겼을 물건이 있을 텐데, 전부 버렸다.

쌓인 편지들도 달달 외웠기에 필요 없다고….

과거랑 결별하기 위해서라도, 생필품과 식량은 현지에서 조달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나로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면 빠르게 가볼까나.”

“Quuuu!”

말 잘 듣는 백구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3쌍의 날개를 파닥거렸다.

어이구, 귀여운 녀석.

그때, 무언가 내 애완동물을 덮쳤다.

“Yaooooong-!”

“Quu?!”

덥석!

눈 속에서 솟구친 거대한 아가리가 백구를 삼켰다.

막 태어난 새끼 용도 아니고, 성욕에 눈을 떠서 요정 마누라도 소유할 정도로 큰 성체 용이 한입에 사라졌다.

“나의 첫 애완용이….”

초등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를 놀이터에 잠시 놔뒀는데, 갑자기 달려온 들고양이가 냅다 물어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트라우마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하필이면 이번에도 고양이다.

...고양이 맞나?

▷종족: 아이스 타이탄

▷레벨: 999+

▷직업: 설왕(추위→가호↑)

▷스킬: 냉기SSS 광기SS 가호SS 수면SS 악령SS…

▷상태: 황혼, 격정, 분노

그것은 머리가 고양이처럼 생긴 거인(巨人)이었다.

내가 일전에 쓰러트린 ‘메기 거인’이랑 같은 계보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능력치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위.

어째서 갑자기 튀어나온 걸까?

해답은 고양이 거인의 황금색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얼음공주를 바라보고 있다.

“공주님. 무슨 관계?”

“...제 꿈에 가끔 나오던 흰색 고양이에요. 하지만 그때는 덩치가 이렇게 크지도, 이족보행도 아니었어요.”

“과연….”

내 용사 경력이 11년차다.

대충 정황만 보고도 소설을 쓸 수 있다.

상태가 황혼과 분노.

이 고양이 거인은 중앙대륙의 어느 구릉에서 숙면 중인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늙어 죽기 직전이다.

또한, 내가 얼음공주를 데리고 설산M을 떠나려 하는 순간, 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상황은, 고양이 거인이 자연사하기 전에 얼음공주를 건드리면 발생하는 이벤트나 함정으로 짐작된다.

스킬의 냉기와 광기.

얼음공주랑 스킬 구성이 같았다. 등급은 고양이 거인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지만, 우연의 일치일 리 없다.

애초에 얼음공주는 자기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 능력치로 스킬 보정을 받는 판타지 세계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스킬 숙련도가 오르면서 저절로 제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음공주는 그게 안 됐다.

스킬 등급에 맞춰서 폭주도 심해진 탓이다.

원인은?

“네가 배후였군.”

아마, 황혼기에 접어든 고양이 거인은 치매에 걸렸다. 그래서 동족도 아닌 엄한 인간 여자애에게 자기 힘을 주입했다.

그리고 설산M으로 유인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고귀한 신분인 얼음공주가 죄인처럼 설산M에서 쭉 생활할 필요는 없었다.

순전히 주변 사람이 다치는 게 싫었다면, 은둔한 장소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국왕 사유지가 대표적인 예.

땅이 없는 일반인도 아니고, 부유한 왕족인 그녀가 보급이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 ‘사냥감’처럼 지낼 이유는 없었다.

비합리적인 판단의 극치.

이게 누군가의 간섭에 의한 거라면?

“Yaooong….”

고양이 거인이 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분노의 원인이 나 때문임이 틀림없는 듯했다. 애초부터 타협과 화해의 여지는 없었지만.

“이봐, 고양이. 내 백구를 먹은 대가는 비싸다구?”

스르릉-

나는 성검2를 소환했다.

얼음공주가 우리의 전투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지만, 고양이 거인도 그녀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을 터.

손녀처럼 여길 게 틀림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치졸한 인질극은 고려하지 않았다.

얼음공주가 인사불성으로 피똥 쌀 때도, 피투성이로 10번 넘게 죽을 때도 꿈쩍하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살았든 죽었든 자기 곁에만 있으면 그만이란 주의다. 어쩌면 노안으로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했을지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Yaoooong-!”

휘익-!

눈보라 속에 가려져 있던 고양이 손이 휘둘러진다. 손톱 하나가 내 몸보다도 컸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고 맞섰다.

“경험치가 되어라!”

푸홧-

축복으로 떡칠한 신성과 마기. 그리고 이 둘을 섞은 혼돈의 회오리를 성검2에 감았다.

블랙박스 효과로, 상극인 두 힘이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충돌은커녕 흑백의 조화를 이루며 더욱 강렬한 힘으로 승화됐다.

혼돈E→혼돈A

조화F→조화C

검기E→검기D

스킬 등급 상승은 기본 보너스.

기존의 스킬을 전부 제물로 갈았음에도 아깝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행운이나 창고처럼 정말 특수한 스킬을 제외한 대부분은 내 몸과 영혼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들을 되새김하면 숙련도는 금방 오른다.

내게 스킬은 보조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지적: 그러면 평소에 좀 올려두시지 그러셨어요. 준비된 자는 전투에서 절반은 이기고 들어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교생 아가씨.

