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8회차] 진지한 용사님. 정말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황녀가 직접 온 건가?”
“자세한 내용은 서한에 담겨있습니다.”
나는 황녀가 가져왔다는 종이 쪼가리를 펼쳐서 쭉 읽어봤다.
황제 취임을 축하한다는 내용이 50%였고, 그 뒤에 중앙대륙의 신성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은근한 자랑과 겸손한 척하는 자기소개가 45%에 달했다.
그리고 본론은 고작 5%밖에 안 됐다. 그 내용은 더욱 하찮았다.
“정략혼이라···?”
“그렇습니다, 폐하.”
눈앞의 황녀를 내 첩으로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황비가 공석인 상황에서 첩의 자리를 노린다는 건, 본처도 기회가 되면 넘보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짐은 올해로 겨울을 3번째 본다만?”
고작 3살이다!
“외람되오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소녀는 생각하옵니다. 중요한 건 이해와 관계 아니온지요? 북대륙과 중앙대륙을 대표하는 두 제국의 혈맹은 양국에 큰 이득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소녀는 신성제국의 상품으로서 완벽한 교육과 관리를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황녀가 물 흐르듯 자신만만하게 설명했다.
나는 옥좌의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댄 채 권태롭게 그녀를 위아래로 쓱 훑어봤다.
▷종족: 휴먼
▷레벨: 288
▷직업: 황녀(서열=주목↑)
▷스킬: 매력S 기품A 불로A 정치A 지력A···
▷상태: 기대, 갈망, 흥분, 초조
황녀의 레벨은 귀족과 왕족의 일반적인 수준이었지만, 보유한 A등급 스킬이 유별나게 많았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님처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주력하지 않고, 여러 분야에 골고루 손을 뻗은 영향이었다.
제국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굉장히 지독한 년이다.
정치와 신부 수업을 동시에 하고도 A등급 스킬로 도배했다. 천재란 걸까? 하기야 천재이기에 용사의 동료로 합류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본국에 머무는 걸 허락하마.”
“아! 그러면···.”
“황녀여. 나머지는 스스로 증명하고 쟁취해보아라. 짐이 비록 후사가 없다고는 하나, 아직 젊다. 벌써 후계를 걱정할 시기는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늙어서 은퇴할 것 같지 않다.
황제 놀이에 먼저 지칠 것이다.
“마왕의 침공 건은 중앙대륙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의 위기. 짐의 제국 또한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겠다. 황녀여. 더 할 말이 없으면 나가보라. 시종이 좋은 방을 안내해줄 것이다.”
“네, 폐하.”
황녀가 의도적으로 엉덩이를 씰룩이며 퇴장했다.
하지만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와 기사들은 조금도 한눈팔지 않았다.
일찌감치 그런 느긋한 놈들은 황궁에서 퇴출하여 지방으로 보내기도 했지만, 전원이 유부남인 까닭이다.
판타지 21년 경력의 용사님이 분석해본 바에 따르면, 미혼남보다는 유부남이 미인계에 걸려서 쿠데타와 배신, 공모(共謀) 같은 멍청한 생각을 덜 한다.
이유는 몇 가지 있는데···.
뒤에 지킬 가정이 생기면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원초적인 성욕(性慾)을 낭만적인 야망(野望)으로 착각하지도 않고.
“다음 안건은?”
“네, 폐하. 다른 대륙에서 불법으로 넘어온 이민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지난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한 까닭에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대규모 이주는 내 1회차에선 없었던 현상이다.
하지만 8회차는 달랐다.
용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바람에 판타지아의 모든 대륙에 악당과 괴물이 들끓었고,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내가 싹 청소한 북대륙을 제외한 4개 대륙은 전란보다 더 참혹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세금폭탄, 인신매매, 노예사냥, 부정부패···.
이유는 다양했다.
“이민자를 받아라. 다른 대륙의 운명은 이미 끝났으니.”
이것도 내 1회차 경험인데, 용사가 해결하지 않으면 대륙 전체가 위험해지는 사건이 꽤 있다.
특히, 5대 재앙은 용사가 꼭 해결해야만 했다.
괴물의 봉인을 풀려는 비밀세력의 아지트를 깨부순다거나? 괴물이 힘을 회복하기 전에 토벌한다던가? 괴물을 약화하는 보물을 무덤에서 파헤쳐온다던가?
운명이란 조작은, 5대 재앙을 토벌할 시간을 꽤 넉넉하게 준다.
괴물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용사력 10년까지는 판타지아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5대 재앙이 얌전히 기다려주는 편이다.
나는 이 10년 뒤의 역사는 모른다.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는 자연사하고, 나머지 5대 재앙은 일찌감치 토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작은 가능하다.
“폐하. 끝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끝이다.”
