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8회차] 엘브하임과 비밀의 방
“음? 어떻게 내 이름을…. 아니지. 알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건가. 전 왕궁기사단장인 알렉스다. 지금은 고귀한 성녀님의 호위로 고용되어 활동 중이지. 성녀님께서 용사라고 말씀하시니 그 점은 의심하지 않겠지만, 대뜸 마왕을 잡자고 말하는 너를 신뢰할 수 없다. 어디서 왔는지 정체를 밝혀라.”
큰 신장과 딱 벌어진 어깨, 통나무 같은 팔뚝, 긴 다리….
내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남성의 육체.
소환되고 며칠 안 돼서 만두왕국에서 만나게 되는 알렉스랑 육체적으로 약간 차이가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강화됐다.
몸뿐만 아니라 능력치도.
▷종족: 휴먼
▷레벨: 998
▷직업: 검객(체력=검술↑)
▷스킬: 검술SSS 맷집SS 철벽SS 불굴SS 내성S…
▷상태: 경계, 마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전성기의 알렉스에는 한참 못 미쳤다. SSS급에 도달한 스킬이 검술 하나뿐이라니?
“너는 알렉스가 아니야.”
“뭐라…?”
“아무튼, 아니야.”
용사력 9년의 알렉스라면, 스킬을 몽땅 제물로 바쳐서 개털이 된 지금의 나하고도 싸워볼 만한 강자여야 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그는 나의 검술 스승이었다.
타고난 천재성과 가문의 비전(祕傳) 덕분에 검술이 필요 없는 검희는 검기로 전부 해결하지만, 알렉스는 엘브하임의 나서스 왕자, 악마인 칼날 공작, 타락한 검의 수호자랑 함께 순수한 검술의 고수였다.
그런 알렉스라면 검술 등급쯤은 진즉 최대치에 도달했어야 했다.
그런데 9년째 못 찍었다고?
내가 10년 가까이 스킬 ‘날조’를 MAX등급에 도달하지 못한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이었다.
날조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속여야 하는데, 정의로운 용사란 직업병 탓에 도통 숙련도가 안 오른다.
선동은 잘만 오르던데….
“거참. 내가 알렉스인 걸 부정하다니…. 아! 용사, 너도 검왕이란 내 별명을 시샘하는 건가?”
“흠?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하기야 이딴 녀석이 ‘검왕 알렉스’라고 불리는 건 너무나 아깝다.
“용사. 그렇다면 검으로 증명해라.”
“그거야….”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블랙박스를 비활성화로 놓았더니….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744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영재Z 통역A 우정E 사랑E 희망D
▷상태: 성검, 성녀
어떻게 이런 일이!
마왕과 용사를 단번에 구분할 줄 아는 성녀A 탓에 블랙박스는 활성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킬 영재가 초월영역에 접어들긴 했지만, 이건 전투랑 무관한 성장형 스킬이었다.
하지만 못 싸울 건 없었다.
내 진짜 무기는 스킬도, 레벨도 아니니까.
“겁먹었는가?”
“까불지 마라, 가짜 알렉스. 간다.”
나는 일직선으로 알렉스에게 도약했다.
내 고차원적인 움직임에 반응해서 여러 전투계통 스킬이 새롭게 생성됐지만, 그걸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스킬이 활성화되기 전에 끝날 테니!
“오라…! 소드마스타!”
알렉스가 내게 비웃음을 날리면서 마검을 소환했다.
내가 기억하는 1회차 검왕은 자신의 무기를 소환하지 않았다. 늘 허리춤에 연인처럼 차고 “검의 무게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는 개뼈다귀 같은 철학을 늘어놓았었다.
이것도 내가 아는 알렉스랑 달랐다.
하여간,
성마검 소드마스타
검술을 연마하다가 미쳐버린 수호자 ‘검신(劒神)’이 자신이 살아오면서 얻은 심득(心得)을 담아서 벼린 마검이다.
마검인 주제에 신성한 기운도 품고 있는 반쪽짜리 성검. 그 성능은 판타지아 대륙의 3대 명검으로 꼽힌다.
동대륙의 전설 천마신검(天魔神劍) 룬
엘브하임의 비보 정령검(精靈劍) 엔드미온
검신의 애검 성마검(聖魔劒) 소드마스타
이렇게 셋이다. 마왕 페도나르의 마검도 꽤 좋은 편에 속하지만, 3대 명검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그래서 판타지아 동대륙에 가면, 고위급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이 ‘천마신검 룬’의 전설을 추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회차에서 정령검 엔드미온을 써보니, 어째서 3대 명검에 다들 목을 매는지 알 것 같다.
이젠 필요 없지만.
