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회차] 안녕 판타지! 안녕 여기!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해주세요!
성적표
이름 강한수
전투력 업적 평판 인성
SS B B B
비고 이 새끼가 B급? 이건 뭔가 잘못됐어!
쯧쯧. 포기해.
판타지 신(神) 혼자서 아니라고 아무리 우긴들, 내 결백함과 우수성은 하늘이 듣고, 땅이 보았다.
마왕 페도나르를 간단히 무찌른 내 전투력은 SS등급. 이건 내 예상대로의 성적이 나왔다.
그 외의 세 과목도 썩 나쁘지 않았다.
트리플B.
레벨을 낮추고자 의도적으로 사냥을 회피하고, 북대륙 정벌이 빠지면서 업적이 하락한 것으로 짐작된다.
평판 또한 내 소문이 퍼지기엔 지나치게 짧았다. 6회차처럼 7년까진 아니더라도 몇 개월만 있었어도 A등급이 나왔을 텐데.
인성은···.
떨어진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합격했습니다.
합격!
천상의 멜로디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상장: 위 학생은 평소 모험을 성실히 하고 바른 선행을 스스로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항상 동료들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으로 판타지아 원주민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에 위 학생을 A급 용사로 임명합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번에 편파판정으로 졸업보류 된 4회차에서 B급 용사로 임명됐었는데, 이번에는 A급을 받았다.
솔직히 C급이든 D급이든 상관없다. 1분, 1초라도 빨리 지구로 보내주기만 하면 좋겠···.
▷졸업식을 시작합니다.
무려 졸업식까지?!
우리 인간적으로, 교장 선생님 훈시 같은 건 하지 맙시다!
▷교직원 일동이 당신의 졸업을 기뻐합니다.
▷전문교사의 근신처분이 해지됩니다.
▷직업 ‘용사’가 회수됩니다.
▷무기 ‘성검’이 회수됩니다.
▷상태 ‘학생’이 회수됩니다.
용사 페스티벌 당시에 만났던 다른 졸업생들처럼, 나도 교육용 직업 ‘용사’가 사라졌다.
하지만 회수된 건 직업이 다였다.
오토매틱으로 떡칠한 교보재 ‘성검’은 애초부터 소지하지 않았고, 상태의 ‘학생’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내 계산대로 흘러갔다.
그때,
▷교장 선생님 훈시.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부디, 짧게 끝내주길 바란다.
▷훈시: 처음이라 낯설었을 초등교육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끝마친 친애하는 학생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훌륭한 졸업생을 볼 때마다 매번 떨리는 이 마음을 어찌할 수 없군요. 곧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딜 졸업생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째, 세상에 나가서 새로운 사랑과 우정을 만드십시오. 이곳에서 쌓은 인연도 물론 소중하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을 떠올려보세요. 가족과 고향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째, 지금처럼 꿈과 희망을 키워가십시오. 바라는 목적지가 없는 여행은 금방 지치게 됩니다. 높은 산을 바라보며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셋째, 이 낯선 세계에서 배운 지식과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마십시오. 언젠가 운명처럼 찾아올 시련과 역경으로부터 당신을 지켜줄 겁니다. 그간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당신은 저희가 인정한 졸업생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교직원 일동이 언제나 당신 곁에 있습니다. 교직원들도 학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의 마음을 잘 압니다. 선배가 후배를 끌어주고, 후배가 선배를 밀어주며 화합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할 겁니다. 용기를 내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드디어 끝났나?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줄줄이 떠들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담임선생님이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해!”라고 했지만, 우리가 다시 연락해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못 했다기보다는 안 했다고 할까?
난 앞으로 판타지아 세계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눌 것이다. 어느 방향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야만적인 판타지!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훌쩍: 시원섭섭하네요, 강한수 생도님. 축하드려요.
물론, 교생 아가씨는 예외야!
남자의 탄탄한 가슴과 팔뚝이 그리우면 언제든 연락해. 교생 아가씨라면 얼굴과 몸매 따지지 않고 하룻밤쯤은 재워줄게.
▶뿌잉: 저도 인기 많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남자랑 많이 자봤다는 뜻은 절대 아니지만요! 강한수 생도님.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발언은 자제해주세요! 어? 전에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었나요? 아무튼! 다른 여성분 앞에서도 주의해주세요!
