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회차] 이 골렘은 설마...?
사악한 외계인 여자가 뭐라고 하든, 나는 결백했지만, 그래도 선동당하는 어리석은 지구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태평양판을 통째로 흔들었던 이번 자연재해는 외계인들의 부부싸움으로 벌어진 2차 피해였다.
나하고는 전혀 연관이 없다.
“...강한수 씨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뭘 몰라? 순도 100% 정의의 화신이지.”
관련은 없지만, 음모의 냄새가 진동했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A급 용사님으로서 어찌 간과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로 했다.
“흐음~ 수상한데….”
“자! 얼른 가자!”
나는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빅토리아랑 선장실로 이동했다.
*
몸수색하면서 홀딱 벗기고, 팔다리를 고정한 고문 의자에 앉혀져 있을 줄 알았던 외계인 여자는….
깨끗한 침상 위에서 이불을 덮은 채 편안히 누워있었다.
그 안일하면서도 허술한 대처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주위에서 수긍하는 분위기였기에 잠자코 넘어갔다.
우선, 얼굴부터 확인했다.
...아가씨D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아가씨C 같기도 하다.
꼼꼼하게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일단 찌르고 봤기에,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았다.
아무튼, 아가씨G는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어디, 능력치를 볼까?
▷종족: 머메이드
▷레벨: 857
▷직업: 요술사(축복=사령↑)
▷스킬: 노래S 사령S 불사A 축복A 통역A…
▷상태: 부활, 불안, 영령, 탈진, 골렘
늙은 왕자의 하렘을 철저하게 제거한 줄 알았는데, 이 아가씨는 되살아날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종족부터 일단 인어(人魚).
무력한 상태로 태평양에 빠지더라도 익사할 걱정은 없었다.
직업은 시체와 망자 조작에 특화된 요술사. 여기에 A등급 스킬 불사가 떡하니 있었다. 아예 작정하고 안 죽겠다는 구성이었다.
만약, 능력치를 봤다면 확실하게 두 번 죽여줬을 텐데….
“이분은 상태가 복잡하네요….”
나처럼 외계인 여자의 능력치를 본 빅토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보다 먼저 와있던 남자가 답했다.
“이 인근에서 큰 싸움을 벌였다가 한 번 죽고, 간신히 스킬로 부활했다고 짐작 중입니다. 보시다시피 잘 돌봐주고 있지만, 우리를 경계해서 말을 안 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는 그는 이 유람선의 선장이 아니었다.
배의 호위를 맡은 용사.
현재에 이르러선 용사보다 ‘초능력을 가진 용병’에 가까웠다. 이 공식은 판타지아 대륙의 용사랑 비슷했다.
마왕 없는 세상에 용사는 필요 없으니까.
아무리 강한 힘이 있더라도 쓸 곳이 없으면 범죄, 혹은 그 범죄를 막는 경호원밖에 할 게 없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 돈 받고 하는 일인걸요.”
용사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그래도 꽤 나은 편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 쓰는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용병이 아닌, 돈 많은 빅토리아에게 고용된 정규직원이기 때문이다.
꽤 질서가 잡혀 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사회생활을 거부한 집단도 있다.
길드(Guild).
할 짓 없는 용사들이 모여서 ‘길드’라는 무력집단을 창설했다.
뭉친 의도는?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기존의 권력자와 정치인들이 통제되지 않는 그들의 힘을 경계한 까닭이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마왕 페도나르를 무찌르고 돌아온 용사들은 총 든 강도보다 위협적이다.
용사들이 작정하고 힘을 발휘하면 증거 하나 안 남기고 재벌이든 대통령이든 다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용사들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지구는 진즉 제2의 판타지아 대륙이 됐을 것이다.
어쩌면 더 심했을지도?
“그러고 보니, 동창 녀석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내가 지구에 온 이후에 수집한 정보도 있지만, 대부분은 판타지아 대륙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A가 알려준 것들이다.
그때는 잘 믿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실제로 용사가 용사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지구가 참 많이 변했음을 실감했다.
빅토리아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저에게 맡기고 모두 물러나 주세요.”
“이사장님. 이자는…?”
용사가 그녀 옆에 있는 내 정체를 물었다.
내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빅토리아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날조하기 시작했다.
“신뢰할 수 있는 동료입니다. 그의 신원은 제가 보장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은 내가 되는데….”
