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8회차] 용사력 9년
교생 아가씨! 내 말 좀 들어봐!
이 용사가 사기를 당했어!
ZZ등급이라고 해봤자 Z등급에서 한 등급 차이다.
스킬 영재의 Z효과가 ‘한계돌파가 약간 쉬워진다.’이기도 했기에 충분히 한계돌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웬걸?
ZZ등급 한계돌파에 필요한 제물의 양은 내 예상을 초월했다.
▷종류: 스킬
▷명칭: 영재
▷등급: Z(2%)
▶ZZ: 뿌리부터 재구성한다.
▶Z: 한계돌파가 약간 쉬워진다.
이게 말이 되나?
내가 쌓은 스킬의 양은, 용사 지크 같은 연놈들이 500억 명쯤 달려들어야 간신히 동수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이다.
▶지적: 강한수 생도님? 예시가 잘못됐는데요. SSS급 정력이 가장 강력한 스킬인 생도님의 변변찮은 전투력으로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먼지가 쌓여봐야 먼지죠~ 정상적인 용사님이라면 약 5만 명쯤? 강한수 생도님 혼자서 상대하실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됩니다.
교생 아가씨! 지금은 먼지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음흉하고 불친절한 판타지 신에게, 선량하고 정의로운 용사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게 많은 스킬을 제물로 바쳤는데 고작 2%라는 게 말이 돼?
이건 판타지 신의 음모가 틀림없다!
▶난감: 예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한계돌파는 초월영역 스킬이 쌓일수록 어려워진다고. 강한수 생도님께서 블랙박스라고 부르는 스킬에 가려져서 전부 파악은 안 되지만, 초월영역 스킬을 셋쯤 보유하고 계실 거예요. 영재까지 포함해서 넷! 맞죠?
...맞아. 넷.
그걸 어림짐작으로 맞추다니?
이 교생 아가씨가 잠깐 못 본 사이에 상당히 유능해졌다.
다시 보게 됐는걸.
▶항의: 원래부터 유능했거든요! 선배님들도 굉장하시긴 하지만, 교생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 증거로, 저랑 헤어지시고 바로 실수하셨잖아요? 강한수 생도님은 소환사나 조련사도 아닌데, 골렘에 비중을 너무 주셨어요.
내 지팡이 말이야?
▶긍정: 네. 지팡이처럼 생긴 그 골렘이요. 기력, 침투, 항마. 이 세 Z등급 스킬은 강한수 생도님의 영혼이랑 묶여있기에 분리해서 계산하시면 안 돼요. 능력치가 둘로 나뉜 셈이라고 할까요? 한계돌파 할 때는 이 전부를 합산하셔야 해요.
...정말로?
너무나 기가 막혀서 한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교생 아가씨의 설명이 전부 사실이라면, 내가 보유한 초월영역 스킬의 숫자는···.
신성, 마기, 축복, 영재, 기력, 침투, 항마.
총 7개가 된다!
내 예상보다 스킬 영재의 한계돌파에 너무 많은 스킬이 제물로 소모된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이런 문제가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 알 수가 있나!
▶고등교육과정에 들어가는 내용이랍니다. 그나저나 정말 굉장하시네요. 스킬 흡수나 조합 같은 편법이 아닌 순수한 한계돌파로 7번째 초월영역 스킬을 여시다니···. 하지만 장래를 위해선 권장하진 않아요. 지금처럼 계속 강한수 생도님의 성장을 방해할 테니까요. 그래서 판타지아 대륙 전반의 분위기가 골렘 같은 편법 대신 우정과 사랑을 권장하는 거예요.
현자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거참!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초월영역 스킬 ‘축복’도 내가 노력해서 얻은 스킬이 아니었다. 수련의 동굴에서 여사제를 흡수하고 얻은 스킬이었다.
블랙박스, 최초의 용사에게서 빼앗은 힘으로···.
나는 곧바로 능력치 개편에 들어갔다.
몰랐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문제점을 발견하고도 모른 척하고 넘어갈 만큼 나는 대충 살지 않는다.
철저한 준비와 대처.
내가 판타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지식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아는 게 많아지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진다.
바뀐 내 능력치처럼.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A
▷스킬: 신성Z 마기Z 축복Z 영재Z 기력Z 침투Z 항마Z
▷상태: 성검, 마검, 성녀
블랙박스를 이용해서 지팡이의 초월영역 스킬을 흡수했다.
골렘이 내게 종속되어 있다면 스킬을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다.
내 경험치가 돼버린 늙은 왕자도 “내 하렘의 여자에게 스킬을 줄 수 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사고의 전환.
그것만으로도 내 뜻대로 이루어졌다.
이 원리는, 여사제의 ‘축복’을 흡수할 때랑 흡사했다.
