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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88화 (88/430)

 088화

[?회차] 천적

그 요정 용사는 보디빌더처럼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요정답지 않게 상체가 역삼각형으로 발달해 있었다.

강인한 표범을 연상시킨달까.

복장 또한 검은색으로 된 롱코트를 기반으로 용병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검까지….

능력치의 직업을 빼고 보더라도 “얘는 용사다!”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자였다. 그것도 겉멋만 든 지구 출신이 아닌, 복장이 통일되고 단조로운 전형적인 판타지 토박이 용사.

하지만 이 요정은 평범한 야만인이 아니다.

꿈과 희망 같은 미지근한 잠꼬대를 일삼는 요즘 용사랑 달리,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진짜배기였다.

그 요정 용사가 말했다.

“너는…. 페도나르가 아니군.”

나를 마왕으로 오해하는 용사가 정말로 있었다. 마기를 이렇게 뿌리고 다니니, 잘못 인식해도 어쩔 수 없으려나?

상대는 검술 ZZ등급의 용사.

몸이라도 약하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맷집이 Z등급이었다. 저건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해도 안 죽을 것 같았다.

“그러는 넌 누군데?”

“곧 죽을 자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뚜렷했다.

“나는 네 말대로 마왕 페도나르가 아닌데?”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는 판타지 세계에 봉인된 마왕이 현실로 넘어오면 처단하는 의무를 맡은 몸. 그러기 위해 레벨을 고정하고 스킬만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늘 의문이었다. 이런 육성방식으로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를….”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100번 싸워서 100번 이길 능력치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이야기해줄 순 없었다.

아니, 그럴 틈도 없었다.

팟.

요정 용사가 땅을 박차며 접근해온 탓이다.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아! 미친…!”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0레벨로 하락하면서 신체가 전반적으로 둔해졌다.

그렇다고 요정 용사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지만, 접근을 허용한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내 준비가 헛되지 않았는지를 시험해보겠다. 새로운 마왕이여.”

“까불지 마!”

나는 부러져서 거추장스러워진 성검2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리고 광선검으로 대응했다.

보라색 광채로 빛나는 그것을 본 요정 용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최신형 마검. 어떤 고귀한 분을 살해하고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검 뉴클리온의 주인인 내게는 안 통한다.”

파지지직-

두 검이 충돌하자마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리고 스킬의 향연이 시작됐다.

대치 중이던 성검 뉴클리온이 신묘한 움직임으로 이동하더니, 어느새 내 복부 깊숙이 파고들려 했다.

저것은 성검의 특수능력 같은 게 아니다.

검술이 초월영역 ZZ등급에 도달할 만큼 단련한 요정 용사의 순수한 기량. 그건 이미 상식과 규칙을 벗어난 무언가였다.

그러나 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초월영역은 저 요정 용사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끌어올린 신성으로 복부를 방어했다. 그러면서 손에 쥔 광선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무모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섬세한 기교로 승부를 봐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촤악! 촤악!

우리는 끝까지 피하지 않았다.

먼저 움츠러들고 회피하는 쪽의 피해가 더 클 거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도 했지만, 우리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그러했다.

“맷집이 그냥 오른 게 아니군….”

요정 용사의 맷집Z는 장식품이 아니었다. 고통과 부상에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할 강단이 없으면 얻기 힘들다.

“누님들에게 맞으면서 컸거든.”

말하면서 빙그레 웃는 요정 용사. 어째선지 그 미소가 처량하게 보인다고 느낀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일검(一劍)을 교환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촤아악-!

신성으로 보호받고 있는 내 복부를 성검 뉴클리온이 가로로 베면서 지나갔다.

반면에 내 광선검은 요정 용사의 어깨를 살짝 긁고 끝났다. 착용한 갑옷이 상당히 튼튼했던 탓이다.

“뭐냐, 이 반칙은.”

“마왕을 상대로 맨몸일 줄 알았나?”

나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다. 상대는 마왕 토벌을 전문적으로 하는 용사였다. 사랑과 우정 같은 불안정한 힘이 아닌, 자신의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능력치보다는 외적인 요소로.

그래서 그의 갑옷은 매우 잘 만들어져 있었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통용되는 깡통 같은 갑옷이 아니었다. 근미래 공상과학에나 나올 법한 전투복이었다.

굉장히 튼튼하면서도 유연했다.

아차!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큭…!”

