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75화 (75/430)

 075화

[7회차] 판타지에 웬 외계인?

나는 수련의 동굴을 역주행했다.

무기는 악마 집사가 떠나면서 남긴 언월도.

이번에야말로 그 늙은 왕자를 허리디스크로 완벽하게 제압한 후, 가진 모든 정보를 실토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때, 나는 악마 집사의 말을 간과하고 말았다.

판타지아 차원.

여기가 용사를 육성하기 위해 분할된 차원이라면, 이 대륙에 소속된 생명체와 자연환경 등은 몇 번을 회귀하고 반복해도 똑같은 과정과 결과를 도출해낼 것이다.

변수라면 차원 외부에서 납치된 용사.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무단침입자다.

“야. 네가 왜 여기 있냐?”

늙은 왕자도 수련의 동굴에 들어올 수 있는 ‘용사’이기에, 나는 늙은 왕자 또한 당연히 판타지아 차원의 일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막 깨달았다.

초보자의 방에서 나무인형을 상대로 똥줄 빠지게 싸우는 용사 때문이었다.

“헉헉! 강한수···? 너, 맞지?”

그쪽도 나를 바로 알아봤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아니, 이것도 교직원 일동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야. 졸업한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상대는 지구로 귀환한 졸업생이었다. 이 야만적인 세계에 이처럼 남아있을 리 없었다.

혹시, 그도 졸업하면서 분할된 걸까?

남 얘기 같지 않아서 상상만으로도 섬뜩했다.

외모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랑 똑같았다.

19세 전후의 청년.

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모든 나무인형을 처리하고 지친 그가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운 채 내게 역으로 질문했다.

“강한수. 내 이름은?”

“나의 소중한 친구야. 나를 못 믿니?”

“믿을 리 있겠냐! 이 망할 자식아! 또 까먹었잖아!”

고등학교 동창A가 버럭 소리 질렀다.

*

판타지아 차원으로 납치된 지구인 용사들.

그들은 정정당당하지 못한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면 고향별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용사 페스티벌 때 확인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산증인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동창A 또한 별거 아니란 어조로 대답했다.

“여자친구랑 같이 용병으로 사냥에 참전했어. 그러다가 날씨 악화로 어쩔 수 없이 야영하게 됐는데, 침낭이 하나뿐이지 뭐냐. 춥다는 여자친구를 따뜻하게 해주면서 새벽까지 낮의 사냥 이야기로 꽃을 피웠지. 그러다가 고용주에게 한밤중에 시끄럽다고 야단맞고···.”

“닥치고 본론만 얘기해.”

가만히 듣다가 발끈해서 언월도로 동창A의 모가지를 벨 뻔했다.

“강한수. 너, 애인 없지?”

“나쁜 말로 할 때 본론으로 넘어가라.”

“쯧쯧. 성질머리하고는. 이제부터 본론이니 계속 들어. 그렇게 새벽에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판타지 마을이더라. 마을주민에게 물어보니, 내게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데···. 정작 나는 그 여동생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어.”

처음에는 무척 황당했다고 한다.

핫팩 역할을 해주던 여자친구는 사라지고, 다시 판타지아 대륙으로 납치됐다.

환영 인사도 없이 그냥 덩그러니!

심지어, 함께 산다는 설정의 여동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창A도 일단은 판타지 세계를 졸업한 용사였다.

용사의 모험 도입부가 크게 달라지고 허술해지긴 했어도, 그가 판타지아 대륙으로 납치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동창A는 금방 마을에 적응했다.

마을주민에게 무료봉사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가 딸이 아픈 마구간 주인의 부탁으로 약재를 구하러 숲에 들어간 나는 새로운 성검을 발견했지! 흐흐. 듣고 놀라지 마라. 무려 에고소드! 고결한 선배 용사의 영혼이 깃들어있다.”

동창A는 민물인어가 사는 연못에서 성검3를 획득한 모양이다.

“성검의 추천으로 이 동굴에 들어왔다는 거군.”

대충 어떻게 흘러갔는지 이해됐다.

동창A는 내 6회차 메인스토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 강한수,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경험으로.”

대충 얼버무린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용사로 인정받고 3년 만에 졸업한 동창A가 이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로 다시 끌려온 탓이다.

졸업 후의 태도나 성적이 불량해서?

그건 아닌 듯했다. 잠자코 가만히 들어보니, 그는 ‘사랑의 힘’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었다.

또 납치될 이유가 없었다.

재소환 된 동창A의 능력치를 살펴볼까?

▷종족: 휴먼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통역A

▷상태: 수련

수련의 동굴 영향 탓에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동창A에게 Z등급에 도달한 스킬이 있다면 또 달랐겠으나, 그런 역량이 있었다면 용사 페스티벌에서 만났을 당시에 날아다녔을 것이다.

그래도 어림짐작은 가능했다.

