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회차] 태평양 한복판에서
우리는 수직이착륙기를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날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게 비행이란?
서리가 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닿은 채 날아가는 교통수단이다. 발을 헛디디거나 손잡이를 놓으면 죽음으로 직결되는 아찔함은 기본.
이처럼 편안하게 앉아서 가지 않는다.
판타지아 대륙의 보편적인 고급 소파는, 고급 가죽 안에 양털이나 깃털을 넣어서 푹신푹신하게 하는 것이다.
띠옹띠옹.
내가 앉아있는 이 소파처럼 스프링을 넣지 않는다.
인체공학의 힘이 포근하게 내 엉덩이를 감쌌다.
이 황홀한 안락함이란…!
“마음에 드세요?”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꼰 채 마주 보고 앉은 마술사 여자가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묻는다.
“나름.”
몸이 아닌 정신적으로 조금 불편하긴 했다.
맞지 않은 환경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기분 탓이었다.
이 기내(機內)만 보더라도, 판타지아의 어느 대제국 황제의 마차보다도 편하고 화려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비데가 설치된 수세식 변기에 앉은 서민 vs 황금으로 된 요강 위에 쭈그려 앉은 황제
문명이 갈라놓은 생활 수준 차이였다.
그게 싫진 않았다.
인체공학과 안전수칙을 쓰레기통에 처넣은 야만적인 판타지 생활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이 씻겨나가는 해방감.
이것이 문명인다운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걸 위해 그토록 애썼노라고.
“뭐 마실래요? 콜라, 맥주, 와인, 오렌지 주스…. 아! 덴마크 청정지역에서 짠 신선한 우유도 있어요.”
마술사 여자의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골랐다.
“콜라.”
고급 맥주와 와인 등은 판타지아 대륙에서도 실컷 맛봤다. 이 마술사 여자가 좋은 술을 꺼내더라도 ‘80년산 어쩌고’ 같은 최상품을 내놓을 순 없을 터.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판타지 대륙에선 탄산음료를 구할 방도가 없었다. 천연 탄산수를 맛볼 기회는 몇 번 있었지만, 그건 음료보다는 건강식품에 가까웠다.
“아직 미성년자이신가요?”
“콜라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냥 물어봤어요.”
마술사 여자는 소파 옆에 배치된 자그마한 냉장고에서 500mL 콜라병을 꺼내서 내게 건넸다.
그러고 본인은 새하얀 우유 팩 옆의 노란색 바나나 우유를 꺼낸다.
냉장고에 방치된 고급 와인과 맥주가 통탄하는 것 같았다.
치익, 꼴각.
나는 말 없이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청량감 너머로, 목구멍을 탁탁 쏘는 탄산이 내게 묘한 희열과 감동을 선사해줬다.
바로 이 맛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싹 씻기는 기분.
그동안 마법사 여자는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꿀꺽꿀꺽.
칠칠치 못하게 입술에서 삐져나온 우유가 그녀의 갸름한 턱과 목을 타고 깊디깊은 가슴골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웅? 웃지 말아요. 당신도 어린애 입맛이면서.”
마법사 여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안 웃었어.”
나는 순전히 기분 좋아서 표정이 풀렸을 뿐이다.
17년 만에 돌아와서 본 지구는 모든 게 아름다웠으니까. 칠칠치 못한 바나나 우유도 포함해서.
마술사 여자는 제법 강단 있었다.
자기 동료들은 아래 1층의 일반석에 탑승시키고, 신원이 불투명한 나랑 2층 귀빈석에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이건 자신감의 발로일까?
“음…. 막상 당신이랑 만나고 나니,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매뉴얼도 짜뒀었는데.”
우유 팩을 비운 마술사 여자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면서 운을 뗐다.
“할 말 없으면 내가 먼저 질문. 마술사 아가씨 수준이면 지구에서 몇 번째쯤 하지?”
“게임처럼 순위를 어떻게 계산하나요? 그날의 컨디션과 상성에 따라서 승패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데. 특히, 저 같은 마술사는 투자와 준비를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져요. 하지만 이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겠죠? 개인전과 단체전, 사냥, 범용성 등을 총합한 공식서열은 8위입니다.”
나는 그녀의 능력치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99+
▷직업: 마술사(기력=마술↑)
▷스킬: 기력SS 마술SS 검술S 면역S 생존A…
▷상태: 의문, 기대, 마검
마왕 페도나르의 애완동물을 쓰러트리기도 버겁지 않을까? 그런데 지구에서는 8번째로 강한 인간이란다.
