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74화 (74/430)

 074화

[7회차] 분할&복사&붙여넣기

새삼스럽지만, 수련의 동굴은 이미 한 번 거쳤던 장소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용사의 도굴꾼 본능이 발동해서 구석구석 탐색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현재는 무조건 빨리 깨는 걸 목표로 앞만 보고 전진했다.

척! 척! 척!

빠각! 뽀각! 뿌직!

수련용 인형이 단계별로 생성되는 속도가 정해져 있어서 걸리는 딜레이를 빼면, 실질적인 대결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후대 용사를 위해 마련된 수련의 동굴 마지막 층인 ‘초월자의 방’까지 순식간에 당도했다.

Z등급 스킬이 넷.

하나일 때도 수월했던 곳이었기에 넷인 현재는 수련이 아니라 산책 나온 거나 다름없는 시시한 수준이었다.

예상대로 입구에는 여사제가 대기···. 음?

“너는 누구지?”

그곳에는 여사제 대신 장신의 악마 남자가 서 있었다.

악마의 특징인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귓바퀴 위쪽으로 또 다른 특징인 검은색 뿔이 달려 있었다.

복장은 순백의 턱시도.

무기는 등에 멘 언월도(偃月刀)가 전부인 듯했다. 절대 작은 편이 아닌데, 악마가 워낙 장신이라서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졌다.

나는 습관처럼 그자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종족: 올드 데몬

▷레벨: 1

▷직업: 집사(주인→레벨↑)

▷스킬: 저주Z 환각Z

▷상태: 관리

이 늙은 악마를 제외한 내부풍경은 6회차랑 똑같았다.

그가 정중히 허리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세대 용사님. 어리석은 최초의 용사를 기념하는 박물관에 잘 오셨습니다. 저는 이곳을 관리하는 악마입니다만, 악마는 무조건 적이란 편견은 안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일단 잠자코 들었다.

이 악마는 아직 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오는 게 아님을.

“아주 먼 옛날, 다른 차원에서 판타지아로 소환된 최초의 용사도 당신처럼 성장했었습니다. 압도적인 재능과 친화력, 잡식성으로 인류와 유인종 연합군을 이끌었고, 끝끝내 마왕이랑 경합(競合)을 벌여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사족은 됐어.”

이미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 뒷이야기도 아십니까? 마왕을 무찌른 용사는 아름다운 공주, 요정, 인어, 성녀들이랑 가정을 꾸리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혹시, 이렇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론만 말해.”

나는 신전 정원을 둘러봤다.

6회차에서 봤을 때는 결벽증이 느껴질 만큼 정원 손질이 잘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것처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이것도 관리자가 바뀐 탓일까?

아무튼, 이 악마도 여사제처럼 “진실은 다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바람둥이에서 피해자로.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는 행복하지 않았노라고.

악마 집사가 이어서 말했다.

“하핫! 성미가 급하시군요. 이미 짐작하셨다시피, 적수가 사라진 최초의 용사는 불필요한 존재가 됐습니다.”

패배한 최초의 마왕이 봉인되면서 우주의 패권을 노리던 악마들은 지리멸렬했다.

이제 누구도 정의로운 용사를 막을 수 없었다.

이론상, 우주는 평화로워졌다.

“이봐, 집사. 최초의 용사가 아군에게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면 지금이라도 생략해. 그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어. 내가 맞춰볼까? 변변찮은 처가와 마누라의 참견에 질려버린 용사가 가출했겠지.”

“...정답입니다. 통찰력이 대단하시군요.”

“기본이지. 아부하지 마라.”

“하핫! 겸손하시기까지.”

능글맞게 대응하는 악마 집사.

나는 핀잔주는 대신 신전 내부를 찬찬히 둘러봤다. 전체적으로는 이전에 봤을 때랑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자잘한 변화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우선은 관리.

정원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내부 또한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랫동안 청소 한 번 안 했다는 증거.

여사제가 관리했을 때는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도굴꾼에게 탈탈 털리고 허전한 없는 살림에, 바닥과 창문이라도 깨끗하게 해뒀었다.

하지만 악마 집사로 바뀌면서 정리가 전혀 안 되어있었다.

마치, 도둑질한 집처럼.

