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96화 (96/430)

 096화

[8회차] 두 명의 용사 ⑮

용사의 업무 태만으로 판타지아 대륙은 초유의 대위기를 맞이했다.

세상을 어둠으로 지배하려는 사악한 계획을 전혀 방해받지 않은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은 준비를 마치고 하나둘 활동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나름 조심스러웠다.

설마 이래도 용사가 안 나올까?

...그런데 정말로 안 나왔다.

인류를 지키는 용사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이때까지 소극적으로 활동하던 악당들은 기쁜 마음으로 봉기하듯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그것이 현재의 판타지아 대륙.

하지만 내 앞에서는 부질없는 계획이고 준비였다.

20년 경력의 진정한 용사의 힘을 보여주마.

“히프리아.”

유모의 조기교육은 무시무시했다.

지금까지 “찰떡!”이라고 불렀던 성녀H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외워버리고 말았다.

소환된 히프리아가 왼손에 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면서 외쳤다.

“울어라.”

그러자 지팡이 끝에 달린 아름다운 골렘 머리통이 꽉 다물어진 입술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

초월영역에 접어든 세 스킬이 동시에 효과를 발휘했다.

▷종족: 세인트 골렘

▷레벨: 999+

▷직업: 퇴마사(악마→피해↑)

▷스킬: 기력Z 침투Z 항마Z 통역A

▷상태: 해탈

마기를 상대로는 신성 이상으로 치명적인 ‘항마’를 품은 음파(音波)가 지팡이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육체와 영혼 양쪽에 영향을 주는 ‘기력’이 멀리멀리 퍼져나가게 보조해줬다.

인간이 듣는다면 단순한 소음공해.

하지만 이 음파는 마기를 품은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의 육체에 효과적으로 ‘침투’했다.

“커억?!”

“엌-!”

생화학병기라고 평해도 절대 과하지 않았다.

마기가 약하면 약해서 죽고, 강하면 강해서 더욱 치명적이라서 죽는 현상이 발생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늪.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제작된 골렘을 업그레이드해서 만든 지팡이다운 성능이었다.

중앙대륙을 위기에 빠트린 마왕의 군단은 혼란에 빠졌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소리로 선언했다.

“인간은 이 용사님이 지킨다! 인간만…!”

눈치 빠른 악마들은 내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작전 회의 같은 건 없었다. 마기의 등급이 가장 높은 악마가 내 의도를 알아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킥킥킥! 빨리 이동해라!”

“서쪽으로 진군!”

“인간이 없는 숲으로!”

악마 귀족들이 이끄는 군대가 방향을 틀었다.

요정왕국 엘브하임으로.

*

요정의 나라도 내가 아는 역사에서 조금 틀어졌다.

인간을 혐오하는 요정왕이 죽지 않았다.

암시장에 노예로 팔린 공주 실비아를 구출한 용사가 모험을 포기하고 바로 엘브하임으로 귀순(歸順)한 게 원인이었다.

인간 종족인 용사는, 인간을 혐오하는 장인어른의 신뢰를 얻기 위해 더러운 잔심부름과 어려운 임무 등을 무료로 묵묵히 수행하며 3년을 보냈다.

그렇게 용사가 차츰 ‘인간이 아닌 요정’으로 인정받던 중, 나서스 왕자의 쿠데타가 벌어졌다.

“쩝. 괜찮은 친구였는데.”

미래를 알고 있던 용사가 미리 요정왕에게 귀띔해줬고, 반신반의하던 요정왕은 그간 용사가 노예처럼 일하며 보여준 신뢰에 솔깃해서 습격에 대비했다.

그 결과, 나서스 왕자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용사의 성검1에 담긴 ‘사랑의 힘’을 뛰어넘지 못한 나서스 왕자는 전사하고, 부관이었던 에이리스와 부하들은 죽을 때까지 왕국의 출입구를 지키는 파수병으로 좌천된다.

그리고 용사는 ‘사위’로 요정왕에게 인정받게 된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실비아 공주님을 사랑하는 지크 님이 곧 우리를 구하러-”

우득.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준 요정28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목디스크를 선물해줬다.

“지크…. 아직도 졸업을 못 한 건가?”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인 요정28의 목을 놔준 나는, 엘브하임 왕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를 돌아봤다.

