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8회차] 군신
용사력 7년.
북대륙은 전란에 휩싸인다.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소국이 ‘황금색 골렘’을 앞세워서 주변국들을 집어삼키며 빠르게 성장한다.
이에, 북대륙 종주국으로 불리는 마법왕국이 현자까지 동원해서 제지에 나서지만, 대패하고 역으로 수도와 현자의 탑을 점령당한다.
원흉은 황금색 골렘.
이때부터 ‘군신’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군신을 등에 업은 신흥강국이 북대륙을 순식간에 통일할 듯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장사할 최적기라고 판단한 암흑상회에서 쌓아둔 ‘붉은색 골렘’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왕국들은 신흥강국의 기세도 무서웠지만, 붉은색 골렘이 ‘골렘은 가성비가 떨어진다.’라는 편견을 깬 까닭에 거리낌없이 구매했다.
붉은색 골렘 전력을 확보한 북대륙 왕국들은 기세등등해졌다.
그러나 황금색 골렘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무엇보다도,
“허걱?! 대규모 습격이다!”
“마법사들은 골렘을 소환하라!”
“기사단은 마법사를 지켜라!”
암흑상회는 붉은색 골렘을 신흥제국에도 판매했다.
괜히 암흑상회라고 불리겠는가?
암흑상회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판매하는 붉은색 골렘의 양을 조절했다.
왕국 연합이 유리할 때는 신흥제국에 더 판매하고, 신흥제국이 강할 때는 왕국 연합에 더 파는 식으로.
이 사실을 알면서도 왕국과 제국은 막을 수 없었다.
원한이 이미 골수까지 차올라서 휴전은 불가능했으니까. 암흑상회에 포섭된 귀족과 간신들로 구성된 각국의 주전파(主戰派)도 문제였다.
북대륙은 점차 피폐해지고….
그 와중에도 군신은 패배를 몰랐다.
지나가던 용사 일행의 비위를 건드려서 찍히기 전까지는.
“응애.”
오늘따라 1회차 추억이 막 샘솟네.
“죽여! 다 죽여! 히히!”
“우리의 왕을 위해!”
“키키킥! 좋아! 아주 좋아!”
설산M에서 끌어모은 범죄자들이 범람하는 홍수처럼 신흥제국을 향해 진격했다.
범죄자는 추악하고 무식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남들에게 호감을 얻기 좋은 미남미녀, 언변이 뛰어난 천재들이 은근히 많다.
그래야 사기도 잘 치니까!
애당초에, 그들이 멍청했다면 아무리 강해도 일찌감치 붙잡혀서 처형당했을 것이다.
범죄자들은 붉은색 골렘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교활하고 집요했다.
마법사를 암살하고 골렘을 탈취하는 건 기본. 식량에 독을 타거나 고향의 가족을 납치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모여든 건 악마숭배자와 악마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따르는 양아치와 도둑, 암상인, 산적, 암살자 등도 줄줄이 합류하면서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건 내 예상마저 넘어섰다.
“응애?”
이상한데?
용사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약 7년 전에 5개 대륙의 각 신전에 용사가 소환됐다는 신탁이 내려오긴 했지만, 용사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상태로 방치된 판타지아 대륙.
악당들로 들끓었다.
하지만 나로선 손해 보거나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악마숭배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직접 나설 수고를 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놀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지배를 받는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이 신흥제국을 깨부술 때마다 나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정복F→정복SS
패기C→패기A
영재D→영재SS
통솔E→통솔S
위엄F→위엄B
스킬 숙련도와 등급이 쭉쭉 상승했다.
나는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에게 신흥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공격하라고 명령해둔 후에 직업 ‘마왕’을 해제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블랙박스를 비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러면 ‘마왕’이 아니게 되면서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에게 추가 명령을 내릴 수 없는 대신, 직업 ‘용사’의 특전을 누릴 수 있다.
경험치 5배!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304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불사MAX 생존MAX 정복SS 영재SS 통솔S…
▷상태: 성검, 마검, 골렘, 성장
이번 회차를 시작하면서 얻은 스킬로만 구성됐다.
직접적인 전투 스킬이 없는 게 아쉽지만, 페널티를 받은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기엔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성검 뉴클리온.
이건 그 어떤 공격계통 스킬보다 강력했다.
“응애.”
드디어 왔나.
“군신께서 오셨다!”
“승리의 화신이 왔다!”
“우린 이제 살았어!”
“와아아아아!”
황금색 골렘이 전장에 출현했다.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우상 ‘캡틴 판타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이것도 슈퍼로봇의 범주에는 들어가는 위용을 뽐냈다.
성능도 썩 훌륭했다.
▷종족: 그랜드 골렘
▷레벨: 999+
▷직업: 전왕(무장→금강↑)
▷스킬: 금강SS 대검SS 대형SS 신성S 복원S…
▷상태: 투기, 강화, 축복, 만전
1회차에선 용사 파티의 비열한 우정의 힘에 굴복하여 끝끝내 파괴되고 말았지만, 그 성능은 나무랄 곳이 없었다.