누추한 마을에서 주민들의 부탁을 하나하나 들어주면 누추한 멧돼지 가죽옷 풀세트를 구할 수 있는데, 동창A의 복장은 달랐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전투복.

내가 매번 교복으로 시작하듯이, 사냥 중에 재소환당한 동창A는 지구에서 입었던 전투복 차림이었다.

능력치도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을까?

아무튼, 여자친구랑 한 침낭을 같이 쓴 동창A는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알몸이나 속옷만 입은 채 소환될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병으로 고용된 동창A가 어느 상황에서도 복장을 단정히 하는 프로정신은 있는···. 음?

“친구야.”

“이름으로 불러라.”

“친구야!”

“망할 자식아, 뭔데?”

“너는 뭘 사냥하기에 전투복까지 입고 자냐?”

용사 페스티벌에서 보았던 동창A의 능력치는 호랑이 수백 마리가 덤벼도 끄떡없는 수준이었다.

전투복 대신 국산 핫팩을 걸쳐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걸 본인이 모를 리 없는데도 굳이 수면 중에 전투복을 입는 이유가 뭘까?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

동창A는 천연덕스럽게 말하지만, 지구로 귀환하지 못한 나는 그 당연한 게 뭔지 모른다.

이럴 때는 입 다물고 있으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

예상대로 동창A가 알아서 설명해줬다.

“6개월 전부터 지구로 침공해오기 시작한 외계인들의 주력인 안드로이드 군단. 밀랍인형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외형이랑 달리, 전투력이 장난 아니게 높아. 특히, 능력치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우리 인간이랑 구분이 안 돼서 더욱 위협적이지.”

안드로이드(Android).

인간을 닮은 로봇.

지구를 침공했다는 외계인들은, 골렘D처럼 비실비실한 쓰레기 로봇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듯했다.

만약, 그딴 쓰레기 만들 시간과 자원을 슈퍼로봇에 투자했다면 지구는 진즉 외계인들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건 곤란하군.

곤란한 수준을 넘어서서 가슴이 싸해졌다.

지구에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지구가 외계인들에게 점령당하면 부모님의 안위도 위험해진다.

외계인들이 슈퍼로봇에 관심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

“그까짓 안드로이드가 뭔 대수라고.”

일단은 나도 지구로 귀환했던 척하기 위해 맞장구 쳤다.

그랬더니 동창A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내게 보낸다.

왜?

“안드로이드. 통칭 발키리(Valkyrie). 가장 약한 양산형조차 700레벨대 용사보다 강해. 무시하면 바로 살해당한다? 아! 미남미녀는 죽이지 않고 생포해서 어디론가 끌고간다고 하더라. 물론, 너랑 나는 해당하지 않겠지만.”

“내가 어때서?”

나는 후천적인 미남이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순 없지. 판타지 말고 현실 지구의 여자를 사귀라고. 하하!”

“.....”

“그런데 강한수. 아까부터 계속 나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도 그간 어떻게 지내왔는지 말해봐.”

“그건···.”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깔끔히 무시하던가, 적당히 상대해주던가.

고문해서 정보를 뜯어낸다는 제3의 선택지가 남아있긴 했지만, 고등학교 동창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둘.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지구가 외계인의 침공을 받았다.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지구에서 다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동창A에게 더 정보를 뽑아내려면, 그를 무시하지 않고 친교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강한수 님. 소녀의 가슴에 불을 지펴놓고 어딜 가셨나 했더니···.”

교태로운 비음 섞인 원성이 뒤편에서 들려왔다.

침대에서 사라진 나를 찾으러 여기까지 쫓아온 여사제였다. 알몸을 얄팍한 담요 하나로 가린 아슬아슬한 차림.

동창A도 그녀를 막 발견했다.

그리고 입을 쫙 벌렸다.

“강한수, 이 망할 자식! 이런 굉장한 미녀랑 알콩달콩 지냈으면서 모른 척하려 했겠다···!”

동창A의 호감도가 대폭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또 멋대로 착각해준 덕분에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는 점에선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제답지 않은 괘씸한 몸단장을 하고 등장한 여사제를 뭐라고 둘러대면 좋을까?

고민 끝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개할게. 이쪽은 수련의 동굴에서 우연히 만난 동굴주민A 양이야. 보다시피 굉장히 유능한 인재지.”

Z등급 축복을 보유하고 있다.

동창A도 능력치를 볼 수 있는 용사이기에 그녀의 이 사기적인 스킬을 확인했을 것이다.

“하! 지금 여자친구가 절륜하다고 자랑하는 거냐?!”

“동굴주민이라니까.”

이름조차 아직 모른다.

“크윽. 이 자식. 이만한 미녀를 소유하고도 끝까지 여유와 기만이라니. 고등학교 동창회 때 전부 까발려주마. 이 배신자!”

“정말로 별거 아니야.”

“겸손한 척까지···!”

