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91화 (91/430)

 091화

[8회차] 이 용사님은 귀엽습니다!

내가 갓난아기로 변했다.

아니, 이건 환생(幻生)했다고 해야 하나?

너무나 황당해서 욕 외에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응애.”

아니, 욕마저 “응애.”로 통일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아니지!

“주인님. 탯줄만 자르고 바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응애.”

“아…. 너무 귀여우신 거 아니에요?”

성녀H가 은하수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요목조목 본다. 싫지는 않은데,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자면 일단 힘이 필요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본능적으로 힘을 자제했었다. 누군가 가르쳐준 건 아니지만, 사용하면 위험해진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이유를 지금은 알았다.

연약한 모태 안에서 이걸 쓰면 확실히….

나뿐만 아니라 모태의 주인마저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젠 떨어져 나왔기에 괜찮았다.

나는 블랙박스를 해방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마기Z 신성Z 축복Z 불사MAX 생존MAX…

▷상태: 성검, 마검

그랬더니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두 스킬이 능력치 앞쪽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그것도 일반영역 최대치인 MAX등급으로.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숙련도가 오른 모양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응애…?”

마왕이라고…?

생각해보니 그랬다.

분명히 나는 폭발에 휩쓸리기 직전까지도 직업이 ‘마왕’이었다. 블랙박스는 그것마저 망각하지 않고 보관해놓은 듯했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Yes’였다.

마왕은 용사만 마주치지 않으면 최고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솨아아아-

내 조그마한 육체에서 솟구쳐나온 시커먼 마기가 가위로 변했다.

마왕의 최대 장점은 ‘모든 마(魔)의 정점’이란 것이다. 악마와 마기를 다루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싹둑.

마기의 가위로 탯줄을 잘랐다.

모태랑 이어진 아름다운 생명줄이 끊어졌다.

펄럭!

나는 등 쪽에 악마의 날개를 소환했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도 생성할 수 있지만, 아직 뼈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기의 몸으로 그랬다간 어딘가 잘못돼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깔끔히 단념했다.

“응애~?!”

“어머나!”

악마의 날개로 조금 날아올랐던 나는 성녀H의 몰랑몰랑한 가슴에 불시착했다.

날자마자 어깨가 뻐근했던 탓이었다.

마왕이 근육통이라니….

어쩔 수 없이 이동은 성녀H에게 의존하기로 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과 팔에 안정된 자세로 안기며 시야가 넓어진 나는, 아래를 힐끔 내려다 봤다.

처음 보는 소녀가 있었다.

새 생명을 낳기에는 너무 미숙한 몸.

설상가상으로, 평소에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했는지 몸마저 바짝 말라 있었다.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태어났다.

미숙아(未熟兒)이긴 해도.

“응애….”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을 낳고 기력이 다한 그녀의 레벨이 너무 낮아서 회복도, 부활도 도울 수 없었어요. 안정적으로 출산만 했어도 죽음까지 가진 않았을 텐데….”

성녀H가 안타까움과 송구함을 담아서 말했다.

나는 딱히 그녀를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회복과 부활은 공짜가 아니다.

레벨과 경험치를 대가로 소모한다.

생전 레벨과 시체의 상태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평균 20레벨 이하의 인간은 죽으면 영원한 안식을 맞이한다.

치유의 축복이나 마법으로 부상을 치유할 때도,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경험치 소모를 줄일 약초를 먼저 복용한다.

판타지아 세계에서 통용되는 등가교환의 법칙.

잘난 성녀라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응애.”

나를 무사히 낳아준 보답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부활은 성녀의 고유능력이 틀림없지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꼭 부활일 필요는 없잖은가?

쏴아아아-

힘없이 축 늘어진 소녀의 몸을 시커먼 마기로 포근하게 감쌌다.

이것은 ‘악마의 왕’만이 할 수 있는 권능.

▷종족: 데몬

▷레벨: 4

▷직업: 노예(경험치 50%)

▷스킬: 마기S 생존E 체력F 인내F

▷상태: 산후, 재생

다른 종족을 악마로 임명(任命)하는 것이다.

소녀는 인간으로서 생명이 다하고, S급 마기를 머금은 순수한 악마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악마의 혜택을 누렸다.