“여사제···?”

원래 집주인을 발견했다.

일전에 보았던 사제복이 아닌, 은밀한 부위가 훤히 비치는 반투명한 붉은색 란제리 차림이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뒤로 뺀 요염한 자세로 창틀에 묵직한 가슴과 가녀린 양팔을 올린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나를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여사제는 내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종족: 올드 휴먼

▷레벨: 1

▷직업: 대사제(교세→마성↑)

▷스킬: 축복Z

▷상태: 관리, 환각

상태에 표시된 환각.

누가 걸었는지는 뻔했다.

“하핫! 용사의 아내였던 과거의 망령입니다. 꿈속에 있는 그녀에게는 저희가 보이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신세대 용사님. 이 앞에 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악마 집사도 결과적으로는 여사제랑 같았다.

신전 최심부에 있는 최초의 용사를 본뜬 황금색 동상으로 나를 안내했다.

다시 보게 되는 최초의 성검.

이 악마도 여사제처럼 검을 탈취하라고 주문하려는 걸까?

일단, 넌지시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저 성검이 보상?”

긍정하는 순간, 바로 턱주가리를 날려버릴 생각이다. 여사제마저 완벽하게 속인 Z급 환각은 경계할 필요가 있는 까닭.

어쩌면 이미 당했는데 눈치 못 챈 게 아닐까.

그만큼 꺼림칙한 스킬이었다.

“아닙니다.”

“흠···?”

“잘 지켜보십시오.”

악마 집사가 동상 가까이 걸어갔다.

두드드드···.

동상이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관리자라도 성검에게 접근하면 공격하도록 설계된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예상하고 준비한 악마가 한 수 위였다.

환각으로 동상의 헛손질을 유도한 후, 순식간에 성검을 빼앗았다. 하지만 동상은 빼앗긴 줄도 모른 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날로 먹네.”

스킬 환각.

매우 탐났다.

악마 집사는 불길한 색채의 저주를 훔친 성검에 씌웠다.

그 직후,

빠직-

성검의 칼날에 금이 갔다.

쨍그랑-!

급기야 완전히 깨져버려서 못 쓰게 돼버렸다.

“허?”

내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검이 괜히 성검이라고 불리겠는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 요소가 있기에 전설의 성검인 것이다.

물론, 절대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성검은 저리 쉽게 파괴될 물건이 아니다.

악마 집사의 입꼬리가 히쭉 올라갔다.

“용사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해하신 듯하군요.”

“설명해봐.”

“네, 물론입니다. 제가 방금 파괴한 성검은 최초의 용사가 사용했던 성검이 맞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기도 합니다. 진짜라면 저리 쉽게 파괴될 리 없지요. 그 이유는, 이 판타지아 세계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도덕 선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판타지아 차원은 교직원 일동이 지구인을 납치해서 용사를 키워내는 거대한 교육장이다.

그러나 학교나 학원 같은 게 아니다.

복제된 차원 하나하나가 통째로 교과서라고 할까.

마을주민A부터 공주K까지 전부 용사 1명만을 위해 존재한다. 정말 터무니없는 규모의 교육방식이다.

“용사는 당신만이 아닙니다.”

“증거를 보여주려고 성검을 파괴한 건가?”

“그렇습니다. 전설이 절반만 사실이라도 이 성검이 이리 쉽게 파괴될 리 없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뭐···.”

마왕을 베는 성검이 집사 같은 비중 없는 악마 따위에게 부서진다면, 성검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파괴된 그것은 성검이 틀림없었다.

악마 집사가 결론을 읊었다.

“신세대 용사님. 이 판타지아 대륙은 원본을 똑같이 복제한 차원이 아닙니다. 원본이었던 세계가 균등하게 분할된 것이지요. 원래 힘이 100이었다면 복제해서 100을 양산하는 게 아니라, 100을 쪼개서 1씩 힘을 나누는 방식입니다. 방금 파괴된 성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성검만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판타지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본을 쪼갠 분신이라고···.

“마왕 페도나르도?”

“그렇습니다. 통찰력이 정말 좋으시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마왕이 부활했다고 떠들썩하지만, 그건 잘못된 정보입니다. 그분은 최초의 용사에게 패배한 뒤로 단 한 번도 부활한 적이 없었습니다. 세계의 숫자만큼 모든 힘이 나뉜 채 봉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악마 집사의 설명 덕분에 이해됐다.

