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8회차] 해석이 틀렸어!
어린 아기의 몸은 굉장히 불편했다.
목디스크의 핵심인 탐스러운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움켜쥐고 싶어도, 손이 작아서 대단히 어려웠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이 있으니!
태아(胎兒)일 때부터 이전의 우수한 지구인 육체를 복구하고 있었다.
판타지아 원주민 여인의 자궁에서 태어났음에도, 내가 그녀를 부모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영재F→영재D
평범한 아기는 불가능한 행동을 해낸 탓일까?
나에게 잘 어울리는 스킬을 얻었다.
▷종류: 스킬
▷명칭: 영재
▷등급: D
▷C: 성공률이 약간 증가한다.
▷D: 숙련도가 약간 증가한다.
▷E: 경험치가 약간 증가한다.
▷F: 떡잎부터 비범해진다.
노골적인 성장형의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직업 ‘용사’도 다를 게 없지만, 직업은 하나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다. 용사가 되면 다른 유용한 직업 특전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스킬 ‘영재’는 그냥 덤이다.
태생부터 선을 긋는 스킬.
“응애.”
아주 마음에 드는걸.
“사, 살려-”
서걱!
마지막 추적자까지 말끔히 처리했다.
이 주위를 포위했다고 했으니 분명히 더 있겠지만, 레벨이 쭉쭉 오르는 중인 내 상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광선검도 꽤 쓸만하잖아?
전부 처리했음을 확인한 나는 유모의 품에 착지했다.
피는 내 몸에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것도 일반속성 공격에 포함된 덕분이다.
어깨뿐만이 아니라 허리의 척추까지 땅겼다. 하루빨리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해서 다시 졸업을 목표로···.
“쪽쪽!”
하지만 그전에 식사부터.
아기의 몸으로 격한 운동을 했더니 배가 고파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인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저들의 짐을 뒤져서 식량을 보충하도록 할게요.”
“히프리아 님. 저도 도울게요.”
“아니요. 주인님께서 식사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거기서 대기해주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 부탁합니다. 아차! 그리고 주인님의 식사가 끝나시면 트림하실 수 있도록 등을 부드럽게 문질러주세요. 그래도 안 하시면 가볍게 토닥여보세요.”
“네? 네.”
유모에게 나를 맡긴 성녀H가 능숙하게 잡무를 처리했다.
이런 험한 일은 전혀 할 줄 몰랐던 ‘고귀한 성녀님’이었는데, 내가 안 본 사이에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 같았다.
토닥토닥.
유모가 내 등을 토닥였다.
안마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끄윽~!”
나는 시원하게 트림을 했다.
아기는 소화기관의 발달이 덜 되어있기에 보호자가 수유 중간중간 소화를 도와줘야 한다.
특히, 나처럼 미숙아는 식도가 짧아서 수유 중에 함께 흡입하는 공기가 식도 쪽으로 올라가서 구토와 배앓이를 할 수 있기에 꼭 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걸 성녀H가 어떻게 아는 거지?
급격한 졸음으로 생각하기 귀찮아졌다.
이후에 나는 곤히 잠들었다.
착한 아기님답게 먹었으니 자야지.
*
내 육체는 매우 부실했다.
연약한 갓난아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판타지아 차원이 피자 조각처럼 분할된 세계인 탓이다.
피자 한 판이 정상적인 차원이라면, 판타지아 대륙은 피자 한 조각을 한 판이라고 속여서 파는 식이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원주민과 다음 세대들도 약하다.
생물이란 측면에선 생활에 큰 지장이 없지만, 육체를 구성하는 ‘존재의 밀도’가 지구인보다 터무니없이 옅다.
이러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멈추고 신분증을 제시···.”
“응애.”
“성스러운 아기님. 미천한 저희 영지를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안으로 어서 들어오십시오.”
우선, 정신계통 스킬에 굉장히 취약해진다.
지구에선 영 신통치 않았던 나의 Z급 신성함이, 판타지아 대륙에서는 잘 먹혀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블랙박스의 ‘망각’도 마찬가지.
오는 길에 마주친 목격자들의 기억을 싹 지웠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신흥제국 추격자들의 촘촘한 포위망을 유유히 통과했다.
완벽한 포위망을 짰다고 확신하는 그들은 지금도 시체 주변과 빈터를 샅샅이 뒤지고 있을 것이다.
“아기님은 굉장하시네요.”
“응애.”
나는 유모랑 단둘이서 행동했다.
성녀H와 지팡이가 너무 눈에 띄었던 탓이다.
특히, 아름다운 골렘의 머리통이 박힌 지팡이의 디자인은 한두 명의 기억을 조작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팡이의 예술성 탓에 곤란해질 줄이야!
우리는 어느 영지의 내성(內城)까지 곧장 이동했다.
