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81화 (81/430)

 081화

[?회차] 졸업장도 있다구!

“정말로 꿈과 희망이 싹 죽어버렸네.”

나는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능력치가 싹 바뀌면서 더는 공중에 머물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B

▷스킬: 신성Z 마기Z 축복Z

▷상태: 성녀, □□

스킬에 있었던 블랙박스가 어째선지 직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뤘겠지만, 한꺼번에 찾아온 변화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얻은 스킬은 초월영역 빼고 사라졌다. 늘 번잡했던 스킬이 썰렁해졌다.

하지만 있다고 나아질 건 없었다.

1레벨로 떨어지면서 스킬 효율이 최악이었던 탓이다. 막 회귀한 직후의 1레벨보다 더 효율이 나쁜 것 같았다.

Z등급 스킬 효과마저 기대하기 힘들 정도.

상태는 용사 페스티벌에서 얻은 성녀만 남았다.

사라진 성검2와 골렘D는 소환이 안 됐다. 스킬에서 직업으로 옮겨간 블랙박스로 스킬을 불러올 수도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모자이크.

저게 원흉 같았다.

손발이 다 잘린 심정이란 게 이런 걸까?

“...찰떡.”

“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성녀H는 정상적으로 소환됐다.

그녀는 바다로 추락 중인 내 허리를 끌어안은 후, 3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것으로 바다에 빠져 표류할 걱정은 덜었다.

“......”

아까부터 무언가를 놓친 기분인데….

“주인님?”

등에 찰싹 맞닿은 성녀H의 몰랑몰랑한 가슴을 느끼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나.

놓친 그것을 떠올려냈다.

“왕자는 어디…? 헉! 비켜!”

성녀H에게 떨어지라고 명령하기 무섭게, 내 머리 위쪽에서 푸른색 광선검을 역수로 쥔 청년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시야에서 사라진 늙은 왕자였다.

▷종족: 올드 휴먼

▷레벨: 1

▷직업: ■■A

▷스킬: 기력Z 침투Z

▷상태: 마검, □□

그도 능력치는 괴상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판타지아 대륙에서 습득한 성검2를 소환할 수 없었다.

반면에 왕자의 무기는 광선검.

레벨 약화로 신성Z과 마기Z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맨손으로 공상과학의 산물을 막는 건 자살행위였다.

물론,

“사람 얕보지 말라구!”

그렇다고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왕자의 호언장담처럼 판타지 세계에서 얻은 ‘거짓된 힘’이 사라졌지만, 내게는 아직 고향별에서 배운 ‘과학의 힘’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걸 구현해낼 기술도 습득했다.

마스터 몰랑.

그분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은 적 없다.

우선은 생각할 시간을 벌기로 했다.

뇌의 기능을 활성화해주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 도파민(dopamine), 옥시토신(oxytocin)을 활화산처럼 분출시켰다.

공포, 행복, 두려움, 흥분, 성욕….

온갖 감정이 뒤섞이며 미쳐가는 기분이었다.

“큭…!”

하지만 호르몬의 부작용만큼 효과도 확실했다.

세상이 느려진다.

정말로 세상이 느려진 건 아니다.

일반인보다 수십 배로 빠르게 계산하고 생각하면서 체감하는 시간이 느려진 것뿐.

그걸로 충분했다.

“차근차근 해보자구~!”

육체 곳곳에 글리코겐(glycogen)과 지방으로 저장된 열량이 빠르게 소모됐다. 하지만 슬라임의 완전분해체계를 인간의 몸으로 구현해낸 나는 ‘살아있는 원자력발전소’나 다름없었다.

신진대사에 필요한 열량은 넘쳐났다.

판타지의 자원계열 스킬이 없어도 끄떡없었다.

푸른색 광선검이 다가온다.

나는 과감히 왼팔을 기부했다.

파지지직-

광선검에 타들어 가듯 잘린 왼팔의 고통은 엔도르핀(endorphine)이 억제해줬다.

뇌하수체와 시상하부에서 추출된 자연산 진통제가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나를 진정시켰다.

아니, 흥분시켰다.

이 아슬아슬한 상황을 즐기게 해줬다.

죽음의 공포는 만용을 넘어서서 광기로 이어졌다.

“흐읍?! ΡΣΤΥΦΧΨ?!”