나는 6회차 내내 꽁꽁 얼어있어서 기억 못 하지만, 교생 아가씨는 4회차부터 거의 8년 동안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름 각별한 사이.
이렇게 헤어진다고 하니, 조금은 아쉬웠다.
“뭐···. 지구의 세련된 아가씨들을 만나다 보면 까맣게 잊겠지!”
▷졸업식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지구 양.
지금, 강한수가 달려갑니다.
*
깜빡깜빡.
나는 한순간 흐릿해졌던 두 눈을 떴다.
저 멀리, 매연으로 뒤덮인 도시가 내 각막에 잡혔다.
판타지의 누추한 도시가 아니었다.
인공적인 콘크리트와 유리로 벽을 마감한 고층빌딩들이 숲의 나무들처럼 빼곡했다.
무려 17년 만에 다시 보게 된 현대적인 도시.
한밤중일 텐데도 도시만은 밝았다. 아니, 도시로 향하는 길까지도 가로등 빛으로 밝혀져 있었다.
하늘의 별들은 짙은 매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도시 자체가 보석상자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
판타지아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광경.
마법이 극도로 발달한 현자의 탑도 이 정도까지 야경(夜景)을 구현하진 못한다.
“후으으읍!”
깊게 숨을 들이켜봤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수명이 줄어들 것 같은 텁텁함. 내가 기억하는 고향별의 오염된 공기 향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나는 밤하늘을 지그시 노려봤다.
집중하면 천체망원경도 능가하는 내 시력으로 보지 못할 별자리는 없었다.
지구과학 수업시간에 배운 별자리들이 보였다.
전갈자리, 사수자리, 북극성···.
하나뿐인 새하얀 달이 마침표를 찍었다.
“정말로 돌아왔다-! 하하하!”
만세를 외치듯 양팔을 쫙 벌린 나는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당장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지만, 이렇게 도착한 이상 서두를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의 감동과 기쁨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었다.
코가 간질간질하면서 찡했다. 눈에도 먼지가 들어갔는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
촤아아아-!
내 기분도 몰라주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풀벌레들은 마기로 깡그리 질식사시켜줬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내 능력치에는 지장 없는 듯했다.
힘들게 고향별 지구로 돌아왔더니 “전부 꿈이었구나!” 같은 전개였으면 뒤통수가 얼얼했을 것이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신성Z 축복Z 마기Z 날조SSS 조련SS···
▷상태: 성검, 성녀, 골렘
직업 빼고는 문제없었다. 아니, 쓰레기 직업 용사가 사라진 덕분에 선택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직업은 역시 ‘도적’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강의 직업.
약자를 상대로 행운이 올라가는 도적은, 성검2의 스킬 증폭 효과랑 합쳐지면 사기적인 효율이 나온다.
일단, 직업 도적을 얻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앞으로 걱정 끝! 행복 시작이다···!”
17년이나 떨어져 지낸 탓에 아직은 낯선 지구였지만,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면 문제없이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귀환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을 애써 일으킨 후,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일단은 내 현재 위치부터 파악해두기 위해.
지구로 귀환했으니 당연히 대한민국 어딘가일 것이다, 같은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어권인가···?”
도로의 간판들이 알파벳으로 되어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문자.
외국어 수업시간에 배운 지식 덕분에 읽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읽어본 지명이 생소해서 현재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저 멀리 보이는 도시에 가면 저절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언어장벽은 통역A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고, 내 호주머니와 창고에는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금화가 꽤 들어있었다.
그때,
휘이이잉~!
갑작스럽게 폭풍이 몰아닥쳤다.
어두컴컴한 도로 위를 쌩쌩 달리며 도시로 향하던 승용차와 버스들이 도로 한복판에 줄줄이 멈춰섰다. 일부 운전기사는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폭풍 때문이 아니다.
그 원인은 밤하늘에 있었다.
“별똥별···? 아니, 저건···.”
쾅! 콰광! 펑! 쿠앙!
도시 위로 떨어지던 일부는 대공포와 마법 등으로 공중에서 요격되며 요란하게 파괴됐다. 폭죽처럼 터지거나 불나방처럼 추락한다.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대다수는 지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말뚝처럼 박혔다.
쿠웅-!
내 앞쪽에도 하나가 떨어졌다.
치이이익···.
불길과 연기로 뒤덮인 크레이터 정중앙.