넓은 영토의 주인인 영주가 사는 성이라면, 추적자들도 함부로 수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는 마기로 만든 화살표로 방향을 끊임없이 가르쳐줬다. 그러면 나를 안은 유모가 그쪽으로 이동했다.
내성의 기사와 경비병, 하녀들은 우리를 막지 않았다. 간혹 내 신성Z에 반항하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망각!
우리는 목적지인 영주의 집무실까지 마찰 없이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냐! 여기는 함부로-!”
“응애.”
꿇어라, B급.
“허걱! 불쾌한 신성에 눈이 어두워진 미천한 종자가 위대하신 절대자의 존안을 깨닫지 못하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나이다! 넓은 아량으로 이 보잘것없는 하인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미중년의 영주가 벌벌 떨면서 바짝 엎드렸다.
목에 찬 마법의 목걸이로 지금까지 B등급 마기를 감쪽같이 감춰왔겠지만, 마왕의 눈마저 속일 순 없다.
▷종족: 휴먼
▷레벨: 582
▷직업: 영주(영토=정치↑)
▷스킬: 정치A 마기B 검술B 사교C 경영C···
▷상태: 공포, 혼란, 복종
악마숭배자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미리 성녀H에게 교육받은 유모가 옹알이밖에 못 하는 나 대신 앞으로 나섰다.
레벨이 낮긴 하지만, 그녀도 일단은 S급 마기를 보유했기에 계급상으로는 영주보다 위였다.
“영주님.”
“말을 낮춰주십시오. 감당하기 힘듭니다.”
“어찌 손님으로서 그럴 수 있겠어요. 우리를 먼 친척이라고 소개해주시고, 신뢰할 수 있는 하녀를 배속해주세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곧장 최고급 침실로 안내됐다.
신뢰할 수 있는 하녀를 붙여달라고 했는데, 영부인이 와서 조금 난처해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지에 조용히 숨어드는 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원래 계획은, 유모의 친가라고 할 수 있는 모국(母國)으로 망명해서 안정적으로 출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는 도중에 추적자들에게 따라잡혀서 남편을 포함한 왕족은 몰살당했고, 붙잡힐 뻔한 그녀는 성녀H에게 구출되어 이처럼 중립국에 표류하게 됐다.
내가 태어난 이상, 이젠 어디라도 상관없지만.
마기에 심취한 자가 지배하는 땅이라면 거기가 어디든 내 영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기님이 씻으실 물을 부탁해요.”
“네, 마님.”
두 하녀가 대답하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신선한 푸른 채소에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도 준비해주세요. 양은 넉넉히, 식사는 이 방에서 할게요. 그리고 아기님이 씻으시는 동안, 환기와 이부자리의 일광소독도 해주세요.”
“준비해놓겠습니다.”
유모는 태생이 공주님답게 남을 부리는 데 능숙했다. 하지만 우리의 처지를 잘 알기에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했다.
잘 먹고 자고 싸고···.
삐쩍 말랐던 유모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빠르게 예전 이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했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이 아닌 악마이기에 가능했다.
잘 나오지 않았던 젖이 풍족해져서 나도 만족스러웠다.
“어머! 아기님은 성장이 빠르시네요.”
덕분에 내 성장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응애!”
앞니가 났다!
*
앞니도 났으니 슬슬 장래를 고민해보자.
판타지아 대륙에서 다시 태어난 내 육체는 매우 부실했다.
그렇기에 이전의 지구인 몸이랑 비슷하거나 같게 튜닝과 리모델링은 필수불가결인데, 이건 지금처럼 덩치가 작은 성장기의 아기 때 미리 기틀을 다져놓지 않으면 굉장히 피곤해진다.
그 원리는 건축이랑 비슷하다.
완공된 300층짜리 초고층빌딩의 개축(改築)보다는, 이제 막 터를 다지고 있는 건물의 설계를 개선하는 편이 시간과 자금 등을 훨씬 덜 소모하는 거랑 같은 이치.
그렇기에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떡잎을 개선하는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하니까.
딱 지금의 유아기만 무사히 마치면 중간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나의 이전 모습, 우수한 지구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쪽쪽!”
오늘도 나는 부지런히 먹고 잤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꼼꼼히 신체를 보완 중이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모유(母乳)에는 아기의 신체적 발육과 생명 활동에 필요한 영양소가 모두 들어있는데, 분유와 우유 등이 따라올 수 없다.
내 목적은 한결같다.
판타지 신(神)과 교직원 일동 타도(打倒)!
나를 이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로 납치한 연놈들에게 크게 한 방 먹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최초의 용사 새끼···!’
17년 만에 간신히 졸업해서 고향별 지구로 귀환한 나는, 고작 이틀 만에 다시 판타지 세계로 끌려왔다.
나를 마왕 페도나르로 오해한 최초의 용사 탓이다.
오해든 실수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러자면 힘을 키워야 했다.
지금보다 훨씬.
똑똑.
영주가 자기 성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지만, 항시 대기 중인 하녀들과 우리는 그걸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상이기 때문이다.