팔이 잘리고도 즐겁다는 듯이 웃는 내 얼굴을 본 늙은 왕자가 식겁하며 뭐라고 지껄였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스킬 통역A가 사라지면서 자동번역도 끊긴 탓이었다.

나도 이대로 팔만 주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게임이다.

척수의 가운데 부분에서 뻗어 나오는 교감 신경의 말단과 부신(副腎)에서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이 분비됐다.

심장 박동과 호흡이 빨라지면서 지방으로부터 에너지의 방출이 가속화되고, 향상성과 투쟁심을 키우는 아드레날린(adrenaline)의 분비도 촉진됐다.

절단된 어깨의 출혈도 문제없었다.

골수에서 생성되는 혈소판의 양을 늘렸다. 파손된 혈관 주변의 혈액을 얼마나 빨리 응고시켜서 출혈을 막느냐가 관건.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했다.

지금부터 격하게 운동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너도 한 방!”

지금부터 내 왼팔을 가져간 값을 받아가겠다. 아주 비싸게 계산될 예정이다.

완전히 맞닿는 거리.

날개가 없는 나는 허공에서 피할 수 없었지만, 그건 사이좋게 추락 중인 늙은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른손을 쭉 뻗었다.

텁!

“커엌?!”

목을 붙잡힌 왕자의 눈이 부릅뜬다.

내가 좋아하는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다.

꾸우욱-

단번에 부러트릴 수 있었다면 서로 편했겠지만, 육체계통 스킬이 사라진 현재의 내 악력으로는 다소 부족했다.

아니, 이건 왕자가 잘 버틴다고 해야 하나? 약해진 기력Z가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퍽! 탁탁! 팍!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왕자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가장 위협적인 광선검은?

“앙♥”

쥐지 못하도록 그의 엄지손가락을 요염하게 깨물어줬다. 미약하게나마 신성이 깃든 이빨로.

내가 시커먼 남자 손가락을 입에 넣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 살기 참 힘들다. 그렇지?

“아아아악~?!”

늙은 왕자도 생소한 경험에 식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충격과 공포를 공유했다.

가장 위협적인 광선검이 왕자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는 끝까지 쥐고 싶었겠지만, 중요한 엄지손가락을 잃어서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퉤!”

나는 사탕처럼 입안에 문 남자의 엄지손가락을 요염하게 뱉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늙은 왕자도 공감하는 듯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그는 호흡곤란증세마저 보였다.

“후후후! 이런 부끄럼쟁이 같으니- 어이쿠!”

퍽! 퍽! 퍽!

늙은 왕자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후려치려 했다.

그래서 나도 보답해줬다.

그의 두툼한 목을 붙잡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왼쪽 무릎은 역으로 치켜들었다.

빠각!

두개골이 뒤흔드는 듯한 맑은 울림이 들려왔다.

음색이 좋으니 한 번 더 듣자.

빠각!

너무 좋은 것 같다! 두 번만 더 듣자! 앙코르!

빠각-!

“아우으으….”

코흘리개 어린애처럼 칠칠치 못하게 앞니를 몽땅 잃어버린 늙은 왕자의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토닥토닥.

이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그의 두 팔이 앙탈을 부리듯 내 몸을 두드렸지만, 그다지 힘이 실려 있진 않았다.

그 상태로 우리는 계속 추락했다.

이윽고,

풍덩!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태평양 한복판에 빠졌다.

그래도 나는 왕자의 목을 놓지 않았다.

“우리, 아주 끝장을 보자!”

“보글보글?!”

지구의 오염된 바닷물을 한껏 들이켠 왕자가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내 우세는 변함없었다.

물론, 왕자도 만만치 않았다.

주르륵….

그는 내 왼쪽 어깨의 절단면을 손가락으로 쑤셔서 상처를 벌리는 식으로 대응해왔다.

침투Z의 효과를 살려서!

악랄한 수법이긴 해도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아무리 내 신체 능력이 우수해도, 생체활동에 꼭 필요한 피가 부족해지면 빈혈 증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과학에 취약하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에 충실한 학문인 탓이다. 판타지 마법처럼 근성과 열혈로 한계를 초월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내 승리도 당연한 결과지.”

여긴 바다이기 때문이다.

입만 벌리면 마실 수 있는 바닷물에는 충분한 염분과 미네랄이 녹아있다. 부족해진 피를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반면에 늙은 왕자는?

“부글부글?!”

핏줄마저 돋아난 그의 목은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호흡은 끊긴 지 오래.