검은색 롱코트를 망토처럼 어깨에 걸치고, 몸에 꽉 끼는 붉은색 일체형 수영복 같은 슈트를 입은 미녀가 태연하게 걸어 나온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광선검까지!
나는 쌈닭처럼 돌격해오는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이게 발키리인가?”
능력치만 보고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종족: 카오스 골렘
▷레벨: 700
▷직업: 여전사(매력→투기↑)
▷스킬: 투기A 신성A 매력A 자폭A
▷상태: 마검, 가동
저만한 레벨에 스킬이 고작 4가지뿐이란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골렘이라도 단계란 게 있는 법이니까.
예를 들어,
체력 없는 검술은 몸을 망친다. 마력 없는 마법은 아예 존립할 수 없으며, 공갈과 협박은 떼어놓을 수 없는 짝꿍···.
하지만 상대는 평범하지 않았다.
“혼돈이라···. 남 같지 않네.”
서걱-
나는 성검2로 발키리의 잘록한 허리를 양단했다.
베어낸 절단면에서 피와 살 대신 기름과 전선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정밀한 기계하고는 살짝 거리가 멀었다.
찰흙 속에 철사를 심어서 형태를 고정하는 방식. 건축용어로 표현하면 철근콘크리트쯤 될까.
뭐가 됐든, 순수한 기계도 아니었다.
콰과광-!
그리고 서슴없이 자폭까지!
나는 멀쩡했지만, 주변은 한순간에 초토화됐다. 여기에 휩쓸린 구경꾼A와 외국인B의 비명이 들린 것 같기도 한데···.
기분 탓일 것이다.
“기껏 판타지에서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공상과학이냐.”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려고 지구로 돌아온 게 아닌데 말이다.
나는 해수욕장이 보이는 안락한 전원주택에서, 앞치마만 입은 세련된 아가씨가 해주는 요리를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사는 게 꿈이다.
“주인님의 꿈은 저질스럽네요.”
귀찮은 뒷정리를 맡기려고 소환한 골렘D가 찬물을 끼얹었다.
“깡통. 폐기처분 되기 싫으면 동족학살이나 해.”
“표현이 심한데요?!”
골렘D는 투덜대면서도 성검3로 몰려드는 발키리를 처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가 멀찍이서 본다면, 미녀가 미녀를 학살하는 엽기적인 광경일 터였다.
얼마 안 지나서 발키리의 공습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전투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았다.
패색이 짙어질 때마다 줄줄이 자폭하는 바람에 이 일대는 이제 폐허란 표현조차 아까운 허허벌판이 돼버렸다.
“...살짝 걱정되는데.”
이런 일이 지구에 잦은 걸까?
도시 쪽도 어찌어찌 정리된 듯했다. 하지만 일부 고층빌딩이 무너지고 화재가 발생했음을 멀리서도 보일 만큼 심각했다.
지구의 최신정보가 필요했다.
때마침, 물어보기 좋은 친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걸 수직이착륙기라고 부르던가?
웬만한 용(龍)보다 빨랐다.
슈우우-
내 머리 위로 날아온 수직이착륙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지금 요격하면 어떻게 될까?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허허벌판에 착륙한 수송기에서 관계자들이 줄줄이 내렸다.
평균 600레벨.
스킬 구성은 그보다 더 한심한 오합지졸들이었다. 전형적인 지구인 졸업생들이었다.
하지만 그 선두에 대장처럼 선 여자의 능력치는 제법 출중했다.
“마술사? 보기 드문 직업이네.”
몸매도 보기 드물게 훌륭했다.
그때, 나랑 시선이 마주친 마술사 여자가 눈웃음치며 서슴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친한 척했다.
“또 만났네요! 제가 전에 말했었죠? 지구 어디에 숨든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그래도 놀랐어요. 무려 6개월이나 제 첩보망을 피하다니.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죠?”
“...우리, 구면이었던가?”
내 말을 들은 여자가 쌍심지 켜며 말했다.
“이봐요.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어요? 저는 어제 있었던 일처럼 여전히 생생한데.”
그날···?
“아하!”
“드디어 기억나셨나요?”
“너는 그날 거기서 그 대단한 일을 해냈던 그 미모의 마술사 맞지? 다시 만나서 반가워.”
“...당신, 평소에 짜증 난다는 소리 자주 듣죠?”
“아니.”
두 번 말한 인간을 여태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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