“뉴클리온.”
나는 나직이 진정한 용사의 무기를 소환했다.
그리고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복잡한 검술 따위는 펼치지 않았다. 그딴 게 없어도 내가 이기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댕강-
알렉스의 성마검 소드마스타가 두 동강 났다.
검술이란,
자고로 칼날끼리 맞부딪쳐야 성립된다.
하지만 뉴클리온과 소드마스타 사이에는 지푸라기와 광선검만큼이나 현격한 성능 차이가 있었다.
소드마스타도 결국은 복사된 판타지 세계의 숫자만큼 분할된 검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순수한 성능에서 밀리는데, 존재의 밀도마저 부족하니 아예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이, 이 무슨…?!”
너무나 황당한 결과에 알렉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면서도 잽싸게 몸을 비틀면서 회피했다.
맨몸으로 버틸 생각을 해주면 좋겠지만, 3대 명검을 두부처럼 베어버리는 성검 앞에서 만용을 부릴 만큼 알렉스도 멍청하진 않았다.
“쯧!”
나는 혀를 찼다.
회심의 공격이 빗나가서 무척 아쉬웠다.
민첩 혹은 검술 같은 스킬의 보정을 조금만 더 받았다면 알렉스를 예쁘게 벨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를 죽여버리면 스킬 우정의 숙련도 상승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무조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다.
내가 안 죽이면 되는 것이다.
뿅!
나는 뉴클리온의 소환을 해제했다.
판타지 애니메이션에서는 자기보다 크고 무거운 대검을 쥐고도 달리기 속도가 줄지 않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운동에너지는 질량과 속도의 제곱이랑 비례한다.
질량이 4배로 늘어나고 운동에너지는 일정할 때, 이동속도는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뜻이다.
만약, 현실에서 자기 몸무게에 버금가는 무기를 들고 뛴다면, 속도는 약 0.7(1/1.414)배로 30%쯤 감소한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는 중력과 공기저항, 마찰계수 등의 변수요소가 많아서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뭐가 됐든 간에 “어휴! 이 무식한 걸 너는 어떻게 드는 거야? 굉장해!”라는 감탄 한 번 들으려고 굳이 무거운 무기를 선택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거나 먹어라!”
성검 뉴클리온은 무거운 편에 속했다.
강도 높은 단단한 금속일수록 대체로 밀도 또한 높아서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이다.
판타지아 세계의 금속 중에는 ‘단단한데 깃털처럼 가벼운 환상의 금속’이란 편리한 녀석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물리화학을 준수한다.
그렇다고 성검 뉴클리온이 내 몸무게랑 엇비슷한 건 아니지만, 스킬이 싹 사라진 상태에선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무게였다.
회피속도가 1%만 바뀌어도 생사와 승패가 뒤집힌다.
그래서 소환을 해제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사실 하나.
판타지 능력치의 스킬은 이처럼 복잡하고 심오한 운동법칙 등을 무시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지금은 눈앞의 알렉스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무기를 포기하고 몸을 가볍게 했다.
그 결과, 비겁하게 스킬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회피하는 알렉스의 회피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의(正意)로 똘똘 뭉친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찔렀다.
“커억-?!”
새우처럼 허리가 접히는 알렉스.
맷집, 철벽 등의 방어계통 스킬이 없었다면 그대로 내장이 파열되며 허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보통은 이때 공격계통 스킬로 방어계통 스킬을 중화하거나 상쇄시킨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순수한 힘으로!
과학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빠각.
이어서 두 번째 일격!
허리가 접히면서 고개를 숙인 알렉스의 머리통 안면을, 뛰어오르면서 무릎으로 찍었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펴진다.
알렉스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검술의 대가라고 해서, 맨손 전투를 전혀 못 하는 건 아니다. 검이 파손되거나 쓸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한 훈련도 겸한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아는 1회차 검왕이 아니었다.
스킬 권투 등급이 형편없었다.
“그동안 뭐 했니?”
알렉스의 뚝배기 같은 주먹을 회피한 나는, 그의 등 뒤를 점했다.
“어, 어떻게 내 움직임을…?”
그래도 알렉스의 두 눈은 옹기구멍이 아니었다. 내가 그의 전투법을 전부 파악하고 있음을 단번에 눈치챘다.
어떻게 공격할지, 어떻게 방어할지, 어떻게 회피할지….
내 눈에는 전부 보였다.
“그야….”
복수하기 위해서지!
1회차에서도 일대일로는 내 적수가 못 됐다. 하지만 동료 전부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검왕 알렉스는 파티의 전위를 맡은 방패.
기습하더라도 그를 신속하게 배제하지 못하면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검술을 배우고 움직임을 연구했다.