나는 확인을 위해 넌지시 물어봤다.
“여성 용사 8위라니, 대단한데?”
“전체인데요?”
그녀의 한마디에, 내가 예상한 지구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정말 대단하네!”
“영혼 없는 칭찬은 됐어요!”
“빈말이 아니야. 자신감을 가지라구.”
“절 놀리시는 건가요? 당신이 소환한 골렘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수십의 발키리를 파괴하는 걸 봤는데.”
“그것도 못 하면 고철처리장에 보내야지.”
남들이 우정과 사랑의 힘으로 뭘 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내 앞에서 동료나 부하를 자칭하려면 그만한 실력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
“이번에는 제가 질문할 차례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인제 와서 감추셔도 소용없어요. 용사 페스티벌 폐막식 때는 영상기록을 남길 틈이 없어서 실패했지만, 지금은 당신 얼굴을 제대로 찍었어요.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 이렇게까지 범위가 좁혀지면 찾는 건 쉬워요.”
“강한수.”
나는 당당히 이름을 공개했다.
용사 페스티벌 당시에는 내가 지구에 없기에 말할 수 없었다. 판타지 고인물이란 걸 들키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불공정한 편파판정을 뚫고 졸업한 현재는 아니다.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다.
“저는 빅토리아(Victoria)예요.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요마(妖魔)란 이명으로 불릴 때부터 꽤 유명했어요. 현재는 용사보다 기술자 겸 사업가로 활동 중이에요. 과학과 마술을 접목한 신기술개발사업으로 돈 좀 벌었고, 현재는 범국가적인 대형 군수공장과 유통업체를 운영하고 있어요.”
“반가워.”
“...제 이름이 뭐라고요?”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유분수지. 팩토리아(Factoria)잖아.”
“빅토리아예요! 사람을 공장 취급하지 마요!”
“그래그래.”
정보만 빼내고 헤어질 마술사 여자가 쫑알거리면서 귀찮게 했다. 하지만 나는 손이 미끄러지거나 목을 붙잡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콜라를 얻어 마셨기 때문이다.
콜라가 그녀의 목숨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저나 복장이 특이하시네요.”
빅토리아가 내 판타지 복장을 걸고넘어졌다.
입고 있는 전투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법왕국에서 최고만으로 준비해줬지만, 지구의 현대적인 감각의 패션에는 여러모로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꿀리지 않았다.
다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한 그루의 나무는 눈에 띄지만,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면 그 광활한 경치에 압도되어 한 그루쯤은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래서 보여주기로 했다.
“옷이 많거든.”
나는 스킬 ‘창고’에 저장해둔 옷들을 뺐다가 넣기를 반복했다.
용사 페스티벌 때, 사악한 천사들의 보물창고에서 가져온 진귀한 것들이었다.
갑옷, 보호구, 평상복, 속옷….
종류와 재질, 용도가 가지각색이었다.
“세상에….”
빅토리아는 그 뒤로 내 옷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대신, 호기심 많은 마술사답게 천사의 옷에 짙은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안 보여줬다.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가?”
“그냥 보여주기 싫다고 말해도 충분히 알아들어요!”
이후에 우리는 기내식을 먹고 각자 휴식을 취했다. 빅토리아는 계속 대화하길 원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왜냐하면,
“이 재미없는 영화가 4탄까지 나오다니….”
나는 리모컨을 조작하거나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터치하면서 기내에서 제공하는 영화, 만화, 뉴스 등을 빠르게 훑었다.
은근슬쩍 궁둥이 붙이고 옆자리에 앉은 빅토리아가 내 모니터를 힐끔거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검색은 비행기 타면 누구나 하잖아?
“4탄이 나온 줄 몰랐나요? 굉장히 유명한 영화인데.”
빅토리아가 불쑥 참견했다.
“사람이 모를 수도 있지. 너는 여태까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일일이 세면서 살아?”
“비유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덧없다는 점에선 똑같아.”
잃어버린 1년 반이란 시간이 너무나 뼈아팠다.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내가 납치된 1년 반 동안 출시된 영화와 드라마, 만화, 소설 등이 엄청나게 쌓였다는 뜻이다.
그것만 붙잡고 있어도 한동안은 심심하지 않을 터. 그렇게 생각하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덧 우리는 지구의 태평양 한복판에 있었다.
