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6회차] 꿈은★이루어진다
나는 마왕의 페널티를 안 이후부터 레벨을 조절해왔다.
레벨은 적당히 높여서 500레벨쯤 맞추면, 이 뒤로는 판타지 대륙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5대 재앙에 버금가는 숨겨진 보스 몬스터가 존재했다.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황혼기에 접어든 탓에, 빨리 찾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그래서 1회차에선 찾을 수 없었던 고양이 거인.
제대로 한 방 먹었다.
특히, 죽으면서 쓴 저주가 대박이었다.
▶빼꼼: 잘 주무셨나요?
교생 아가씨. 알면 좀 깨우지 그랬어.
▶투덜: 제가 몇 번 시도했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 걸요. 영영 못 깨어나시는 줄 알았어요.
...그렇다고 한다.
내 방심이 부른 결과이기에 나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도 여기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이딴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초월적인 존재의 횡포에 의해 과거로 시간을 뛰어넘더니, 이젠 미래로 시간을 뛰어넘어버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6년씩이나!
지구의 시간으로 따지면 얼추 7개월이란 시간이 후딱 흘러가 버린 셈이다. 내 문화시민으로서 삶과 부모님께 효도할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어 버렸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용사 페스티벌 당시에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남들은 평균 4년이면 마왕을 쓰러트리고 졸업하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17년이라니···.”
이대로 어영부영 보내면 18년이 될 것이다.
내가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간보다 판타지 세계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길어지게 생겼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왕자님.”
“그냥 용사라고 불러. 갑자기 웬 왕자 타령이야.”
내 핀잔에 얼음공주가 차분히 대답했다.
“그게···. 듣고 놀라지 마세요.”
“제발 놀라게 해봐.”
체감상으로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6년이 흘렀단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산 아래의 지상에선 지금 전쟁으로 난리가 났어요. 강력한 골렘을 앞세운 왕국들이 일제히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판타지아 전 대륙이 황폐해진 상태에요.”
“...전 대륙?”
“네. 시발점인 북대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남대륙 빼고는 전부 전쟁 중이에요. 아! 그래도 북대륙은 조용한 편이에요. 현자님과 여신님이 연전연승하면서 주변국들이 몸을 사리는 중이거든요.”
...내가 알던 역사에서 많이 틀어져 있었다.
“여신은 또 누구야?”
“현자님의 전용골렘이에요. 다른 골렘이랑 달리 크기는 사람 수준인데,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해요. 듣기로는 고대의 용사님이 깃든 에고골렘(Ego-Golem)이라는 모양이에요.”
“허···.”
1회차 경험을 통해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시나리오였기에 놀라진 않았다. 단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뿐.
나는 얼음공주의 능력치를 힐끔 살펴봤다.
▷종족: 아이스 휴먼
▷레벨: 573
▷직업: 설왕(추위→가호↑)
▷스킬: 냉기SS 광기SS 마성SS 가호S 내성S···
▷상태: 환희
6년 동안 놀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스킬이 무시무시했다. 용사도 아닌데 성장이 너무 빠른 게 아닐까?
내 시선을 눈치챈 얼음공주가 수줍게 말했다.
“그 흰색 고양이의 힘 일부가 저에게 옮겨왔어요.”
이젠 얼음공주라고 부르기 힘들어졌다.
종족이 바뀌고 직업도 설왕.
레벨도 인간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스킬에 비해선 낮은 편이니, 설산M을 돌아다니면서 사냥 좀 열심히 하면 999레벨까지 무난하게 달성할 것이다.
내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성Z 축복Z 마기SSS 날조SS 냉기SS···
▷상태: 해동, 성검, 성녀
종족과 직업에는 변동이 없었지만, 스킬에 냉기SS가 추가됐다. 이것 외에도 다양한 스킬이 골고루 생성되거나 성장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무려 6년이었으니까.
그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면 훨씬 화려한 능력치가 됐을 터. 시간적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무튼,
“우선은 산부터 내려가자. 따라와.”
시험지 꼬락서니가 영 아니다 싶으면 바로 마왕 페도나르를 잡으러 가면 된다. 중앙대륙으로 넘어가는 것도 일이긴 하지만, 망한 시험지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평온-
“왕자님. 그러면 이걸 타고 가요.”
“또 맞을래? 이거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아냐?”
“죄, 죄송해요. 흠흠. 그러면 소개할게요! 제 전용골렘 글라시오라에요! 얼음의 주인이 명한다! 깨어나라! 글라시오라!”
쿠구구구!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거인이 일어섰다.
그 강렬한 퍼포먼스에 내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오오! 그런데···.”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골렘의 거대한 크기를 보고 한순간 기대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아줌마가 될 때까지 산속에 틀어박혀 있던 얼음공주에게 골렘을 선물해줄 오지랖의 소유자들을 떠올리면 간단한 문제다.