이건 그 결실.
알렉스는 내게 ‘어린 용(龍) 먹기’나 다름없다.
우득!
내 수도(手刀)가 박힌 알렉스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에서 명랑한 소리가 났다. 허리디스크가 예쁘게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크아악-?!”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알렉스.
이 광경을 녹화해뒀다가 아침마다 재생하며 상쾌하게 시작하고 싶을 정도로 명장면이 나왔다.
지구로 귀환하면 영화감독이나 할까?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용사님! 여기요! 이쪽으로…!”
관광객처럼 천연덕스럽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라누벨이 손짓으로 우리를 불렀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알렉스는 허리디스크로 행동불능.
성녀A는 악마와 악마숭배자가 몰살당하고 남은 엘브하임 왕국의 요정들을 구조하느라 정신없었다.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닐 것 같았던 인어공주 아쿠아도 마찬가지. 성녀A를 호위하면서 ‘마기를 품지 않은 악당’을 처리했다.
“네가 오라고 하면 내가 가야 하니?”
“제발 와주세요! 라누벨이 이렇게 부탁할게요!”
“귀여운 척하지 마라. 맞는다.”
그렇게 경고하면서도 나는 라누벨에게 다가갔다.
용사의 전설을 쫓는 고고학자라고 늘 자신을 소개하지만,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전문도굴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누벨은 보물 냄새를 잘 맡았다.
엘브하임 왕국의 3대 비보를 포함해서 보물창고의 귀중품들은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이 이미 싹 털었다.
남은 게 없어야 정상. 하지만 어디에나 숨겨진 비밀의 방이 있기 마련이다.
라누벨이라면 이 넓은 왕국에서 한둘쯤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이랑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왕국의 주인, 요정왕이 있었다. 하물며 호의적인 관계였기에 함부로 뒤지거나 무언가를 훔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 없는 빈 땅이 됐다.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인 셈.
“용사님. 이쪽이에요.”
“여긴…. 왕궁 정원이네.”
불탄 정원에는 벌거벗겨진 요정들의 시체가 정원수(庭園樹)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누구는 깃발, 누구는 샌드백, 누구는 표지판, 누구는 화살 과녁, 누구는 장식물, 누구는 노리개, 누구는 실험용, 누구는….
딱히 놀라운 광경은 아니다.
만약, 악마의 군단이 엘브하임으로 집중되지 않고 대륙 전역으로 흩어졌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1회차 때 몇 번 보았다.
그 뒤부터는 속전속결로 마왕을 토벌해서 못 봤지만.
▶지적: 맞아요. 강한수 생도님이 대륙을 직접 쑥대밭으로 만드셔서 악마들에게 기회가 없었죠.
교생 아가씨.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와 메기 거인 울룰루, 충성심이 과도했던 일부 악마와 악마숭배자들, 슈퍼로봇 대신 엉뚱한 골렘을 만든 미친 공학자 등의 잘못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라누벨. 그래서 뭘 발견했는데?”
다람쥐가 나무뿌리 밑에 숨겨둔 ‘요정왕이 마누라의 351번째 생일선물로 준 변변찮은 추억이 깃든 푸른색 귀걸이’를 발견한 거라면 대단히 실망할 것이다.
내 귀중한 시간과 운동에너지를 빼앗은 대가로,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리라.
“이걸 보세요. 용사님.”
나를 왕궁 정원 중앙의 분수대로 안내한 라누벨이 가리킨 것은 맨홀 뚜껑이었다.
하수구로 내려가는 통로.
“그래서 이게 어쨌다고…. 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최첨단 슬라임식 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전부 정령에게 의존하는 요정들의 건축양식에는 하수처리시설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화장실도 마찬가지!
굳이 따지자면, 이 정원이 왕족의 전용화장실이다.
깔끔한 뒤처리는 정령에게 맡긴다.
정령에게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 음식물과 배설물 처리, 설거지, 청소…. 심지어 똥구멍 닦는 것까지 시킨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요정만큼 노동복지법을 무시하는 뻔뻔한 종족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착하고 깨끗한 척은….
아무튼, 요정의 건축물에는 하수구가 없다. 그렇기에 이 맨홀 뚜껑의 존재는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매우 수상했다.
“저기, 용사님? 용사님은 어떻게 요정의 문화와 건축양식을 라누벨보다 잘 아세요? 이러면 라누벨의 가치가….”
“닥치고 따라와.”
드르륵.
나는 맨홀 뚜껑을 열고 지하로 내려갔다.
분명, 이때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요정왕이 숨겨둔 마누라의 속옷 정도나 있으리라고 여겼다.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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