직업 마왕의 페널티.

용사의 레벨에 맞춰서 마왕의 레벨이 하락한다.

사랑과 우정의 힘을 선전하려고 만든 시스템이란 건 2회차부터 알고 있었지만, 부활해서 세상을 정복하려 한다는 마왕에게 그런 약점을 줄 수 있다는 설정은 좀 의아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애초에 부활한 적이 없다면?

대전제부터 잘못됐던 것이다.

마왕 페도나르는 최초의 용사에게 패배한 날부터 이때까지 쭉 봉인돼있었다.

현재, 내가 하는 회귀와 모험은 단순한 교육.

마왕을 쓰러트리든 안 쓰러트리든 세상이 멸망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교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왕은 용사님의 진짜 적이 아닙니다.”

악마 집사가 재차 강조했다.

“부활한 마왕을 처치해달라는 부탁을 줄곧 들었을 용사님께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란 걸 압니다. 그러니 당장은 안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저, 훗날에라도 한 번쯤 떠올려주시길 부탁합니다.”

“그러지.”

나는 어영부영 넘어갔다.

하지만 이 악마의 말을 안 믿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회귀는 이번으로 7회차.

경력으로 따지면 17년차!

더는 신출내기 용사가 아니었다. 역으로 아는 게 너무 많은 베테랑이라서 문제였다.

6회차 마왕의 기상천외한 마기의 응용능력.

그것은 레벨이 올라서 강해진 수준이 아니었다. 구속하던 봉인이 아주 조금 헐렁해지면서 보인 원래 실력의 편린(片鱗).

마왕이 또 달리 보이게 됐다.

그러니,

‘얼른 졸업하자!’

괜히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최대한 빨리 졸업해서 이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를 털고 떠나는 게 좋았다.

그렇게 계획을 짜고 있는데···.

“신세대 용사님.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목적어 빼먹지 마라.”

뭐가 궁금한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흠흠. 죄송합니다. 쓰러트릴 마왕도 없는데, 저들이 왜 또 용사를 육성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저들은 누군데?”

“용사님을 이 세계로 소환한 자들.”

“...답부터 얼른 말해. 질질 끌다가 갑자기 난입한 훼방꾼에게 입막음 당하지 말고.”

나는 그런 전개를 아주 많이 보았다.

우연치고는 자주 말이다.

“하핫! 조심성이 많으시군요. 예, 요약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최초의 용사를 쓰러트리기 위함입니다. 정말로 가출한 최초의 용사는 새로운 가정을 꾸렸습니다. 수평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수직의 절대복종으로 이루어진 하렘을. 그 가정의 구성원들을 차세대 악마와 마왕이라고 칭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재미있네.”

용사가 마왕이 됐고.

그의 동료들은 새로운 용사를 육성한다.

내 1회차 막바지가 떠오른다.

“제가 신세대 용사님께 전하고 싶었던 얘기는 끝났습니다.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오셨으니 보상이 필요하겠지요. 어차피 수없이 분할된 몸 중 하나. 이 힘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즐거운 모험 되시길.”

정중히 인사한 악마 집사의 몸이 바스러졌다.

수련의 동굴 영향으로 내 능력치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스킬과 레벨이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환각이 깨졌다.

“앗?! 당신은···!”

여전히 란제리 차림인 여사제가 나를 발견하고는 가슴께를 가리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신사적인 나는 구차한 말 대신 혀와 입술로 그녀에게 대답해줬다.

애정을 듬뿍 담아서.

추욱.

여사제의 가녀린 팔다리가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나는 늙은 왕자가 수련의 동굴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오래된 핫팩을 재활용하면서.

하루, 이틀, 나흘···.

“너무 안 오네.”

“하응···.”

핫팩도 질렸고, 시간을 너무 허비한 기분이 들었다.

“슬슬 마왕님이나 만나러 가볼까···.”

그때, 누군가 수련의 동굴에 들어왔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거리가 꽤 멀었다.

초보자의 방.

나는 씩 웃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왔나.”

그건 정말 뜻밖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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