내가 지구에서 최초의 용사가 설치한 덫에 걸려 판타지아 차원으로 또 끌려오고 말았지만, 마냥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
블랙박스 활용법을 깨우쳤다.
직접 몸으로 느끼며 배웠다고 할까?
과외비로 내 원래 육체가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지만, 실전 같은 훈련은 원래 목숨을 수업료로 내는 것이다.
▶혼란: 강한수 생도님? 뭘 하시려는 건가요? 그리고 그 능력치는 대체···?
교생 아가씨. 보고만 있어.
비밀 친구라서 특별히 공개하는 거니까.
영재Z(2%)→영재Z(6%)
침투Z를 제물로 바치자마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가진 스킬을 전부 갈고도 고작 2%밖에 안 올랐었는데, 초월영역 스킬을 제물로 쓰면서 대폭 상승했다.
Z등급의 고급 제물이기도 했지만, 보유한 초월영역 스킬 숫자가 줄어든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떤 원리인지 이해됐다.
“신나게 갈아볼까!”
피눈물을 흘리면서.
여기서 멈춘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영재Z(6%)→영재Z(99%)
내 능력치에 표시된 스킬이 또 허전해졌다. 이젠 블랙박스를 활성화하든 안 하든 별 차이가 없었다.
그만큼 시원하게 갈았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744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영재Z 신성Z 마기Z 날조SSS 통역A 행운A ■■A 창고C 무한E 축제E
▷상태: 성검, 마검, 성녀
현기증이 몰려왔다.
이젠 제물로 넣을 스킬도 없거늘!
초월영역 스킬 4개나 갈고도 한계돌파에 실패했다.
“흠···. 마기Z를 갈고, 빠르게 여러 번 회귀하면서 마왕 페도나르나 계속 잡을까?”
이 방법을 쓰면 마기는 금방 MAX등급까지 복구할 수 있다. 회귀를 반복하면서 마왕을 5번쯤 사냥하면 될 것이다.
넉넉히 5일이면 충분하려나?
▶황당: 마왕은 마기 생산공장이 아니에요···.
교생 아가씨.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저기, 용사님? 아까부터 표정이 너무 심각하셔서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망설였는데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라누벨. 고대의 전설을 쫓는 여행 중, 신탁을 받고 용사님을 소환한 고고학자입니다. 라누벨은 고대언어로 ‘진리’란 뜻이에요. 현재는 이 임시파티의 마법사 포지션을 맡고 있어요. 반갑습니다, 용사님!”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능력치는,
▷종족: 휴먼
▷레벨: 855
▷직업: 학자(지식=마술↑)
▷스킬: 마술SS 마법SS 매력S 요리S 불로S···
▷상태: 흥미
내 1회차 동료들이랑 비교했을 때, 라누벨은 용사력 9년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레벨과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요리S는 대체 뭐지···?
이래선 마왕의 졸개도 못 이길 터. 여태 사지 멀쩡히 용케 살아있다는 감상밖에 안 들었다.
“라누벨. 네가 찾는 용사는 저쪽에서 똥오줌 질질 싸고 있다. 주워가고 싶으면 얼른 데려가.”
“질문 있는데요!”
“하지 마.”
이년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용사님! 그러지 말고 들어주세요! 이미 북대륙과 중앙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이 5대 재앙의 준동으로 멸망했어요. 망룡왕 뇌비우스를 토벌하지 않으면 중앙대륙도 같은 꼴이···.”
“내가 이미 토벌했다.”
친애하는 동료 뇌비우스는 자연사했지만, 내 평판을 위해서 명예를 훼손시키기로 했다. 아니, 자연사했다는 것보다는 용사랑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편이 훨씬 명예로운 게 아닐까?
이걸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한다.
“와아! 굉장하시네요! 그런데 동료분들은···?”
“없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흥분해서 라누벨이 눈치가 없었네요. 5대 재앙의 수좌로 불리는 망룡왕을 아무런 피해 없이 쓰러트렸을 리 없죠. 위대한 영웅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냥 없다고.”
“네?”
“동료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내 말이 어려워?”
“아, 아뇨.”
내 기세에 눌린 라누벨이 목을 움츠렸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생선이 푸른색 눈동자를 빛내며 잽싸게 참견했다.
인어공주 아쿠아였다.
“어머! 고대부터 오랫동안 중앙대륙을 공포로 떨게 했던 망룡왕 뇌비우스를 혼자서 쓰러트리셨다니! 용사님은 정말로 강하시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용사님의 우수한 혈통을 저에게 남겨주실 수 없나요? 절대로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는 요염한 목소리로 내게 교미를 신청했다.
“딴 수컷 알아봐라.”