복부를 깊게 베인 나는 뒤로 물러났다. 신성으로 막았지만, 요정 용사가 보유한 성검이 내포한 신성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요정 용사는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놀랍군. 조금 전의 일격으로 허리가 양단될 줄 알았는데, 초월영역의 신성을 보유한 마왕이라니…. 그래서 신성에 당한 상처도 쉽게 치유할 수 있었던 건가? 정말 기가 막히는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스르륵.

성검 뉴클리온으로 벌어진 상처가 조금씩 좁혀졌다. 거칠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자꾸 터지려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재생력이 우수했기에 덧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전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열세는 계속됐다.

태생적으로 비실비실한 요정이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해서 약점을 보완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판타지아 대륙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갑옷이 튼튼해질수록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요정 종족의 장점인 민첩성을 살릴 수 없게 됐다.

그런데 과학의 힘은 굉장했다.

물론, 이것도 내가 100레벨로 떨어진 탓이다. 만약에 500레벨만 됐어도 저까짓 갑옷은 있든 없든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종이든 강철판이든 뚫리는 건 똑같으니까.

하지만 100레벨로 하락한 현재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저 갑옷을 뚫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원군을 부르기로 했다.

“보리스!”

어여쁜 가정용 골렘을 소환했다.

“보리스라고…? 그 이름은…. 커억-?!”

요정 용사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보리스에게 얼굴을 걷어차이고는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골렘은 마왕의 페널티에 영향을 안 받은 덕분.

아무리 ZZ등급에 도달한 검술이 있더라도 100레벨이어선 제대로 된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초월영역 스킬을 보유한 999레벨 골렘을 이기기란 무리였다.

하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 한 방에 죽였어야지.”

“왕립중학교 검술선생을 죽이란 말이냐? 내가 비록 이딴 몸이 됐어도 조국에 해가 되는 짓에 가담하진 않는다. 하지만 강한수, 네가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쯤은 도와주마. 하! 존경하는 선생님을 공격해야 할 날이 올 줄이야.”

“공격이 아니라 죽이라고.”

“닥쳐. 이 인정머리 없는 용사야. 먼저 한 약속이 아니었다면, 내 여자들을 죽인 네놈이 여기서 당하도록 놔뒀을 거다.”

“킁!”

나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보리스가 존경하는 검술선생이란다.

내게 앙심을 품은 판타지 신이 보낸 교직원이 아닌, 최초의 용사 쪽에서 마왕을 처리하려고 보낸 자객이란 뜻이었다.

최초의 용사는 마왕 페도나르의 부활을 경계하는 걸까?

뭐든 간에 황당했다.

그때,

“오라! 나의 벗이여!”

요정 용사가 일그러진 투구를 벗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신장 2m의 요정 여성이 출현했다.

양손에 쌍검을 쥔 그녀는 비실비실한 요정답지 않게 가슴이 굴곡진 육감적인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골렘에는 골렘이란 건가? 철저하네!”

이 여자는 요정 용사의 골렘이었다.

마왕의 대갈통을 쪼개려고 아주 단단히 준비했다. 골렘의 능력치에도 유감없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종족: 올드 골렘

▷레벨: 99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쌍검MAX 항마MAX 신성SS 금강S 정화S…

▷상태: 성검, 축복, 강화, 증폭, 과열

위험했다. 그것도 대단히.

보리스가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군. 내 마검을 돌려다오. 그러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겠다. 상대는 검술선생의 옛 연인. 마왕 페도나르의 딸에게 살해된 역사적인 위인이다.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말을 말자.”

가정용으로 전투용 골렘을 상대해야 했다.

그 말을 하고 싶었던 듯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광선검을 옛 주인에게 돌려줬다. 현재로선 나보다 보리스가 더 잘 다루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차하게 도망칠 시간을 벌려고 돌려준 건 아니었다.

“보리스. 저 골렘만 잘 붙잡고 있어.”

“어리석은….”

나는 보리스의 비아냥을 무시하며 마주 도약했다.

신성 없이 순수한 마기를 활성화했다.

마왕이 되면서 마기를 다루는 요령과 이해도가 올라갔다. 그것은 일전에 6회차 마왕이 ‘딸의 남자친구’로 오해하고 선보였던 여러 기술을 체득하는 데 도움이 됐다.

마기로 이루어진 순수한 창을 생성했다.

똑같이 검으로 상대해서는 검술ZZ의 용사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접근법을 바꿨다.

“그런다고 나아질 것 같은가!”