현자, 잡것.
이 둘밖에 없다.
“멋지지 않나요? 아무도 모르던 불치병을 왕자님 덕분에 치료한 현자님께서 감사의 뜻으로 특별제작해주신 거예요.”
“감사를 왜 공주님에게 해?”
“그, 글쎄요. 호호!”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뭐, 아무튼.”
얼음공주의 전용골렘 골렘G.
그것은 내가 꿈꿔온 슈퍼로봇이랑 한참 거리가 멀었다.
현대지구인 관점에서는 좀 통통한 몸매인 비너스상을 닮았다. 저기서 박진감과 강인함을 찾긴 무리였다.
그리고 갑옷 하나 안 걸친 알몸. 피부 자체가 단단한 금속이니 불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외견은 중요한 법이다.
골렘G의 오른손에 쥐어진 창이 아니었다면 전투용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자님. 얼른 타세요.”
“...그래.”
나는 얼음공주를 따라서 골렘의 왼손바닥 위에 올라탔다.
“가자! 글라시오라!”
뿌득, 뿌득, 뿌득.
골렘G는 덩치와 무게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사푼사푼 밟으면서 설산M을 뛰어 내려갔다.
“KuKu?!”
“OwOwuuu?!”
“Trooog?!”
뿌직! 콰직! 뚜둑!
가는 길에 마주친 몬스터는 무시하듯 밟고 지나갔다. 설산M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레벨이 높고 흉포하기로 악명 높지만, 이 골렘 앞에서는 산토끼나 다를 게 없었다.
이것이 차세대 골렘.
전투력은 이미 기존의 판타지 규격을 한참 넘어섰다. 200레벨 이하는 단순한 잔챙이로 전락해버렸다. 그랬기에 전쟁의 패러다임까지 바뀐 거겠지만.
그렇게 산 중턱쯤 내려왔을까.
은근슬쩍 내 팔을 껴안은 얼음공주가 속삭이듯 경고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해요. 제 골렘은 출력이 높은 산악전용이라서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골렘은 힘들거든요. 그래서 적들은 이 아래쪽에서 제가 내려올 때까지 잠복해요. 탐지 무효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긴···. 저기, 왕자님? 듣고 계세요?”
“어, 그래.”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다.
슈퍼로봇이 없는 판타지 따위 관심 없다.
그때,
푸홧! 푸홧! 푸홧!
눈 덮인 언덕이 무너져내리더니 골렘 3기가 튀어나왔다.
“붉은색 골렘···.”
도색만 보고도 암흑상회에서 절찬리에 판매한 골렘임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던 외형이랑 사뭇 달랐다.
근육질 골격은 어디로?
그 소리만 들어도 가슴 뛰게 했던 왼손 드릴도 보이지 않았다.
골렘G만큼은 아니지만, 이쪽도 외견이 시원찮았다.
“적대국 골렘이에요!”
얼음공주가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능이 어쩌고, 이름이 어쩌고, 약점이 어쩌고···.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붉은색 골렘의 비실비실한 몸 밖에 안 보였다.
“암흑상회, 너마저···.”
무엇이 미래를 이따위로 만든 걸까?
그 원흉을 곰곰이 따져보던 나는 금방 깨달았다.
나구나!
내가 원흉이었네!
골렘D의 설계도 첫 장을 암흑상회 수석공학자에게 보여줬었다. 그때 난쟁이가 쓸데없는 영감을 받은 게 틀림없다.
성능은 내가 알던 1회차 붉은색 골렘보다 약간 더 우수했지만, 상대하는 이쪽은 그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쾅! 쿵!
얼음공주의 하얀색 골렘이 휘두른 창에, 붉은색 골렘 3기가 맥없이 파괴됐다.
“살려- 으악!”
“컥!”
“지원요청을- 꺅?!”
근처에 숨어서 붉은색 골렘을 조종하던 마법사 셋도 처리.
얼음공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왕자님. 계속 갈게요. 적들이 지금보다 더 몰려들 거예요. 통신으로 이미 왕자님께서 깨어나신 게 알려졌을 테니까요. 그들은 왕자님이 현자의 탑으로 가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고 악착같이 덤벼들 거예요. 왕자님께서 재촉하지 않으셨다면 현자의 탑에 호위병력을 요청했을 텐데···.”
“아까부터 왜 계속 왕자 타령인데?”
이미 내 마음속의 결정은 끝난 상태였다.
6회차는 내가 겨울잠에 빠지면서 완전히 망해버렸다. 빠르게 7회차로 넘어가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 이롭다.
얼음공주가 대답했다.
“현재, 판타지아 대륙은 암흑상회의 골렘이 석권하고 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골렘 주재료를 독점해온 그들이 전쟁을 판도를 쥔 이후부터는 대항할 방도가 없어졌어요.”