우리는 해류에 휩쓸린 채 바닷속에 잠겼다. 헤엄쳐서 해수면으로 올라올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서로가 용납하지 않았다.

내 어깨의 상처를 헤집는 건 승산이 별로 없음을 뒤늦게 깨달은 왕자도 목을 노렸다.

꾸우욱.

그는 양손으로 조였다.

하지만 두 손의 힘을 합쳤음에도 내 한 손보다 약했다.

“......”

“......”

바닷속에서 시선이 마주친 우리의 희비(喜悲)가 갈렸다.

스킬 통역A가 해제되면서 대화는 불가능했지만, 엄지손가락을 나눌 만큼 깊은 교감을 한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남자끼리….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늙은 왕자야. 포기하면 편해.’

‘네놈의 이건 대체 무슨 힘이냐!’

‘말해줘도 모를걸?’

마스터 몰랑이라고 들어봤니?

‘이런 죽음, 이런 패배. 인정할 수 없다….’

‘안 하면 어쩔 건데? 음?’

거기까지 눈빛으로 대화했을 때였다.

허전하게 변했던 내 능력치가 서서히 돌아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영구적이 아닌 일시적인 효과였나?

모든 전자기기를 무력화시키는 전자기펄스(EMP)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꿈틀.

목이 덜렁거리면서 다 죽어가던 왕자도 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하지만 내 우위는 여전했다.

이대로 끝장내주마.

그때, 우리가 잠수해있는 바다를 꿰뚫는 공격이 있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이제 막 능력치를 회복 중인 내게는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른팔마저 잃을 순 없었다.

“쳇.”

“커억-?!”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듯 바다째 함께 베어버리는 푸른색 검기(劍氣)가 닿기 직전, 나는 왕자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촤아악-!

그리고 코앞에서 검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게슴츠레 뜬 나는 원흉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찾을 것도 없었다.

“왕자님! 저희도 도울게요!”

“소녀도 가세하겠습니다, 주인님.”

“저의 검은 당신 것이에요.”

요란하게 몰려오는 여자들이 보였다.

“오지 마! 이놈은 진짜다!”

늙은 왕자가 그녀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여태 목이 붙잡혀 있었던 탓에 그의 목소리에는 힘에 실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늦었다.

“네? 진짜요…?”

“안녕, 아가씨?”

하늘 높이 도약한 나는 능력치가 부활하며 돌아온 성검2를 재소환했다.

소환한 이유야 뭐….

“꺅-?!”

촤아악-

배꼽을 훤히 드러낸 아가씨의 허리를 예쁘게 베어줬다. 몸매 관리를 평소에 잘했는지 잘린 허리도 예뻤다.

그리고 분홍색 창자를 쏟아내며 추락하려는 하반신을 걷어찼다.

“자, 선물.”

옆의 다른 아가씨에게로.

“미친?!”

“동료의 반쪽보고 미쳤다니, 너무하네. 이건 벌칙.”

“꺄으읔….”

성검2에 목이 꿰뚫린 여자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마도 죽었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촤아악-

꽃단장한 머리통부터 조잡한 천 한 장으로 가린 사타구니까지 세로로 몸을 베어줬다.

좌우 대칭으로 예쁘게 베어주려고 했는데, 왼팔을 잃으며 몸의 무게중심이 흐트러져서 실패했다.

미안해! 다음에는 더 잘할게!

“언니-?!”

“이, 이놈이!”

“히이익?!”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아가씨들이 아연실색한다. 아!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들인가? 아무렴 어때.

잠시 후면 그런 구분이 무의미해질 텐데.

나를 방해한 대가는 매우 비싸다.

뒤늦게 맹렬한 기세로 접근해오는 왕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거의 횡설수설 수준이다.

“후퇴! 빨리 도망쳐…! 전부 어서! 저놈은 진짜다! 판타지에 심취한 용사 같은 게 아니야…!”

용사가 아니라니?

아무리 적이라도 말을 너무 심하게 하네.

“나는 A급 용사야! 졸업장도 있다구! 거기, 훌라후프 잘 돌리게 생긴 아가씨. 말해봐. 내가 뭐로 보여?”

“마, 마왕…?”

“거짓말하면 엉덩이에 칼침을…. 음? 이건 누가 붙인 거지?”

펄럭펄럭.

내 등판에 처음 보는 날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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