“아니.”

“......”

“그쯤은 나도 알아.”

성검 뉴클리온에 닿은 마기는 쉽게 파괴됐다.

하지만 이쯤은 충분히 예상했다.

나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마기를 방출했다. 스킬 무한 덕분에 마기는 무제한이기에 아낌없이 쥐어짰다.

촤아아아--

그리고 허공에 그냥 흩뿌렸다.

금세 주변은 마기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마기를 쏟아부었다.

그동안 내 몸도 무사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성검에 베이고 찔린 상처로 가득했다.

스르르….

하지만 허공에 뿌려놓은 마기가 내 육체에 흡수되면서 새로운 피와 살을 끊임없이 공급해줬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수준으로.

모든 마(魔)의 정점인 마왕이란 존재는 이처럼 성가신 존재였다.

그렇기에 성검이 필요한 것이다.

“마왕은 마왕이란 건가….”

요정 용사가 이를 갈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나는 순순히 목 내밀 듯 베이기만 한 게 아니다.

악마의 저주.

치명적인 상처가 생길 때마다 요정 용사에게 저주를 걸었다. 마기를 심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나의 승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성검에 의해 차단됐다.

“그 성검. 진짜 성가시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었다.

나는 1회차부터 성검 없이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렸다.

그 결과, 육체에 마기가 침투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어떤 졸업생도 마기에 타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검으로 마왕을 쓰러트린 까닭이다.

그건 다시 말해,

성검 뉴클리온.

이름마저 외워버린 저것만 어떻게 하면 된다.

“신성을 다루는 마왕인 네놈이야말로 성가시다. 이렇게 시간을 끈들 네놈에게 희망은 없다. 그녀가 네 골렘을 부수고 곧 지원을 올 터. 그러면 전부 끝난다.”

친절하게 내 처참한 미래를 가르쳐주는 요정 용사.

“해설 고마워.”

나는 보답으로 마기를 쏘아줬다.

숑! 숑! 숑!

“흥!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봐라, 마왕이여.”

“너의 여자친구도 그렇게 죽었나?”

“네놈…!”

격분한 요정 용사의 성검에 내 마기의 창이 파괴됐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새로운 창을 만들어서 다시 상대할 뿐.

순수한 접근전으로는 내가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편법을 동원했다.

사방에 흩뿌려놓은 마기가 나의 공격수단이 됐다.

마기의 화살, 마기의 사슬, 마기의 갈고리, 마기의 압정, 마기의 안개, 마기의 채찍, 마기의 폭탄, 마기의 방패, 마기의 장벽….

마기는 무엇으로든 변했다.

상황에 맞춰서 걸맞은 수단으로 상대했다.

그 결과, 마기를 다루는 데 익숙해질수록 해볼 만했다. 내가 신성 공격에 면역인 덕분에 가능한 장기전이었다.

하지만,

콰앙-!

비열한 운명은 내게 학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큭! 망할…. 가정용만 아니었다면….”

폐기해야 할 만큼 상태가 좋지 못한 보리스는 그 말만을 남기고 소환이 해제됐다.

적은?

“마왕. 죽인다…!”

가정용 골렘을 해치운 요정 용사의 골렘이 내게 돌진해왔다. 퇴마사답게 모든 마기를 배척하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야말로 악마의 천적!

여기에 999레벨을 초월한 스킬 효율까지 곁들어졌다. 마왕의 페널티를 받는 지금의 나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강자였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 잠깐!

뿅!

나는 성검2를 소환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 가슴을 찔렀다.

부러진 칼날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원래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돼야 했지만, 나하고는 인연 없었다.

“자살…?”

“왜…?”

요정 용사와 골렘이 움찔하며 멈춰섰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

그럴 수밖에.

나도 마기의 이해도가 낮았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6회차 마왕 페도나르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것은….

쏴아아아-!

성검2에 갈라진 내 몸에서 마기가 폭포수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상을 뒤덮었다.

늙은 왕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A

▷스킬: 마기Z 신성Z 축복Z

▷상태: 망각

모든 능력치가 사이좋게 봉인됐다.

“제군들. 정정당당한 2차전을 해볼까?”

지금부터 우리는 불공평한 능력치를 잠시 내려놓고, 정정당당하게 맨몸으로 내장 터지도록 싸울 것이다.

주최자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우드득.

등판에 정의로운 A급 용사의 날개를 생성했다. 비주얼이 좀 그렇지만, 반칙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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