처음에는 암흑상회에서 골렘을 저렴하게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은 회사와 공장들이 싹 문을 닫고, 전쟁터에서 골렘이 진가를 발휘하고부터 달라졌다.
암흑상회는 골렘 가격을 올렸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국가에는 골렘 공급을 끊어버렸다. 그러면 얼마 안 가서 타국의 골렘에 처참히 짓밟히며 멸망했다.
이런 악순환.
하나둘 빚에 허덕이기 시작한 국가들은 암흑상회에 많은 걸 양보하기 시작했다.
광산, 토지, 권리, 항구, 도로, 상권···.
백성을 노예처럼 팔기 시작했고, 실제로 어떤 국가의 왕은 아름다운 딸을 암흑상회의 간부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들은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북대륙의 맹주였던 마법왕국은 이미 멸망한 거나 다름없는 상태예요. 아름다운 공주를 암흑상회에 팔았다는 나라가 바로 여기니까요. 이날을 기점으로 현자의 탑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반격을 시작해요.”
현자의 탑에서 생산한 푸른색 골렘은 강력했다.
하지만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런데 왜 왕자야?”
“그래야 뭔가 있어 보이잖아요. 어느 고귀한 혈통의 아들. 그리고 선택받은 용사. 고귀한 왕은 실종됐다는 설정이라서, 왕자님이 실질적인 왕이나 다름없으세요. 현자의 탑에 도착하시면 전용골렘도 준비되어있어요. 현자님 말씀으로는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해요.”
“퍽이나.”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잠든 6년 사이에 정치에 이용당했다. 지구에 멀쩡히 살아계시는 내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실종으로 처리되셨고...
너무 기가 막혀서 짜증 낼 기분도 안 났다.
세상은 확실히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내가 알던 지형이랑 많이 바뀌어있었으며, 마을Q가 있던 자리는 폐허로 변해있었다.
골렘의 전쟁이 이렇다.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힘이 센 탓에 이기든 지든 주변 지형을 전부 박살 내버린다.
▶추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해요.
교생 아가씨. 정답이야.
그 새우가 대륙의 모든 인간거주지란 게 문제지만.
*
우리는 쭉 암흑상회의 붉은색 골렘의 방해를 받으면서 현자의 탑까지 이동했다.
어딜 돌아봐도 처참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런 북대륙이 가장 평화로운 거라고?
“이번 회차는 글렀군···.”
솔직히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애완동물을 잡아먹은 사악한 고양이가 나를 6년이나 잠재워서 벌어진 사태다.
억울하지만, 얼른 7회차로 넘어가자.
▶궁금: 바로 마왕 잡으러 안 가시네요?
교생 아가씨. 오해는 하지 마.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전용골렘만 보고 떠날 거야.
저 멀리,
근사한 옷을 빼입은 현자와 잡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6년이 흘러도 전혀 늙지 않은 누추한 여동생과 백구(사망)의 마누라, 골렘D가 보였다.
대표로 현자가 반갑게 내게 인사했다.
“하하! 용사님! 무사하셔서 다행- 켁켁?!”
나도 현자의 목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너, 이 새끼야. 암흑상회를 막으라고 했더니 그동안 뭐했어?”
“켁켁! 용사님이 주문하신 골렘을 제작하느라 늦었습니다. 워낙에 주문하신 사항이 많아서 재료수급부터 공정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었지만, 저 친구랑 끝내 완성해냈습니다. 자! 보시지요!”
척! 척! 척! 척! 척!
현자의 탑에서 5기의 골렘이 뛰쳐나왔다.
내가 주문한 디자인대로 양팔에 드릴과 포대를 장착하고, 롤러블레이드처럼 양발에는 바퀴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현자야. 고작 이거 만들려고 대륙이 쑥대밭 될 때까지 가만 놔뒀던 거니? 죽고 싶은 거지? 그런 거지?”
“켁켁! 용사님!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더 보십시오!”
푸화아앙-!
푸화핫-!
등에 달린 부스터의 불을 뿜으면서 하늘로 날아오른 5기의 골렘이 변신&합체하기 시작했다.
몸통,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각기 다른 다섯 파츠(parts)로 변해서 합쳐졌다.
철컥, 철컥, 철컥-
다섯 골렘이 하나로!
무게만 따져도 통상적인 골렘의 5배. 그 위풍당당한 외형도 가슴 벅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슈퍼로봇···.”
이것이 내 전용골렘이었다.
“용사님. 마음에 드십니까?”
“...똑똑한 친구! 뒷일은 이 용사님에게 맡겨달라구!”
6회차의 평화는 내가 지킨다!
▶당황: 저기, 강한수 생도님? 7회차는 어쩌시고요?
환승역에서 기다리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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