누구 마음대로 동료야? 양심은 어디로?
나는 빅토리아 같은 약한 동료를 둘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부정해버리면 신원확인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수가 있었다. 그러면 굉장히 피곤해지기에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빅토리아가 또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반대로, 나는 굉장히 불편해졌다.
“이사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용사를 포함한 모든 선원이 선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와 빅토리아, 외계인 여자만 남게 됐다.
빅토리아가 침대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빅토리아. 이곳의 책임자입니다. 불안하신 건 이해하지만, 잠시만 대화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외계인 여자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발견했다.
“...안녕? 인어 아가씨.”
“꺄아아아-!”
내 인사를 들은 인어 아가씨가 비명을 질렀다.
쫘작- 쨍그랑!
안 그래도 목청이 좋기로 유명한 인어가 작정하고 소리를 빽빽 지르니, 선장실의 모든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스릉.
나는 망설임 없이 성검2를 소환했다.
이 산증인을 의심 안 사고 자연스럽게 죽일 방법을 계속 고민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란을 일으켜주니 나로선 고마울 따름이다.
이번엔 부활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처리해줄게.
“괜찮아요! 진정해요!”
뚝.
성검2를 휘두르려던 나는 팔을 멈췄다. 우리 사이로 끼어든 빅토리아가 인어 아가씨를 감싼 탓이었다.
탕-!
선장실 문이 열리며 용사가 뛰어 들어왔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그도 인어의 소란을 듣고 놀란 듯했다.
“사장님! 괜찮으- 헉! 이 자식!”
용사가 성난 황소처럼 내게 돌격해왔다.
내가 성검2로 빅토리아를 겨누고 있었던 탓이다. 제삼자가 보면 공격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구도.
빅토리아가 멋대로 중간에 끼어든 탓이었지만, 그걸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죽이긴 좀 그렇고….
살짝 어루만져주기로 했다.
“엑스트라는 빠져.”
“누가 엑스- 꾸에엑?!”
내 옆차기가 용사의 허리에 꽂혔다.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정확하게!
용사의 인체구조와 돌진력의 운동가속도를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계산한 일격이었다.
후유증 없이 허리디스크만 생겼을 것이다.
“선원A. 보고만 있지 말고 치워.”
“네? 네!”
뒤늦게 들어온 선원A가 바닥에 널브러진 용사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용사는 오기를 부리며 선원A의 손을 뿌리쳤다.
“놔! 나 혼자 일어설 수- 크아아아~?!”
호기롭게 일어서던 용사가 허리를 부여잡으면서 도로 고꾸라졌다.
대놓고 기뻐하진 않았지만, 허리디스크가 예쁘게 잘 들어갔음을 확인한 나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저번에 어떤 아가씨에게 실수해서 살짝 걱정했었는데, 내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꼼짝달싹 못 하는 용사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리고 다시 셋만 남게 된 선장실.
“우으으….”
인어 아가씨는 이불로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었다.
또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옆에서 큰언니처럼 달래주는 빅토리아 탓이었다.
“네. 차분히 심호흡하세요. 잘하고 있어요. 강한수 씨도 얼른 무기를 넣어주세요! 하아! 정말…. 그런데, 상태에 성검 표시도 없으면서 어떻게 성검을 소환하신 거죠?”
빅토리아의 추궁에 나는 혀를 찼다.
그리고 블랙박스를 활성화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상황을 빨리 정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빅토리아. 내 눈을 바라봐.”
“네. 제 눈을 보고 이야기해보세요. 그 희한하게 생긴 성검은 대체 어디서 난 거죠?”
번뜩.
나는 대답 대신 빅토리아의 기억을 지웠다. 나랑 만난 이후부터의 기억을 깡그리.
늙은 왕자의 습격으로 비행기가 공중에서 파괴됐다. 그리고 생존자는 그녀와 나뿐.
여기서 빅토리아의 기억을 지우고 기억상실로 꾸민 후, 원흉을 인어 아가씨라고 주장할 계획이다.
그러면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태평양의 진실 또한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힐 것이다.
“빅토리아. 내가 누군지 알아?”
빅토리아의 기억이 예쁘게 지워졌는지 확인해보자.
“강한수 씨.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음?”
