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회차] 거짓된 힘
늙은 왕자의 스킬 구성은 대단히 탄탄했다.
초월영역은 둘이었지만, 일반영역 최대치 MAX와 SSS급에 도달한 스킬이 매우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불리한 건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초월영역에 접어든 스킬이 셋인 내가, 둘밖에 없는 왕자에게 질 이유는 없었다. 초월영역은 단순히 효과 하나가 늘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자극한다.
그 무언가가 정확히 뭔지는 나도 모르지만!
교생 아가씨가 말했던 것처럼 소유자의 존재 방식에 영향을 준다.
쉽게 말해, 초월영역 Z등급 효과는 일반영역 스킬보다 압도적인 고효율을 자랑한다.
때로는 일반영역 효과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그것이 Z등급에 도달한 스킬이었다.
“분명히 그럴 텐데…?”
나는 확실하게 밀리고 있었다.
무기끼리 맞닿은 첫 접전에서부터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신성과 마기를 두른 성검2를 잽싸게 회피한 늙은 왕자가 소환한 푸른색 광선검이 내 가슴을 긁고 지나갔다.
틱-
살짝 스친 수준이었다.
신성으로 보호받기도 했지만,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으로 강화의 강화를 거쳐서 고밀도로 압축한 내 피부를 뚫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첫수만에 당했다는 건 틀림없었다.
“신세대 용사여. 어설프지 않은가?”
“닥쳐!”
기교에서 밀릴 건 처음부터 예상했었다.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나는 야만적인 세계에서 17년- 실질적으로 11년쯤 굴렀다. 그 이전에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반면, 늙은 왕자는 못 해도 수백 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전투에 몸을 맡겨왔다.
거기서 오는 실력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6회차 수련의 동굴에서도 그 때문에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었다. 신성Z 덕분에 일반공격 면역으로 이길 수 있었지만, 순수한 실력에선 내가 몇 수 아래였다.
하지만 스킬에선 내가 우위였다.
파앗!
Z등급의 축복을 몸에 둘렀다. 그 위에 축복을 한 겹 더 씌웠다. 여기에 성검2의 증폭으로 축복 효과를 더욱 강화했다.
준비 끝.
그리고 움직였다.
“헉?!”
내 움직임을 한순간 놓친 늙은 왕자가 헛바람을 들이켜는 게 보였다.
“느리면 그 잘난 실력도 쓸모없잖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성검2를 내리찍듯 수직으로 빠르게 휘둘렀다.
그러나 늙은 왕자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상대적으로 느린 몸을 억지로 비틀면서 옆으로 피해냈다.
촤아아-
허공만을 가른 흑백의 회오리가 태평양의 깊디깊은 심해까지 수직으로 쫙 가르고 지나갔다.
그 직후,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스킬이 아깝군.”
내 비아냥을 맞받아친 늙은 왕자가 광선검을 쥔 오른손 손목을 까딱거렸다.
그 가벼운 동작에도 SSS등급에 도달한 검술의 묘리가 담겨 있었기에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푸른색 광선검이 내 목을 찔러왔다.
위력 자체는 위협적이었지만, 느리면 아무 소용없다.
펑!
나는 늙은 왕자의 반격을 무시한 채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하지만 금강석처럼 단단한 몸은 꿈쩍하지 않았다.
흔들린 건 그 주변이었다.
푸화아앙-
대기를 일그러트릴 만큼 강력한 충격파가 태평양 전역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만큼 강력한 발차기였거늘!
“비겁한 왕자 새끼! 나이만큼 레벨도 미쳤네!”
스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승산을 점치지 못한 원인을 눈치챈 내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이가 아닌 노력의 산물이란 것이다!”
나이에 민감하게 반응한 왕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상당히 빨랐다.
그러나 내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깡통! 칼!”
“성검이에요!”
“닥쳐!”
잽싸게 골렘D를 소환한 나는 성검3를 빼앗듯 왼손에 쥐었다. 이것으로 양손에 성검 한 자루씩 쥐게 됐다.
“그건…!”
성검3를 알아보고 살짝 놀라는 늙은 왕자.
나는 왕자의 푸른색 광선검을 왼손의 성검3로 막고, 오른손의 성검2로 허리를 가로로 예쁘게 베어줬다.