그곳으로 악마와 악마숭배자, 그들을 따르는 몬스터와 사악한 무리가 홍수처럼 밀고 들어갔다.

소속을 알려주는 깃발은 없었다.

그 대신, 나무나 쇠로 된 긴 봉에 요정을 산 채로 매달았다. 이러면 불의 정령을 이용한 범위공격에 당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간식과 유흥거리도 되고.

내가 익히 아는 인물도 섞여 있었다.

“요정A….”

하지만 그녀는 인질이 되진 않았다.

사투 끝에 패배한 요정A는 길가에 이정표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팔다리는 잘리고 없었으며, 벌거벗겨진 몸통에 그려져 있는 화살표에는 악마들의 진군 방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가로수의 나뭇가지에 머리채를 묶어놨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진즉 죽었을 터.

하지만 내가 인정한 중간보스 나서스 왕자의 부관을 맡았던 요정A는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종족: 하프 엘프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검술S 정령S 마법S 궁술S 불굴A···

▷상태: 빈혈, 불구, 폐인, 연명

내가 기억하는 요정A의 능력치랑 다소 달랐다.

스킬 불굴이 S등급에서 떨어지고, 검술을 비롯한 3가지 스킬이 A등급에서 한 단계 상승했다.

전혀 이해 못 할 변화는 아니었다.

판타지 능력치의 숙련도 시스템은 100번의 연습보다 1번의 실전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용사가 100년 묵은 인류의 수호자를 1년 만에 따라잡을 수 있는 원동력도 바로 이 성장구조 덕분이다.

스킬 불굴은….

충성할 대상을 잃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꼴이 엉망이네.”

나는 ‘마왕’ 상태로 요정A 옆에 사뿐히 착지했다.

요정왕국 엘브하임으로 진군하는 악마의 군단은 나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들에게 나는 하늘 같은 왕이었기 때문이다.

대화는커녕 근처조차 오지 못한다.

고대의 로마에도 비슷한 처형법이 있다.

벌거벗긴 죄인의 피부에 꿀을 바른 후, 꼼짝달싹 못 하게 팔다리를 묶어두는 것이다.

이러면 꿀에 유인된 날짐승과 벌레들이 사람의 피부를 뜯어먹고, 알을 낳아서 구더기가 생긴다.

죄인은 아주 오랫동안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요정A의 상태도 그 처형법이랑 비슷했다.

그녀는 쌓아 올린 능력치 탓에 여태 숨이 붙어있는 거였지만,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았다.

고통은 덜하다는 게 불행 중 위안일까?

몸에 꿀이 발라져 있지도 않지만, 정령의 사랑을 받는 그녀는 날짐승과 벌레에게 공격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누, 누구신가요….”

요정A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두 눈구멍이 파인 그녀는 청각만으로 내 존재를 짐작할 뿐이었다.

“흠. 지나가던 용사A라고 할까?”

단백질을 주고받은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2회차에서 있었던 일이라서 요정A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얼음공주의 무심한 반응에 흥분하던 동창A랑 다르다.

2회차 요정A와 8회차 요정A를 구분할 줄 안다. 그렇기에 그녀를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적으로 관심은 있다.

신기하잖아?

요정인데 LED 모니터가 아니라니.

유전자의 세계는 기적과 신비로 가득하다.

솨아아아!

내가 끌어올린 마기가 요정A의 몸에 흡수됐다.

그녀 주위를 맴돌던 정령들이 “오또케! 오또케!”를 연발하며 귀찮게 했지만, 초월영역을 일개 S급 정령 따위가 막을 순 없었다.

“이, 이건…!”

요정A가 유일하게 자유로운 잘록한 허리를 비틀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몸뚱이뿐인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죽은 인간도 살려내는 마왕의 힘이다.

팔다리 복구쯤은 별거 아니다.

다만,

▷종족: 데몬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불굴SS 마기S 검술S 악령S 마법S···

▷상태: 복원, 타락, 충성

악마가 된다.

이전의 종족이 무엇이었든 악마는 악마다.

겉보기에는 뿔 달린 요정이지만, 그건 단순히 마기를 감싼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예쁜 여자와 잘생긴 남자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 더 잘한다고 착각하는 거랑 비슷하다.

악마의 외모는 딱 그 정도의 기분만 내준다.

마기 등급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

“기사 에이리스. 모든 걸 바칠 새로운 왕을 뵙습니다.”