“어, 얼굴이 너무 가까워요! 가깝다고요?! 성검 문제는 모른 척할 테니까, 제발 거리를 벌려주세요! 얼른!”
얼굴이 새빨개진 빅토리아가 뒷걸음치며 애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이 지워졌어야 할 빅토리아는 멀쩡했다. 재차 시도해봤지만, 그녀가 나를 까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마술사(기력=마술↑)
▷스킬: 기력SS 마술SS 검술S 면역S 생존A…
▷상태: 흥분, 마검, 혼란, 망각
빅토리아의 레벨이 최하로 떨어졌다.
그녀만이 아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난봉꾼(여자→매혹↑)
▷스킬: 신성Z 마기Z 축복Z 날조SSS 패기SS…
▷상태: 성검, 성녀, 골렘, 망각
나도 레벨이 하락했다.
일전에 늙은 왕자가 썼던 보라색 눈깔처럼 스킬마저 봉인하진 않았지만, 레벨은 그때랑 똑같이 1레벨로 고정됐다.
그리고 내 직업이 난봉꾼으로 변했다.
“이런 미친 능력치를 보았나…!”
지구에서 17년 동안 청렴결백하고 올바르게 살아온 나를 바람둥이 취급하다니!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 17년이나 감금되어 있었던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능력치요? 어…. 어라?! 레벨이?!”
내 말을 주워듣고 고개를 갸웃하던 빅토리아도 본인의 능력치를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도 나는 그나마 나았다. 직업이 ‘난봉꾼’으로 바뀐 건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원상복구 될 거란 걸 알기에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내가 어째서 바람둥이로 분류된 건데?!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용사의 힘….”
이불 속에서 코 위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인어 아가씨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이 인어 아가씨가 특별한 게 아니다. 내가 태평양에서 죽인 외계인들이 보편적으로 아는 정보일 확률이 높았다.
그들에게는 상식.
하지만 우리에게는 미지(未知).
그래서 일단은 죽이는 걸 보류하기로 했다.
“인어 아가씨. 아가미 닫고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빠릿빠릿 대답하면, 고통 없이 빨리 죽여줄게.”
물론, 살려둘 마음은 없었다.
지구의 태평양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는 외계인의 부부싸움 탓으로 알려져야 한다.
빅토리아가 옆에서 딴죽을 걸었다.
“강한수 씨! 그렇게 협박하면 누가 대답하겠어요!”
“네.”
“긍정했어?! 이봐요! 소중한 목숨을 쉽게 포기하지 마요! 당신이 대뜸 긍정하면 제가 이상해지잖아요!”
“어차피 죽을 거면 편안히 죽고 싶어요….”
인어 아가씨가 오들오들 떨면서 바람직한 판단을 내렸다. 멍청한 물고기 대가리치고 제법이잖아?
“안 죽일 테니 걱정하지 마요.”
빅토리아가 약을 팔기 시작했다.
정의로운 용사인 나는 손해를 보더라도 거짓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살려준다고 인어 아가씨를 안심시킨 후에 정보를 싹 뽑아내고 처리하려는 듯했다.
정말 무서운 여자다.
“저, 정말인가요? 저 무서운 수컷도?”
“물론이에요. 완벽하게 무장해제하고 협조해준다면요. 우선, 당신의 골렘을 소환해서 저 구석으로 이동시켜주세요.”
처리하기 쉽도록 무장해제도 요구했다.
“네.”
멍청한 인어 아가씨는 음흉한 빅토리아의 말을 믿고 순순히 자신의 골렘을 소환했다.
탈진 상태에 빠진 그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자 방패를 스스로 포기한 셈.
뿅.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여성형 골렘이 소환됐다.
그것은 외계인들의 주력인 발키리였는데, 개인소유인 만큼 양산형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그런데 능력치가 좀 이상했다.
▷종족: 올드 골렘
▷레벨: 1
▷직업: 왕자(국력=기력↑)
▷스킬: 기력Z 침투Z 매력S 빨래A 안마A…
▷상태: 빙의, 탈진, 망각, 절망, 체념
생긴 건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성형인데, 직업이 ‘왕자’였다. 그리고 스킬 구성도 굉장히 수상했다.
나는 구석으로 이동하는 골렘을 빤히 쳐다봤다.
골렘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너, 설마…?”
“...저는 가정용 골렘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패자부활전은 아닌데, 아무튼 재회했다.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