인간이 타락하면서까지 얻으려는 강인한 육체를.

스르륵….

빠르게 부기가 가라앉고 자궁과 질, 외음부가 수축했다. 분만 때 생긴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출산 중 죽음에 이를 만큼 쇠약해졌던 내장기관과 피로가 눈에 띄게 회복되면서 소녀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악마다운 회복력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아…. 내가 살아있어…?”

소녀가 정숙하지 못하게 계속 다리를 벌린 채 자기 몸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성녀H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해요. 몸은 좀 괜찮나요?”

“히프리아 님!”

“우선은 치마라도 걸치세요.”

“그보다 아기는…. 아!”

...나는 풍만한 성녀H에서 소녀의 밋밋한 품으로 이동했다.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정체성 혼란 같은 건 없었다.

이 상황을 판타지 감성으로 가장 근접한 표현을 찾자면, 이 소녀는 젖을 준 유모(乳母)랑 비슷했다.

지금도 젖을 주고 있었다.

“쪽쪽!”

나는 소녀의 아담한 젖꼭지를 성스럽게 빨았다. 온갖 스킬로 무장한 덕분에 공복은 크지 않았지만, 이건 충동적인 본능에 가까웠기에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 입술이 자석처럼 소녀의 젖꼭지에 착 붙는 걸 어쩌라고?

그러면서 성녀H의 브리핑을 들었다.

“대폭발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깨어났을 때는 눈앞의 소녀 뱃속에 주인님이 계신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이죠. 저기, 주인님? 즐거운 식사에 방해되신다면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릴까요?”

“쪽쪽. 응애.”

아니. 듣고 있으니, 계속해.

“네. 그녀는 동맹국의 공주였습니다. 군사원조를 대가로 이웃국의 망나니 왕자랑 정략결혼하고 주인님을 잉태하게 됐는데, 그 나라가 전쟁에서 대패해서 멸망해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망국의 왕자비가 된 그녀도 도망자 신세가 됐습- 주인님? 후후! 편안히 주무세요.”

“응애….”

잘 나오지 않는 젖으로 어찌어찌 배를 채우자마자 수마(睡魔)가 몰려왔다.

아기는 원래 잠이 많은 법이다.

*

아니길 기대했지만, 판타지아 차원으로 또 끌려왔다.

내 원래 육체는 ‘최초의 용사’의 두 번째 안배에 걸려서 완전히 박살 난 것으로 짐작됐다.

그러나 내 영혼은 무사했다.

블랙박스에 당하고, 블랙박스로 살아남은 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본격적으로 마왕의 힘을 활용했다.

내 마기를 주입받은 휘하는 아니지만, 주변에 사는 악마와 악마추종자의 위치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이랑 접촉할 수만 있다면 지배도 어렵지 않을 터.

꼬르륵.

이 블랙홀 같은 위장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어머! 아기님. 배가 고프시군요.”

“응애.”

판타지아 출신답게 유모는 내 이름을 똑바로 발음하질 못했다. 그래서 ‘아기님’으로 타협했다.

문제는, 마기 S급의 강인한 악마가 됐다고 해서, 유모의 빈약한 육체가 바로 바뀌는 건 아니란 점이었다. 어디까지나 새 목숨과 건강을 얻은 것뿐.

제대로 못 먹은 그녀는 젖이 잘 안 나왔다.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주변에 사는 악마와 악마추종자를 검색했다.

마기를 품은 그들은 절대 궁핍하게 살지 않는다. 신성을 품거나 정의로운 영웅들을 피해 음지에서 활동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그들의 원조를 받을 수만 있다면, 내 식사량도 대폭 개선될 것이다.

스르륵-

나는 마기를 뭉쳐서 화살표를 만들었다.

아직 옹알이 외에는 말을 못 하는 탓에 마기를 활용한 것이다.

일명, 마왕 네비게이션이다.

“앗! 아기님. 그 방향은 추격자들이….”

“주인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네, 히프리아 님.”

귀하게 자란 공주님치고는 털털한 성격의 어린 유모는 성녀H를 언니처럼 매우 잘 따랐다. 절대로 의심하는 법이 없고, 시키면 군말 없이 뭐든 했다.