자력으로 머리채가 묶인 나뭇가지를 자르고 착지한 요정A, 에이리스가 내 발등에 입을 맞추며 충성을 맹세했다.

죽은 건 아니기에 편리한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악마로 그녀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유모랑 달리 에이리스의 레벨은 높았으니까.

하지만 이 주변에는 악마와 악마숭배자로 가득하다.

요정이면 또 똑같이 당할 뿐이다.

“자유롭게 네 마음대로 살아라.”

“저는 기사입니다. 기사는 왕을 위해 삽니다.”

“이것도 왕의 명령이다. 에이리스.”

“...명을 따릅니다.”

무릎을 펴며 일어선 에이리스는 악령을 소환했다.

그녀의 옛 친구인 정령들을 쫓아내고 소환된 악령은 주위에 흩어져 있는 요정의 시체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쌍의 요정 다리를 가진 흉측한 말의 형상이 됐다.

“이럇!”

악령이 요정의 머리로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질주했다.

동족이자 동료였던 시체로 만든 탈것에 올라탄 에이리스는 악마의 무리에 섞여서 엘브하임으로 진격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눈치가 빠른 여자란 말이지.”

평판과 인성 점수 때문에 차마 명령은 내리지 못 했지만, 에이리스는 내가 바라는 방향대로 움직여줬다.

2회차에서도 그랬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교직원의 출현과 회귀로 지친 내 마음을 저 월등한 가슴으로 치유해줬다.

“주인님의 취향이신가요?”

“아니. 나는 여자의 외모보다 마음을 따지는 편이지!”

나는 히프리아의 날카로운 질문에, 미녀로 하렘을 꾸렸던 어디의 현자처럼 뻔뻔하게 답했다.

펄럭!

직업 마왕에서 다시 ‘용사’로 돌아온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치며 높이 날아올랐다.

히프리아도 나를 뒤따라 3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쫓아왔다.

“와우! 멋진 광경이네.”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판타지아 중앙대륙 전역을 휩쓸었어야 할 마왕의 군단이 하나의 나라로 집중됐다.

마왕 페도나르가 부활하고부터 9년 동안 줄지 않고 불어나기만 한 악마와 악마숭배자의 행렬이 산과 강을 건너서 지평선 끝까지 컨베이어벨트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과도한 전력 투입.

일개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폭력이었다.

그건 인간보다 평균 레벨이 높은 요정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아악!”

“꺄악!”

사방에서 들리는 요정들의 비명.

요정왕국 엘브하임 영토 전역에 흩어져 있는 도시와 마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함락됐다.

아름다운 숲과 건물이 불타고, 생포된 요정들은 악마들의 한낱 장난감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의외로 살육은 별로 없었다.

지나가던 악마34의 목을 붙잡고 물어본 바에 따르면,

최근에 임신한 요정왕 마누라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마왕 페도나르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요정을 멸족시키지 말라고.

그래서 악마들은 공격적인 요정을 제외하고는 죽이지 않고 노예와 가축처럼 다루고 있었다.

참으로 악마다운 해석이었다.

바로 그때,

“쿠에에엑?!”

“크아악?!”

“끼아아악?!”

착한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요정왕이 기거하는 엘브하임 왕궁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점령된 상황이다.

전력이 워낙 압도적으로 차이 나서 버티기도 불가능. 왕궁 밖에 사는 요정들은 짐승처럼 벌거벗겨지며 무장해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악마와 악마숭배자가 무더기로 죽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당연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정력SSS 조련SS 정령SS 시력SS 붕대SS 교감S 사육S 체력S 축복S 마법S 검술S 채집S 낚시S 요리S 조각S 빨래S 조화S 청소S 육아S 잡역A 선술A 대장A 농사A 맷집A 재생A 체술A 내성A 생존A 건축A 외교A 은신A 추적A 면역A 도굴A 오감A 연애A 근력A 수영A 민첩A 불굴A 투지A 재봉A 장사A 질주A 발명A 아부A 거래A 통역A 검기B…

▷상태: 격분, 살의, 피로, 경상, 혼란

주인공이 등장했다.

그런데….

“9년 동안 뭘 하면 이따위 스킬 구성이 나올 수 있지?”

▷경악: 강한수 학생?! 당신이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죠?!

9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