촤아악-
손맛이 제법 좋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하핫! 좋구나!”
쌍검(雙劍)은 호불호(好不好)가 심하게 갈리는 무기다.
한 자루보다 두 자루가 2배로 좋지 않으냐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게 이론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양손에 스마트폰을 하나씩 쥐고 애인A, 애인B랑 따로따로 채팅한다고 상상해보자.
잘만 이용하면 애인A와 애인B의 호감을 동시에 올리면서 꿈의 멀티플레이도 가능해지지만,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쌍검이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가 하면?
쌍검F→쌍검E
초심자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갈 마음도 없을뿐더러, 단순히 속도와 힘으로 찍어누를 생각이기 때문이다.
“크윽…!”
피투성이의 옷이 너덜너덜해진 늙은 왕자가 폭풍에 휘감긴 먹구름 뒤편으로 쭉 물러선다.
“안 놓친다!”
나는 거리를 주지 않고 계속 추적했다.
왕자의 손가락 한두 개라도 잘랐으면 참 좋았겠지만, 무기가 시원찮아서 살을 베고 뼈가 좀 드러나게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러나 내게 승기가 넘어왔음은 틀림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왕자랑 시선이 마주쳤다.
이렇게 열세인 상황에서도 저만큼 평온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왕자의 정신력이 살짝 놀라웠다.
그가 낮은 어조로 선언했다.
“...조금은 인정해주마, 비겁한 용사여. 지금부터는 전사가 아닌 왕자로서 상대해주겠다.”
“하! 인제 와서 허세를 부려도…. 헉?!”
내 속도를 못 쫓아가던 늙은 왕자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리고 압도해버렸다.
빠직-!
왕자가 기습적으로 휘두른 푸른색 광선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은 성검3의 칼날에 자잘한 균열이 생겼다.
내 머릿속에 붉은색 경종이 울렸다.
전사가 아닌 왕자로서 싸워주겠다고 선언 직후부터 속도만 빨라진 게 아니었다. 능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대체 무슨 일이…. 아!”
나는 늙은 왕자의 직업을 떠올렸다.
▷직업: 왕자(국력=기력↑)
왕자가 소속된 나라의 국력이 강할수록 기력 스킬이 강화된다. 하지만 그 효과가 이토록 극단적인 경우는 진정 처음 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왕국이길래?
늙은 왕자가 치트키 쓴 게이머 같은 어조로 말했다.
“용사여. 영광으로 알아라. 그 위력이 너무 대단한 탓에 봉인해둔 직업 특전을 해제한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으니.”
“아, 그러셔.”
치트키라면 나도 하나 있다.
성검3와 성녀H의 소환을 해제하고 스킬 ‘무한’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아낌없이 힘을 쥐어짰다.
신성, 마기, 패기, 투기, 기력, 검기, 마력….
자원계통 스킬은 많았다. 이것들을 직렬이 아닌 병렬 방식으로 한꺼번에 소모했다.
휘이이잉~!
그 기운을 몽땅 담은 성검2가 삐꺽거렸다.
일전에 집사 악마가 Z급 저주로 성검을 파괴했었다. 힘이 분할되어 약해진 성검이었던 탓이다.
그 제약과 한계는 성검2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너무 많은 힘을 주입한 성검2도 한계치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끼다가 똥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네놈의 고향별이 아니었나?”
늙은 왕자가 당황하며 묻는다.
“내가 없는 지구 따위 알 바냐!”
우리의 주전장이 된 태평양은 이미 지옥을 방불케 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태풍과 회오리는 기본이고, 여기저기 물보라가 치솟으며 물기둥을 형성했다.
높은 해일이 사방으로 파도처럼 뻗어 나가면 모든 걸 청소하듯 쓸어버렸다.
쿠구구구-!
심연에서 잠들어있던 해저화산도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운 늙은 왕자가 나랑 거리를 벌리면서 자세를 잡았다.
내가 힘을 모을 시간을 주겠다는 건가? 아니면 본인도 힘을 모아서 맞불을 놓겠다는 걸까?
뭐가 됐든 사양하지 않겠다.
성녀H의 소환을 풀면서 날개를 잃었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바다로 내가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늙은 왕자의 비행기술을 모방했다.