“흐음….”
비행기 경로를 확인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는 이 수직이착륙기가 내 고향 대한민국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기에 얌전히 탑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슬 그 방향이 틀어지려 했다.
여기서 그냥 뛰어내릴까?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하늘에서 용(龍)을 잡고 곧잘 스카이다이빙 했었던 내게는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때, 빅토리아가 귀신같이 눈치채며 말했다.
“강한수 씨.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세요. 목적지에 거의 다 왔어요.”
“거의?”
하와이 열도(列島)로 가려는 걸까?
빅토리아가 시키지도 않은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외계인들의 주력인 발키리는 비행과 수영 능력이 없거든요. 그래서 공습도 육지에만 치중되어 있어요. 여기서 착안한 대책이 해상군수시설이에요. 바다 위에서 안전하게 무기를 생산한다는 계획이죠. 현재까진 꽤 성공적이에요. 우리가 지금 가려는 해상도시는 제가 총괄이사장으로 있는 태평양 제3 군사기지예요. 위성 레이더와 스텔스 기능이 탑재된 이 수직이착륙기도 거기서 생산됐죠.”
“...잘 만들었네.”
나는 대충 맞장구쳐줬다.
내심은 “이년이 뭔 소리래?”라는 심정이었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판타지 용어들이랑 너무 달랐던 탓이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빅토리아의 설명은 이 와중에도 계속됐다.
“과학과 마법을 결합한 건축기술은 상상을 초월해요. 고작 1년 만에 태평양에 셋, 대서양에 둘, 인도양에 하나로 총 여섯 해상도시를 건설했으니까요.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 계속 늘려간다는 계획이에요. 국민을 버리고 바다로 도망쳤다는 비난을 사는 정치인과 재벌 일가가 이곳에서 생활 중이지만, 그들이 내는 세금으로 공장을 돌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래서 언제 도착한다는- 숙여!”
번쩍!
푸른색 섬광이 내 시야를 삼켰다.
하지만 나도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건 아니었다.
성검2를 소환해서 그 기습을 막고, 반으로 쪼개진 수직이착륙기를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섬광.
뚜렷한 비행능력이 없는 나로선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꼭 본인이 날라는 법은 없었다.
“찰떡.”
“네!”
신기루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소환된 성녀H가 등 뒤에서 내 허리를 양팔로 꽉 껴안았다. 그리고 3쌍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펄럭! 펄럭! 펄럭!
날아든 섬광은 피할 것도 없이 성검2로 쳐냈다.
그런데도 성녀H를 소환한 이유는 원흉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순 없잖은가?
휘이잉-!
나는 신성과 마기를 섞어서 회오리를 일으켰다.
내 몸을 껴안은 성녀H는 3쌍의 날개를 펼친 채 가만히 있고, 내가 이 인공적인 바람으로 비행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성녀H의 역할은 행글라이더.
여기에 바람의 축복으로 안정화까지 꾀했다.
“바다가 안전하긴 개뿔.”
내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마술사 여자, 빅토리아의 안위 따위는 관심 없었다.
내 시선은 구름 저편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낯익은 남자였다.
등에 날개 같은 건 달리지 않았지만, 발밑에 인공적으로 발생시킨 잿빛 회오리를 수상스키처럼 밟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그쪽도 나를 단번에 알아봤다.
“너는-”
“네놈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거의 동시에 외쳤다.
“그때 도망친 늙은 왕자…!”
“수련의 동굴에서 마주쳤던 비겁한 용사- 잠깐! 어째서 내가 늙었다는 거냐!”
그걸 말이라고 해?
▷종족: 올드 휴먼
▷레벨: 999+
▷직업: 왕자(국력=기력↑)
▷스킬: 기력Z 침투Z 검술MAX 마기MAX 내성SSS…
▷상태: 억울, 마검
6회차 수련의 동굴에서 저 늙은 왕자를 놓치고 말았었다. 그게 못내 아쉽고 찜찜했었는데, 지구에서 이렇게 다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았지?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용케도 날 찾았네. 스토커? 아니면 설마…?”
“끔찍한 상상하지 마라! 나는 네놈의 갈무리되지 않은 용사의 힘에 이끌렸을 뿐이다!”
용사의 힘이란 게, 블랙박스를 뜻하는 걸까?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2차전을 해볼까?”
“하!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하구나!”
이날, 태평양의 해상도시들은 초유의 위기를 맞이했다.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