내가 준비하면 대륙은 벌써 초토화됐어.

성스럽게 손가락만 튕겨도 도시의 모든 시민이 몰살이다.

사방에 경험치가 넘쳐나는데, 곤히 보내주고 있다. 땅에 떨어진 지폐뭉치를 외면하는 심정이다.

▶타협: 지금처럼 느긋하게 준비하고 인생을 즐겨주세요!

교생 아가씨는 역시 말귀가 통한다.

만약, 도덕 선생이었다면….

▷충고: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습니다. 발언할 때는 언제나 신중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강한수 학생.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했습니다. 방심하면 당신도 당할 수 있어요.

오! 도덕 선생님. 또 불쑥 찾아오셨네요.

그런데 방심이 뭐죠? 먹는 건가요?

방심.

나랑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고양이 거인이 벌써 빌빌거리고 있지만, 불필요한 대화로 놈에게 반격이나 휴식할 틈을 주진 않았다.

나는 고양의 거인의 숨통을 끊기 위한 최적의 공격만 하고 있다. 방심 따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방심할 만큼 약한 상대도 아니다.

쿠구구구!

눈사태와 산사태가 여기저기서 벌어졌지만, 그딴 걸 고려하며 싸우기엔 고양이 거인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스킬 등급은 나보다 낮았지만, 레벨이 깡패였다. 게다가 직업에서 내가 너무 열세였다.

설왕(雪王).

이 혹한의 날씨가 설왕을 도왔다.

물에서 가호를 받는 수왕(水王) 메기랑 달리, 이 고양이 거인은 자기 영역 밖으로 나와서 약해지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용사는 역시 쓰레기야.”

빠른 성장은 좋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경험치 5배는 전혀 도움이 안 됐다.

그래도 내 승리란 건 변함없었다.

순수한 힘으로 압도해줬다.

푸확-

성검2가 고양이 거인의 두꺼운 목을 벴다.

▷웃음: 저는 충고했습니다.

도덕 선생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떠났다. 올 때처럼 갈 때도 참 제멋대로다.

“웃기시네. 내 판타지 경력이 11년이야.”

방심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푹! 푹! 푹!

나는 성검2로 고양이 거인을 계속 찔렀다.

“Yaooo~?!”

예상대로 놈은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았다.

나는 경험치가 바로 안 들어온 시점에 눈치챘다. 어떤 식으로든 패자부활전이 진행될 거라고.

물론, 순순히 부활하게 기다려줄 마음은 없었다.

뭉글뭉글.

잘린 목 부분에 눈덩이가 뭉치면서 새로운 머리통을 형성했다.

그리고,

서걱-

나는 새 머리통을 바로 또 베어줬다.

악당들의 전형적인 실수.

기껏 준비한 함정카드를 자기 입으로 까발린다.

도덕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양이 목숨은 7개란 말이 있지. 아니, 9개였나? 아무튼, 계속 죽이다 보면 언젠가 죽겠지.”

“Yaooo-!”

그리고 마침내 단말마를 내지르며 고양이 거인이 죽었다.

이번에야말로 경험치가 들어왔으니 확실했다.

한데,

“어라…?”

내 몸이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저적-

수왕 거인을 죽이자마자 전국적으로 폭우(暴雨)가 내렸었다. 그렇기에 설왕 거인을 죽이면 폭설(暴雪)이 열흘간 내리리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방심왕(放心王)이라니…! 이런 거지 같은-”

필름이 끊겼다.

*

꿈틀-

내가 얼음 속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렇게 정신이 돌아온 이상 문제 될 게 없었다.

돌이켜보면, 고양이는 목숨만 많은 게 아니었다.

‘고양이를 죽이면 저주받는다더니….’

다시 생각해봐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쩌적- 쩍!

고양이 거인이 죽으면서 펼친 저주의 위력은 분명 강력했지만, 죽어버린 존재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진다.

반면에 내 힘은 끊임없이 유지된다.

남은 건 시간문제.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챙그랑!

내 몸을 감싼 얼음이 파괴됐다.

“빌어먹을 고양이.”

방심이고 뭐고 이건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금방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내가 약했다면 만년설처럼 영원히 갇혔을지도….

“어머!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왕자님.”

등 뒤에서 얼음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테니스 동호회 명예회장일 뿐인 내가 어째서 왕자로 둔갑했는지 의문이지만, 일단은 마을Q로 돌아가는 게 중요했다.

암흑상회에서 나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

탈것 없이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공주님. 빨리 내려가자.”

“지, 지금 바로요? 잠시만 준비할 시간을….”

“준비를 왜 또-”

따지려고 고개를 돌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가련한 척하는 공주님은 사라지고, 슈퍼마켓 할인행사와 쿠폰을 절대 놓치지 않는 알뜰한 아줌마가 있었다.

복장도 아줌마처럼 수수해졌다.

▶비난: 처녀에게 아줌마라니요….

하지만 교생 아가씨. 보라고.

이젠 어여쁜 공주님이라고 우대해주기엔 나이를 너무 먹었- 음? 잠시만.

“내가 얼마 동안 얼어있었지?”

“6년이요.”

“......”

잠자는 산속의 왕자님 강한수.

6년 만에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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