더는 정상적인 대화가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은 수련의 동굴부터 빠져나가기로 했다.

관리자인 여사제만 있으면 마지막 방까지 곧장 갈 수 있지만, 동창A랑 거기까지 함께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 한참 아래쪽의 ‘도전자의 방’이면 충분하다. 거기서부터는 밖으로 나가는 출구도 함께 열리는 까닭이다.

“먼저 갈 테니 능력껏 따라와.”

“뭐?!”

동창A의 경쟁심을 자극하기로 했다.

얼음공주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하던 녀석이라면, 이를 악물고 최대한 빨리 뒤따라올 게 틀림없다.

굳이 현재 내 실력을 보여줘서 좋을 게 없었다.

옆에서 안전하게 호위해줄 필요도 없다.

여기는 수련의 동굴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나는 여사제를 이끌고 초월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사실, 조금 초조해진 상태였다.

“갑자기 외계인이라···?”

나는 동창A가 했던 말들을 되새김했다.

등장 시기도 묘하게 비슷했다.

내가 늙은 왕자의 턱주가리를 날려서 패퇴시킨 게 7개월(6년) 전이었는데, 외계인의 지구침공 시기랑 묘하게 겹쳤다.

또한, 악마 집사가 언급했던 최초의 용사.

공상과학 같은 안드로이드가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6회차에서 아름다운 여신으로 통하던 골렘D도 있고, 마왕의 딸이 광선검을 휘두른 것도 목격했다.

판타지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그 판타지가 지구로 넘어갔다는 게 문제지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네.”

오래된 핫팩을 재활용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외계인들이 언제 내 부모님을 살해할지 알 수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6회차에서 내 점수는 트리플A, 쓰리 카드였다.

이번에 마왕을 무난하게 처치하면 포커를 찍게 될 것이다.

네 과목 성적이 모두 A학점을 찍게 되면, 아무리 치졸한 판타지 신(神)이라도 나를 졸업 안 시킬 수 없으리라.

나는 느긋하게 동창A가 ‘도전자의 방’까지 올라오길 기다렸다.

...심심해서 다시 핫팩으로 손을 뻗었다.

“이 새끼, 너무 늦잖아?”

죽거나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이곳, 수련의 동굴에선 용사의 경험치 500% 특전을 받을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순수한 실력.

정말 참혹한 수준이었다.

지구에 이런 친구들로 바글바글하다면?

“진짜 심각한데···?”

나는 자연스럽게 동료로 편입된 동창A가 동굴 출구에 도착할 때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귀환할 때까지 지구가 버텨주기를.

*

“드디어 나왔다···!”

지구에서 가져온 전투복이 걸레짝이 된 동창A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더 어려운 단계로 가는 입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동굴 출구로 달렸다.

그만큼 힘들었던 모양.

도중에 죽기도 엄청 많이 죽은 듯했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응해줬다.

“그래. 지루한 수련도 끝났으니 곧바로 마왕 잡으러 가자.”

“...마왕? 페도나르?”

“친구여.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지금이 최적기다.

마왕 잡기 좋은 레벨이다.

하지만 동창A는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문제? 아주 많지! 무슨 용사의 모험이 소환되고 한 달도 안 돼서 끝나는데? 애초에 이 레벨로 어떻게 마왕을 쓰러트려?!”

“흠···.”

나는 이번에도 입 다물기로 했다.

판타지 고인물이란 걸 들키긴 싫었던 탓이다.

▶정정: 강한수 생도님은 17년 숙성의 발효주죠.

교생 아가씨. 쉿!

그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다.

“한수야. 내가 전에 해준 말 기억해?”

그때, 동창A가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래서 나는 되물었다.

“뭘?”

“북대륙의 고고한 얼음공주를 포섭했다는 이야기. 이번 기회에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네가 아무런 관계도 아닌 주민이라고 우기는 여사제 못지않게 아름다운 공주님이지! 흐흐.”

수련의 동굴을 빠져나온 동창A가 도전적으로 내게 외쳤다.

내가 동굴에 버리고 온 핫팩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얼음공주라면···.”

쿵!

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순백의 거대한 존재가 내 옆에 돌풍을 일으키며 착륙했다.

그리고 힘차게 포효했다.

“Quuuu-!”

“요, 용이닷?!”

사색이 된 동창A를 진정시킨 나는 애완동물을 소개해줬다.

“이 멍청한 용은 백구라고 해.”

“Quu!”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동창A가 포섭하려는 공주님은 이미 며칠 전부터 우리랑 동행 중이다.

아직 소화되지 않았다면.

“용을 길들이다니···. 그, 그래도 내 얼음공주가 더···.”

“포기하는 게 어때?”

그 공주님은 성격도 별로고 능력치도 변변찮았다.

“이익! 강한수! 대결하자! 누구의 동료가 더 대단한지를···!”

“마음대로.”

굳이 말리진 않았다.

꿈과 희망은 소중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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