북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은 멸망할 것이다.
가라앉든, 불타든, 얼어붙든, 쪼개지든.
지금 생각해보니, 아주 골고루 당한다. 망룡왕의 맹독 숨결까지 더해지면 환상적인 콜라보가 완성된다.
이후, 몇 가지 자잘한 사안을 넘기고 제국 회의를 마쳤다.
나는 곧장 황제의 개인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마왕이 벌써 움직일 줄이야···.”
이것도 요정 공주 실비아에게 홀렸다는 용사 탓일까?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판타지아 세계에 악마와 악마추종자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용사가 꾸준히 토벌하며 숫자를 줄여놔야 하는데, 전혀 활동하지 않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버렸다.
생태계 파괴 수준으로···.
물론,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이는 3살이지만, 내 체형은 5살쯤 됐다.
그래도 여전히 작은 신장 탓에 곤란할 때가 간혹 있지만, 그런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성인이랑 다를 게 없는 활동량과 정치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피자 한 판은 이미 완성됐다.
내 육체는 지구인이던 시절을 완전히 복구했다.
외모는 아름다운 유모의 판타지아 유전자가 섞이면서 살짝 혼혈 느낌이 났다.
완전히 지우지 않고 남겨둔 결과였다.
이제, 마왕을 쓰러트리는 일을 앞둔 상황.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활용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육체를 전성기 성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류: 스킬
▷명칭: 영재
▷등급: MAX(5%)
▶Z: 한계돌파가 약간 쉬워진다.
▷SSS: 손재주가 꽤 증가한다.
▷SS: 성공률이 꽤 증가한다.
▷S: 숙련도가 꽤 증가한다.
▷A: 경험치가 꽤 증가한다.
▷B: 손재주가 약간 증가한다.
▷C: 성공률이 약간 증가한다.
▷D: 숙련도가 약간 증가한다.
▷E: 경험치가 약간 증가한다.
▷F: 떡잎부터 비범해진다.
이 스킬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스킬을 한 번 갈아봤다가 식겁하면서 중단했다.
초월영역 스킬이 늘어날수록 한계돌파가 힘들어진다고 교생 아가씨에게 듣긴 했지만, 이건 내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준비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304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영재MAX 불사MAX 생존MAX 정복MAX 위엄MAX 패기MAX 지배MAX 통치MAX 정치SSS 경영SSS 체력SSS 투기SSS 통솔SSS 기품SSS 가호SSS 외교SSS 거래SSS 심판SSS 지력SSS 문화SSS 연설SSS 내공SS 매력SS 색적SS 심리SS 근력SS 내성SS 후광SS 사무SS 청력SS 마성SS 혈통SS 정기SS 기력SS 사냥SS 쟁탈SS 강요SS 협박SS 도발SS 무공SS 휴식SS 혜안SS 광기SS 직감SS 계산SS 검술SS 대검SS 사교SS 냉정SS 위압SS 치세SS 화술SS···
▷상태: 성검, 마검, 골렘
조금 과하게 준비했지만, 영재의 Z등급 효과는 장기적으로나 유용하기에 한계돌파를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스킬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키웠다.
등급이 하락하지 않도록 보조해주는 스킬 ‘무한’이 아니었다면, 직업 용사로도 이렇게까지 쌓아두지 못했을 것이다.
변화는 스킬만이 아니다.
블랙박스를 비활성화한 상태에서도 성검 뉴클리온과 광선검, 성녀H의 지팡이를 소환할 수 있게 됐다.
원리는 간단했다.
직업 마왕의 상태에서 이것들을 소환한 후에 블랙박스를 비활성화하면 종속계약이 갱신된다는 개념이다.
“오늘의 폐하는 고민이 많은 얼굴이시네요.”
“...좀 그렇네.”
나는 지난 3년 동안 유모랑 함께 잤다.
수면이 필요 없는 몸이지만, 1살 때부터 지금까지 습관처럼 그녀의 부드러운 한쪽 가슴을 쥐고 팔뚝을 베개 삼으며 꼭 붙어서 잤다.
...이유 같은 건 없다.
아침에 깨어나면 아리따운 하녀들이 옆에서 거들긴 하지만, 내 목욕부터 옷 입는 것까지 유모가 거의 손수 해준다.
황제치고 너무나 어린 나이였기에 위엄 넘치는 복장이라도 입고 싶었지만, 유모가 “폐하의 귀여움이 세상을 지배할 겁니다.”라고 발언한 이후부터는 코디네이터도 그녀에게 맡겼다.
나날이 허들이 높아지는 기분이 들지만.
“마왕의 침공 탓인가요?”
“흠···.”
유모는 은근히 내 생각을 잘 읽었다.