“그러지 마시고 저에게 하룻밤만 할애를···. 세상이 멸망할 위기일수록 종족보존이 중요하잖아요. 강한 아이로 키울게요. 물론, 그 전에 대가는 확실하게 챙겨드릴게요. 용사님을 보자마자 피부가 건조해질 만큼 뜨겁게 달아오른 이 몸으로♪”
이러고도 아쿠아는 용사의 후손으로, 직업은 영웅이었다.
▷종족: 머메이드
▷레벨: 906
▷직업: 영웅(경험치 200%)
▷스킬: 창술SS 내열SS 질주SS 맷집S 노래S···
▷상태: 흥분, 발정, 애욕
이 발정 난 인어도 매우 약해져 있었다.
1회차에서 그녀는 동료로 합류하고 얼마 못 가서 퇴장했는데, 그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약했다.
얼마나 나태하게 생활해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래서 생선 대가리는···.
▶의문: 강한수 생도님의 1회차는 대체 얼마나 가혹한 환경의 모험이었던 건가요? 용사 없이 죽지 않고 이만큼이나 성장했으면 충분히 강한 편에 속하는데요···.
저 수준은 용사력 5년이면 충분하다.
용사력 9년이면, 내가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잡것들도 SSS급 스킬을 최소 둘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이건 너무 참혹하잖아?
“아쿠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눈부신 미모의 성녀A가 새빨개진 얼굴로 우리 사이에 병풍처럼 불쑥 끼어들었다.
1회차에서도 죽는 그 순간까지 아쿠아를 언니처럼 챙기더니, 세월이 흘러도 그 태도는 변함없는 듯했다.
그나저나,
성녀A는 능력치가 내 기억이랑 정반대였다.
▷종족: 휴먼
▷레벨: 999+
▷직업: 성녀(신앙→부활↑)
▷스킬: 신앙MAX 치료SS 축복SS 체력SS 지원S···
▷상태: 의심, 불안
도대체 성녀의 특수능력인 부활을 얼마나 남용했으면 신앙이 최대치에 도달한 걸까?
내 1회차 성녀들은 전부 약했다.
중앙대륙의 성녀A, 남대륙의 성녀B, 북대륙의 성녀C.
이들은 자동차 타이어처럼 차례대로 내 파티에 합류했었는데, 평균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원 사망했다.
“능력치가 제법이네.”
“후후! 용사님께서 제 능력치를 보신 모양이군요. 그나저나 신탁에 나오지 않은 용사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네요. 하지만 지크 같은 머저리보다 훨씬 늠름하신 분이라서 마음을 놓았습니다. 아쿠아의 몸에 그 더러운 손만 대지 않으신다면 정말 완벽할 것 같아요.”
칭찬 좀 받더니 성녀A가 건방진 소리를 한다.
“너는 완벽한가?”
“이 정도면 완벽하지 않나요? 남대륙의 멍청한 성녀는 괴물의 분노를 잠재우는 제물로 바쳐져서 죽었고, 북대륙의 음탕한 성녀는 악마숭배자로 몰려서 화형당했습니다. 이제, 판타지아 세계에서 용사님을 보조할 수 있는 성녀는 저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성녀 중에서 가장 유능하니까요.”
하나뿐? 가장 유능?
그 오만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완벽한 용사님은 성녀를 호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는 법이다.
“히프리아.”
뿅!
등에 3쌍의 날개를 가진 성스러운 여인이 천사처럼 출현했다.
▷종족: 카오스 엔젤
▷레벨: 999+
▷직업: 성녀(신앙→부활↑)
▷스킬: 신성MAX 마성MAX 매력MAX 안마SSS 항마SSS···
▷상태: 양호
“부르셨나요, 주인님.”
“이쯤은 돼야 성녀라고 말할 수 있지. 안 그래?”
내가 키우는 성녀는 다목적이다.
“이, 이럴 수가···.”
신(神)의 기적을 목도한 어린 양 같은 성녀A의 표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카메라로 찍어뒀을 텐데.
하여간,
“잘 보았지? 내 동료가 되려면 적어도···.”
무능한 잡것들을 쫓아내려던 나는 말끝을 흐렸다.
사랑F→사랑E
우정F→우정E
희망F→희망D
내 1회차 이후로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스킬들의 숙련도가 갑작스럽게 오른 까닭.
안 그래도 한계돌파 제물이 살짝 부족했었는데 잘 됐다.
“...가자! 다 함께 마왕을 무찌르러!”
“잠깐!”
선심 써서 이 오합지졸들을 동료로 받아주려고 할 때, 단호히 저지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나를 맥빠지게 했다.
용사 지크가 아니었다.
그 남자는,
“검왕 알렉스···.”
주먹을 부르는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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