무장이 좋을수록 단단해지는 직업 ‘전왕’은 황금골렘의 SS등급 금강을 한 차원 높은 스킬로 끌어올려 주고, S급 신성과 복원은 그 견고함을 더욱 사기적으로 만들어준다.
여기에 스킬 대형(大形).
덩치가 클수록 유리해지는 효과가 있다.
쿵! 쿵! 쿵! 부우웅-!
마무리는 스킬 대검(大劍)이다.
검이 크고 무거울수록 날카롭고 견고해진다.
여기에 스킬 대형의 부수효과와 최첨단 골렘의 기본적인 강함이 곁들어지면 재앙이 된다.
“으아아아?!”
“크아악?!”
“꺄아아앜?!”
방금까지 전장을 날뛰며 기세등등했던 악당들이 황금골렘의 대검에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쓸려갔다.
빠직.
탈취한 붉은색 골렘들도 맥을 못 추긴 매한가지.
신성과 마기가 깃들지 않은 그것들로는 황금색 골렘의 S급 신성으로 보호받는 장갑(裝甲)을 뚫을 수 없는 탓이었다.
황금골렘 혼자서 전장을 지배했다.
군신의 전쟁은 늘 이런 식이었다.
“타하아앗!”
그때, 군신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방해꾼이 등장했다.
야무지게 기합을 넣은 검희가 황금골렘을 향해 푸른색 검기를 줄기차게 쏘았다.
파지지직-!
일반속성이라서 무효화 돼야 정상이지만, 검희의 ‘마검’은 마기 속성을 띄고 있기에 신성을 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골렘은 신성S 효과가 없어도 단단했다.
그리고 덩치에 걸맞게 빨랐다.
“꺅?!”
단 일격이었다.
1회차에서도 그랬다.
검희는 황금골렘의 대검을 피하지 않고 검기로 베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훨훨 날아갔다.
1회차에선 요정 공주 실비아가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떨어지는 그녀를 붙잡아줬지만, 이번에는 도와줄 동료가 없었다.
덥석.
황금골렘의 거대한 손에 검희가 붙잡혔다.
“응애!”
그년을 죽여버려! 황금골렘!
하지만 황금색 골렘은 손아귀의 힘을 주지 않았다. 살짝만 힘을 주면 검희의 갈비뼈와 내장이 예쁘게 바스러질 텐데 어째서!
그 이유가 있었다.
“하하! 검희도 내 골렘 앞에서는 별거 없군! 아름다운 검희여.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 그대를 내 하렘에 넣어주마.”
“으읔…. 웃기지 마…!”
“외모만이 아니라 앙칼진 성격도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쉽게 함락되지 않을수록 더욱 불타오르는 법이지. 하하!”
군신과 검희의 대화가 들려왔다.
황금골렘을 응원하며 신났던 내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이건, 월드컵 결승전에서 페널티킥 역전승의 기회를 어이없게 날려 먹은 국가대표를 관전하는 참담한 심정!
선수와 감독의 턱주가리를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텔레비전으로 관전하는 일개 문화시민이었기에 답답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은?
“응애…!”
“아기님?!”
나는 유모의 부드러운 특등석에서 내려왔다.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소환된 성녀H가 나를 낚아채듯 안고는 빠르게 날아올랐다.
그녀는 혼란한 전장을 가로지르며 황금색 골렘의 지척까지 일직선으로 접근했다.
구차한 대화는 불필요했다.
뿅!
나는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했다.
손가락이 짧아서 한 손으로 성검의 손잡이를 쥘 수 없는 탓에 오른팔로 끌어안았다.
이러면 검술을 펼치기 무리였지만 상관없었다.
난잡하게 휘두를 생각이 없으니까.
한 방에 끝내겠다.
푹! 촤아아악-!
황금색 골렘은 단단해봤자 ‘피자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내 성검 뉴클리온은 피자 한 판!
존재의 밀도부터 달랐다.
그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검희의 SS등급 검기마저 우습게 막아냈던 황금골렘이 노란색 치즈처럼 부드럽게 베였다.
성검은 골렘의 복구 기능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검 뉴클리온.
이 흉기는, 완벽하게 부활한 마왕 페도나르의 생존능력마저 찍어누를 의도로 고안된 ‘진정한 성검’인 까닭이다.
초월영역에 접어든 스킬 하나 없는 골렘 따위가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하물며 피자 한 조각이어서야….
“이, 이 무슨…?!”
뒤편에서 검희를 보며 우쭐대던 군신의 경악한 면상이 보였다.
1회차 때보다 멋진 표정을 하고 있다.
빠각!
성녀H가 지팡이를 몽둥이처럼 휘둘러서 넋을 놔버린 군신의 유감스러운 얼굴을 뭉개버렸다.
즉사였다.
그 뒤, 성녀H는 잽싸게 움직여서 내가 지저분한 땅에 떨어지기 전에 안전하게 받았다.
몰랑몰랑.