신성과 마기를 충돌시켜서 일으킨 회색빛 회오리로 로켓 같은 추진력을 얻었다.
그 상태로 쏘아져 날아갔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끈다면 더욱 많은 힘을 모을 수 있을 터. 하지만 성검2가 견디질 못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무얼 하든 담담한 늙은 왕자의 표정이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다.
이럴 때는 속전속결이다.
“뒤져!”
“어설프다고 했다.”
세계의 시간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영향을 전혀 안 받을 것 같았던 내 육체도 차츰 느려지다가 끝내 멈춘 거나 다름없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게 어찌 된 걸까?
나랑 마찬가지로 움직임이 굼떠진 늙은 왕자. 하지만 그는 나처럼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봐. 뭘 한 거지?”
나는 침착한 왕자를 노려보며 질문했다.
“이것이 갈무리된 용사의 힘이다.”
내 질문에 대답하는 왕자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수련의 동굴에 안치된 최초의 용사 동상처럼.
그가 이어서 말했다.
“의심해본 적 없는가? 네놈에게 주어진 스킬과 레벨의 기원이 어디서 왔는지를. 큰 노력 없이 상대를 짓밟을 수 있는 능력치란 시스템을 준 초월적인 존재의 과도한 친절과 혜택. 일단은 즐기고 보자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그 주제를 외면하지 않았는가?”
“......”
나도 쭉 의심해왔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무안해진 늙은 왕자가 입을 다물 것 같았기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입 다물면 절반은 간다고 하잖는가?
예상대로 득의양양해진 늙은 왕자가 계속 떠들었다.
“어리석은 용사여, 똑똑히 들어라. 그 알량한 능력치는 네놈의 것이 아니다. 단숨에 은하계를 파괴할 힘이 있더라도 원래 주인이 회수해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판타지(fantasy). 초월적인 존재에게 빌린 힘에 지나지 않는다.”
“가짜라고?”
“그렇다. 거짓된 능력이지.”
왕자는 판타지 능력치를 ‘허구(虛構)’라고 단언했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 해줬다.
“이봐, 늙은 왕자. 능력치의 레벨과 스킬이 거짓된 힘이라면서 너도 잘만 쓰잖아. 이러면 모순된 거 아니야?”
이 와중에도 우리의 거리는 계속 좁혀지고 있었다. 굼벵이처럼 느리긴 해도 곧 ‘거짓된 힘’끼리 충돌할 것이다.
늙은 왕자가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이 힘은 굉장히 편리하거든. 게임캐릭터처럼 직관적으로 쉽게 강해질 수 있고, 남에게 힘을 이양하는 것도 가능하지. 신세대 용사들은 경험치라고 부르던가? 나도 그래서 애용 중이지. 주로, 마음에 드는 암컷을 발견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고 질릴 때까지 곁에 두는 용도로. 네놈도 같지 않나?”
“아니.”
여자는커녕 동료조차 없다.
“그, 그런가…. 네놈은 정말 이상하군….”
“너야말로.”
남에게 빌린 거짓된 힘이라고 잔뜩 지껄였지만, 결론은 편리하니 계속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왕자가 아니라 양아치 아닐까?
애초에, 그 주인이란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의 힘을 회수할 마음이 있긴 한 걸까? 그리고 전부 회수한다면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상상이 가질 않았다.
파지지지-
슬슬 시간이 다 됐다.
방대한 두 힘이 충돌하기 직전!
그런데도 늙은 왕자는 여유를 잃지 않고 계속 지껄였다.
“사실, 네놈에게 이렇게 주절주절 이야기해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죽는 것보다는, 절대적으로 믿어온 능력치에 배신당했음을 깨닫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변태네.”
“하하! 남의 힘에 의존하면서 기고만장한 것도 지금뿐이다.”
“말 많은 놈은 일찍 퇴장한다는 소리, 못 들어봤냐?”
내 핀잔에도 흔들림 없이 늙은 왕자가 선언했다.
“꿈과 희망에서 깨어나라, 어리석은 용사여!”
번뜩!
늙은 왕자의 두 눈동자에 머물던 보라색 광휘(光輝)가 사방으로 폭사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이 일대를 전부 집어삼켰다.
그 직후,
농담처럼 모든 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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