“원정을 안 가실 순 없는 건가요?”
“...가야지.”
내 목적은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다.
슬라임식 변기를 시작으로, 판타지아 대륙의 기술력도 나날이 발전하는 중이지만, 내 마음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여긴 허구(fantasy).
판타지 신의 변덕으로 한순간에 사라질 신기루였다. 그 사실이 바뀌기 전에는 마음을 둘 수 없었다.
“저기, 폐하.”
“말해.”
“소녀는 낮에 본 중앙대륙의 황녀보다 검희가 마음에 듭니다. 지금이야 제국의 모든 신민이 폐하께 충성하지만, 젖먹이일 당시를 떠올려보세요. 기억하시나요? 폐하를 품은 채 도망치는 저를 세상은 외면했지만, 히프리아 님과 그녀만은 찾아주었습니다.”
“...참고하지.”
“감사합니다.”
유모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
오랜만에 설산M 아래의 유황온천탕을 즐겼다.
위대한 황제의 행차랍시고 기사단부터 귀족들이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그들도 밤만큼은 시끄럽게 하지 않았다.
야근 빼고 다들 퇴근!
내 제국이란 회사는 근로복지법을 꽤 준수하는 편이다. 당연히 회사 내의 폭언과 욕설, 구타 및 가혹 행위도 금지되어 있다.
성희롱도 당연히 없다.
“폐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검희가 완전무장한 상태로 노천탕 입구까지 왔다. 다른 황제였다면 그녀를 보자마자 공포로 벌벌 떨면서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범하게 말했다.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들어와.”
“그, 그건···!”
“아니면 그대는 3살짜리 황제를 덮치기라도 할 셈인가?”
“당치도 않습니다! 어찌 제가 감히···!”
“그러면 들어와.”
“이건 그···. 하아! 네, 폐하···.”
무장을 벗고 속옷마저 치운 검희가 망설이듯 느릿느릿 걸어왔다.
휘이잉~!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뽀얀 피부에 설산의 찬바람이 닿자마자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탕에 몸을 담그면 금방 따뜻해질 터.
하지만 수줍게 가슴과 아래를 양팔로 가리고 허벅지를 바짝 오므린 검희의 발걸음 폭은 좁고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내가 아기였을 때는 당당히 들어왔었는데, 3살짜리 나를 남자로 보기라도 한다는 뜻일까?
첨벙.
그래도 마침내, 검희가 조심스럽게 노천탕 안에 몸을 담갔다.
어깨를 움츠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편히 쉬게.”
“노력해보겠습니다.”
벗고 들어오라고 명령하면 “변태 황제! 죽여버리겠다!”라며 달려들 줄 알았던 검희는, 의외로 고분고분 따랐다.
물론, 얼굴은 이미 홍당무였다.
저게 유황온천탕의 열기 탓이 아니라면, 수치심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다.
...3살짜리 꼬맹이를 상대로?
그건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 아닐까.
이 뒤에 우리는 한 침대에서 잠까지 잤다.
갓난아기일 때는 유모가 자주 나를 검희에게 맡겼었다. 그러니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물론, 나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검희는 잠버릇이···.
그날부터 나는 매일 검희를 노천탕으로 부르고 아침에 함께 눈을 떴다. 하지만 검희가 이 생활에 익숙해지는 날은 찾아오지 않았다.
내 육체 탓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 빠른 발육을 봐왔던 귀족들은 놀라지 않았지만, 밤마다 함께 목욕하고 자는 검희는 아니었다.
“폐, 폐하. 이젠 좀···.”
“짐은 아직 3살짜리 어린애다만?”
3살짜리 어린애의 중심 주위로 검은색 털이 뽀송뽀송하게 자라났지만, 아무튼 어린애다.
마침내 2단 변신도 가능해졌다.
일반모드, 광폭화모드.
하지만 이 변신 스위치는 내가 켜지 않았다.
어느 날, 맨정신으로는 무리라고 판단한 검희가 술을 잔뜩 마신 채 비틀비틀 노천탕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풍덩!
목욕은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준다.
알코올도 함께.
*
펄럭!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완벽하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나 없이도 제국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장치와 정치는 다 해놨다.
후계문제까지.
물론, 무의미할 수도 있다.
마왕이나 용사가 죽으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사라진다면 내 준비는 헛수고로 끝난다.
그런데 남는다고 해도 문제다.
교육용으로 끊임없이 복사되는 판타지 원주민들을 진짜 사람일까? 가상현실게임의 인공지능이랑 하등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판타지 원주민 육체를 가져봤기에.
“이 빌어먹을 교육시설을 꼭 끝장내고 만다.”
하지만 그전에,
나는 중앙대륙의 요정왕국 엘브하임까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발정 난 학생의 갱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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