그나저나….

추격자가 있다고?

달그락달그락.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흙먼지 속에서 다수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녀H가 바로 설명했다.

“단시간에 북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킨 신흥제국의 기사와 마법사들이에요. 망명하던 왕족들은 탈출하는 도중에 차례차례 다 죽고, 왕자비였던 그녀만 제 도움으로 지금까지 도망칠 수 있었어요. 한두 번은 어찌어찌 처리했는데….”

“응애.”

구차한 설명은 됐어.

내 판타지 경력이 모태까지 합쳐서 18년 차다.

약간의 설명을 곁들여서 대충 쓱 훑어보기만 해도, 흘러가는 정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스르륵…. 펄럭!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악마의 날개를 형성한 나는 유모의 품에서 빠져나온 후,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대한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명한다. 반역자들은 무릎 꿇고 항복하라! 너희는 완전히 포위됐다. 망국의 왕자비여. 지금이라도 더러운 피가 섞인 아이를 포기한다면, 나의 주군께서 아량을 베푼다고 약속하셨다. 어차피 그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봐야 불행할…. 아이가 어디 갔지?”

“응애!”

여기 있지롱!

푹!

내가 하늘에서 소환한 성검 뉴클리온이 번개처럼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기사의 머리에 박혔다.

현실로 빠져나온 마왕 페도나르를 처치할 목적으로 준비된 ‘진정한 성검’답게, 내 보조 없이도 기사의 높은 레벨과 스킬, 투구 등을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그걸로 끝.

말 많던 기사는 절명했다.

“꺄르르르~♪”

경험치 날로 먹기 성공!

현재 직업이 용사가 아닌 마왕이라서 획득한 경험치 효율은 별로였지만, 이젠 1레벨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가능해졌다.

“아기?!”

“아기다?!”

“아기라고?!”

무리를 이끌던 대장의 죽음에 놀란 주위의 기사와 마법사들. 그들은 원흉이 갓난아기란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고르고 고른 정예임은 틀림없었다.

대응이 빨랐다.

휘이익!

화륵!

병장기와 마법이 내게 날아들었다.

죽은 기사의 머리를 쪼개고 말의 허리까지 절단한 후에 땅에 박힌 성검 뉴클리온.

그 칼자루를 껴안고 있던 나는 팔다리가 짧아서 저 많은 공격을 회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번쩍!

번쩍!

신성한 아기님에게 일반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무효화는 기본 옵션이고, 신성한 반사로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으아악~?!”

“커억?!”

“이, 이게 대체?!”

나를 공격한 기사와 마법사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침착하게 공격을 준비하던 후발주자들도 움찔하며 멈추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황에 빠졌다.

무엇에 당했는가?

그조차도 감을 잡지 못했다.

“응애.”

너희의 마음을 이해해.

우매한 판타지 원주민들이 언제 신성 SS등급 이상의 아기를 봤겠는가? 이런 아기님은 태어나서 처음 볼 것이다.

순도 100% 아기천사도 나보다는 신성이 떨어질 터. 아니, 아예 발끝에도 못 미치지 않을까.

펄럭!

나는 악마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좌우 어깨가 조금 심하게 뻐근하긴 했지만, 레벨이 오른 덕분에 어찌어찌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젖이 고픈걸.

“헉! 악마였던가!”

“후퇴! 후퇴! 폐하께 알려야 한다!”

“미친! 아기가 악마라니!”

내가 악마라고 소문나선 매우 곤란하다.

판타지아 대륙으로 다시 넘어왔다는 얘기는, 또 지긋지긋한 시험이 시작됐다는 뜻이니까.

평판을 위해 목격자를 남겨선 안 된다.

뿅!

무거운 성검 뉴클리온 대신 마검을 소환했다.

나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는 게 여의치 않았지만, 마기로 손가락을 연장하는 식으로 보조해서 대충 해결했다.

위이이잉-!

마검은 광선검이라서 칼날이 금속 대신 빛의 알갱이로 되어있다. 덕분에 아기인 내 몸으로도 가벼워서 드는 데 별 지장 없었다.

이 마검은 유아용 검술 교보재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응애…!”

귀여운 용사님의 경험치가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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