나는 중력가속도와 낙하충격을 완벽하게 흡수하는 성녀H의 가슴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주인님. 멋진 딸랑이였습니다.”
“응애.”
입바른 칭찬은 됐어.
파괴된 황금색 골렘은 복구되지 않았다.
1회차에선 핵만 멀쩡하면 내부의 중요장치가 파괴돼도 빠르게 수복하던 끈질긴 골렘이었지만, 성검 뉴클리온에 당한 절단면은 끔찍한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다시 붙지 못했다.
끼기긱-
황금색 골렘은 둘로 나누어진 나무젓가락처럼 상처가 더욱 크게 벌어지더니,
쿠웅!
완전히 쓰러졌다.
영재SS→영재SSS
304레벨→647레벨
아기의 몸으로 강적을 쓰러트린 덕분일까?
스킬 ‘영재’의 등급이 또 올랐다. 직업 ‘용사’의 경험치 5배 특전 영향도 매우 컸다.
하지만 레벨이 오른 건 뼈아팠다.
골렘의 핵만 무사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성검 뉴클리온의 성능을 내가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좀 더 주의하자.
“콜록콜록! 이, 이게 대체…?”
황금색 골렘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검희가 어리둥절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그녀의 폐나 심장을 찔러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달려온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전하게 후퇴했다.
검희의 팔다리도 겉보기엔 멀쩡했다.
군신이 봐준 게 틀림없다.
“군신이 전사했다!”
“제국의 수호신이 파괴됐다!”
“오! 맙소사!”
승리의 화신으로 통하던 군신의 죽음이 전장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자 신흥제국 병사들은 항쟁을 포기하고 바로 항복했다.
단 한 번의 패배.
그 결과는 금방 북대륙 전역에 알려졌다.
멸망한 왕국의 후손들이 각지에서 일제히 봉기하고, 군신의 힘에 위축되어 있던 강자와 야심가들이 신흥제국에 반기를 들며 독립했다.
신흥제국은 단 며칠 만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리고 나는?
“오오! 이분이 마지막 혈통이라던…?”
“고귀한 피가 이어졌단 말인가!”
“저희 가문은 왕가에 다시 충성하겠나이다.”
“폐하! 앞으로는 소신들을 믿어주소서!”
멸망한 왕국의 잡것들이 몰려와서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아직 전쟁이 안 끝났음에도 벌써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런 얍삽한 귀족들이 싫지 않다. 대세를 읽을 줄 아는 똘똘한 머리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섭정’ 자리를 노리고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은 나를 잘 모른다.
“꺼져.”
“......”
“......”
슬슬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꺼져. 꺼져.”
할 줄 아는 단어가 아직은 이것밖에 없지만, 앞으로 며칠 이내에 쓸 수 있는 어휘가 대폭 늘어날 것이다.
*
용사력 9년.
신흥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판타지아 북대륙을 구해낸 정의로운 용사님은 소년이 됐다.
“북대륙의 위대한 황제 폐하께 소녀가 인사 올립니다.”
덤으로 북대륙 절반을 지배하는 황제에 올랐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유모에게 추파를 던지는 놈들은 사형, 섭정 자리를 노리는 귀족들은 사형, 반란을 일으키는 역적들은 사형, 산적이 된 기사들은 사형, 골렘으로 까부는 마법사들은 사형, 내게 족보를 들이미는 연놈들은 사형….
그랬더니 저절로 황제가 됐다.
“꺼- 어흠. 그래. 무슨 용무인가, 폐위된 황녀여.”
중앙대륙 북부를 지배하는 신성제국의 가증스러운 황녀가 바다를 건너서 북대륙까지 왔다.
오라버니와 귀족파에게 쫓겨서 북대륙까지 도망쳐온 걸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면 주소를 잘못 찾아왔다.
“용사가 미쳤습니다.”
“......”
겁을 상실한 타국의 황녀가 나에게 미쳤다고 모욕했다.
이년이야말로 미친 게 아닐까?
벌거벗겨서 황궁 입구에 매달아 놓아야겠다.
중앙대륙의 신성제국 신임황제도, 계속 황위를 노리는 거슬리는 누이동생을 대신 죽여달라고 내게 보냈을 것이다.
덤으로 선전포고까지!
북대륙이 전쟁으로 피폐해져서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짐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예?!”
내 대답에 황녀가 화들짝 놀랐다.
당장 이년을 끌어내서 도발적인 검은색 속옷 한 장 남기지 말고 싹 벗긴 채 성문에 매달라고 명령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대화의 초점이 살짝 엇나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똑똑한 황녀가 자살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상식적으로 좀 이상했다.
“...황녀여. 자세히 설명하라.”
그래서 살 기회를 줬다.
“네, 황제 폐하. 마왕 페도나르의 대규모 군단이 중앙대륙을 침공해오는 중입니다. 하지만 요정 공주에게 홀린 용사는 요정왕국 엘브하임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대로면 중앙대륙은 끝입니다!”
판타지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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