“영주님. 무슨 일이신가요?”
나 대신 유모가 물어봐 줬다.
“탐욕스러운 신흥제국이 마침내 저희 중립국까지 그 송곳니를 내밀었습니다. 아직 공표하진 않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국경이랑 맞닿은 이 영지의 함락은 시간문제이기에 주군께 말씀드리고자 급히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응애···.”
신흥제국이라···.
황금골렘을 조종하는 군신(軍神)이 몸을 담그고 있는 나라다.
원래는 북대륙 구석에 자리한 작은 소국이었지만, 아무런 원조 없이 혼자서 영지를 점령하는 황금골렘의 힘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영토를 확장한다.
시기상으로는 용사력(勇士曆) 7년.
용사가 판타지 세계에 소환된 날로부터 약 7년 뒤에 벌어지는 역사적인 대사건이다.
1회차에서는 내가 그 전쟁을 막았다.
6회차에서는 군신이 크기 전에 밟아줬다.
하지만 지금은?
신흥제국을 막을 용사가 없었다.
여기가 이렇게 유지된다는 건, 나보다 7년 앞서서 소환된 지구인 용사가 판타지아 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뜻.
하지만 그 용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을 뒤에서 부추기는 암흑상회까지 더해지면서, 신흥제국은 천둥벌거숭이처럼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아기님···.”
유모가 나를 꽉 끌어안는다. 또 신흥제국의 추적자들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고 지레짐작한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어두워졌다.
나는 먹음직스럽게 부풀어 오른 유모의 가슴을 작은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외쳤다.
“응애!”
이 귀엽고 정의로운 용사님만 믿으라구!
똑똑.
그때, 누군가 또 문을 노크했다.
이에 살짝 당황한 영주가 표정을 굳히고는 문을 향해 꾸짖듯 진중하게 말했다.
“허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이르지 않았는가! 가냘픈 영애가 아닌 어엿한 기사로 편견 없이 봐달라는 자가 어찌 이리도 경거망동한단 말인가!”
그러자 바로 문밖에서,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영주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 영지 어딘가에 저희 왕국의 정통후계자께서 간악한 신흥제국에 쫓기고 있다는 제보가 잇따르는 중입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전쟁이 코앞인데 느긋하게 사람이나 찾게 생겼는가!”
“실례하겠습니다.”
서걱- 딸각.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통보한 여자가 잠긴 문고리를 칼로 베고 방 안까지 멋대로 들어왔다.
격분한 영주가 허리춤에 찬 칼자루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가 칼을 뽑는 일은 없었다.
“앗?! 당신은 분명···.”
유모가 그 무례한 여자를 알아본 탓이다.
“공주님?!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무단침입한 여자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유모를 보자마자 흉흉한 칼을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굽히며 기사의 예(禮)를 다했다.
유모가 감격한 어조로 질문했다.
“저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공주님. 죄송합니다. 동맹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소신(小臣)이 달려왔어야 했는데, 정략결혼에 희생된 공주님을 외인(外人) 취급하며 반대하는 파벌의 힘이 너무 강해서···.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난 대전에서 왕태자 저하께서 멋대로 탈영하시는 바람에 왕위계승서열이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랬군요. 오라버니가···.”
“공주님. 외람되오나, 안고 계신 아기씨가 혹시···?”
나는 여기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봤다.
흠. 이년을 어디서 봤더라?
“네. 저의 아기님이십니다.”
“아아! 고귀하신 왕손(王孫) 저하를 뵙습니다! 두 왕국의 피를 모두 이은 왕손께서 계시는 한, 그 누구도 공주님을 해코지하지 못 할 겁니다. 수도가 어이없게 함락당하긴 했어도 그 나라의 귀족과 백성들은 아직 건재하기에, 왕족이란 구심점만 갖춰진다면 다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흥제국에서도 공주님을 집요하게 노리는 겁니다.”
...아!
여기사의 능력치를 보고 누구인지 기억났다.
▷종족: 휴먼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검기SS 불굴SS 매력S 내공S 영재A···
▷상태: 환희, 감격, 충성
유모가 내 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명성이 자자한 검희가 옆에 있다면 아기님도 든든하실 거예요. 그렇지요?”
“응애.”
꺼져.
내 1회차 때, 자기 부주의로 알몸을 보여놓고 무고한 용사에게 칼부림한 미친년이었다. 당연히 옆에 둘 생각이 없었다.
검희(劍姬).
판타지아 최강의 여기사.
경계대상 1호.
나는 표정을 굳히며 유모에게 내 불편한 의사를 전달했다.
“호호! 아기님도 검희를 만나서 기쁘신 모양이네요.”
...뭐?
“왕손 저하의 과분한 관심에 소신이야말로 기쁠 따름입니다. 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럽다니…. 왕국의 경사입니다.”
“응애애애~!”
아니라구~!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