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1회차] 여긴 대체 어디야? (외전1)
내 이름은 강한수.
올해 17살의 평범한 남자 사람이다.
지옥 같은 대학입시를 뚫기 위해 매일 고등학교와 학원을 병행하면서 알차게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공부 천재도 아니고, 운동을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
하지만 현재의 내 삶에 만족한다.
살짝 아쉬운 점이라면 얼굴….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털레털레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교실청소 당번일 때 빼고는 늘 함께 하교(下校)하던 친구들이랑 따로 떨어져서 걸었다.
이유야 뭐….
“쳇! 판타지 세계에 수세식 변기 개발이 어때서?”
고귀한 성녀와 위대한 대마법사는 괄약근이 필요 없는 줄 아나?
위기에 빠진 판타지 세상을 구하거나, 아름다운 하렘을 꾸린다는 그럴싸한 꿈과 희망을 세우는 건 좋다.
하지만 그것들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갖춰진 이후부터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다.
명절 때마다 해외여행 안 가고 꼬박꼬박 시골에 내려가는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의 소중함을.
이건 단편적인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몇 번을 잡아도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오는 모기와 파리가 온종일 수면을 방해하고, 바퀴벌레가 부엌에 바글바글하며, 사람과 가축의 오물 냄새에 코와 입맛이 마비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신기하면서도 존경스럽다.
“그런 판타지 세계에서 살고 싶다니…?”
나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점심시간 때, 친구들이랑 “만약에 내가 판타지 세계로 차원이동 한다면?”이라는 영양가 없는 주제로 시간을 허비했다.
친구들은 거침없었다.
용사, 정복왕, 발명가, 하렘, 대마법사, 노예해방….
폭포수처럼 자신의 꿈과 희망에 대해 제법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열의의 10%만 대학입시나 취업 정보에 투자했다면 불투명한 장래희망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솔직히, 여기까진 아무래도 좋은데….
친구들은 나의 ‘수세식 변기 개발’을 비웃었다.
“친구들이 판타지 세계로 납치돼서 고생하길!”
몸소 겪으면서 뼈저리게 후회했으면 좋겠다.
시간여행만큼이나 난해한 차원이동 같은 비과학적인 전개는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상상은 자유잖은가?
나는 히쭉히쭉 웃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이 많았던 탓이다. 곧 다가올 기말고사에 대비해서 풀어야 할 문제집이 내 책상 위에 한가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과학은 대체 왜 배우는 거야?”
내 몸속의 호르몬 이름과 용도를 알아서 뭐하게? 안다고 그걸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복잡한 화학식도 선생님이 수제폭탄 제조법을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마저도 현대에서 실습했다가는 바로 경찰서에 끌려갈 것이다.
물리와 지구과학은…. 그만하자.
나는 머리 아픈 학원 숙제가 기다리는 집에 빨리 가기 위해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놀이터를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질렀다.
이 길로는 주민들도 잘 다니지 않았다.
감시카메라가 닿지 않는 이 놀이터에 불량배들이 간혹 어슬렁거린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 탓이다.
놀이터 바닥에 담배꽁초가 널린 걸 보면 마냥 헛소문은…. 어?
“...뭐지? 이 빛은.”
내 몸을 새하얀 빛이 감쌌다.
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내게 벌어진 이 괴현상에 관해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없었다.
생존본능 비슷한 오한이 든 나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빠져나가고자 등에 멘 가방도 버리고 허겁지겁 달렸다.
하지만 이 빛은 내 몸에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번쩍!
내 시야마저 삼켰다.
*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멍멍했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하진 않았다.
정체불명의 빛에 휩싸이며 뿌옇게 변했던 시야가 서서히 되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내 정신도 점차 맑아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여긴 대체 어디야?”
나는 방금까지 다 쓰러져가는 낡은 놀이터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세 유럽풍의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주위에 이 사람들은 대체 뭘까?
딱 봐도 ‘기사(Knight)’였다.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고급 병과.
갑갑해 보이는 은색 깡통을 뒤집어쓴 그들은 나를 넓게 포위하듯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이 기괴한 대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환영합니다, 용사님!”
그때, 내 등 쪽에서 젊은 여성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숨이 탁 멎었다.
예쁘다.
귀엽다.
그 외에는 다른 첫인상을 표현할 길 없는 묘령의 아가씨가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이돌 지망생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이랑 비슷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아이돌 지망생은 헤어스타일부터 옅은 화장, 염색, 향수, 사소한 액세서리 하나까지 세련되게 꾸미고 다녔다.
반면, 눈앞의 아가씨는 촌스러운 복장과 화장기 하나 없는 민얼굴을 타고난 미모와 몸매로 무마시켰다.
그녀 또한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보편적인 복장이 아니었다. 중세시대의 모험가, 여행자를 연상시켰다.
벌꿀을 바른 것 같은 저 머리카락은 천연일까?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저기, 용사님?”
“...용사?”
“네! 용사님이세요!”
이 여자가 지금, 나를 용사라고 부른 건가?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나는 주위를 한 차례 더 둘러보았다. 영화 세트장이라면 어딘가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테니까.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장식된 천장을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내가 서 있는 바닥을 보다가 멈칫했다.
기괴한 문양이 빼곡하게 그려진 거대한 원.
내가 즐기는 컴퓨터게임에서 종종 보았던 ‘마법진’이랑 그 모양새가 매우 흡사했다.
귀여운 미모의 아가씨가 더욱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용사님. 슬슬 정신을 차려주세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소환돼서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이곳은 판타지아. 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랑 다른 차원입니다.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잠깐! 소환이라고?”
“네! 바닥에 그려져 있는 차원이동 마법진으로 소환되셨어요.”
“......”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게 방송국이나 영화사 혹은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몰래카메라로 녹화 중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내가 가만히만 있으면 재미없다면서 그만둘 게 틀림없다.
아가씨는 본인이 예고했던 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봉인된 마왕이 부활해서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신탁에 따라 다른 세계에서 용사를 소환했는데, 그렇게 소환된 용사가 ‘나’다.
“...라는 뻔한 설정이군. 이해했습니다. 아직 더 남았나요, 아가씨?”
어서 이 웃기지도 않는 촌극을 끝내줬으면 좋겠다. 집에서 숙제를 후딱 끝내고 학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노닥거릴 틈이 없다.
“어머! 제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저는 라누벨. 고대의 전설을 쫓는 여행 중, 신탁을 받고 용사님을 소환한 고고학자입니다. 라누벨은 고대언어로 ‘진리’란 뜻이에요.”
이때만 해도 나는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면서 주위의 기사들이 반강제로 나를 연행해갈 때부터였다.
오래되긴 했어도 깨끗하게 관리된 긴 복도.
지하철이나 버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무심코 한 번 더 돌아보게 될 법한 미녀를 벌써 20번도 더 지나쳤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저런 미녀의 손에 핸드백 대신 물걸레가 쥐어져 있다니….”
청소나 빨래하다가 다소 더럽혀질 걸 각오한 흑백 기조의 하녀 같은 복장은 더욱 촌스러웠다.
하지만 은근히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는 디자인을 보면, 높은 직책의 남성을 유혹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옛날에 궁궐에서 일하던 궁녀들이 왕의 첩(妾)이 되려고 그랬다지?
복도에 난 창문 밖을 내다본 나는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드넓은 정원.
관리를 예초기 같은 기계의 도움 없이 다수의 정원사가 가위를 들거나 쭈그리고 앉아서 수작업하고 있었다.
비효율의 극치!
대한민국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는 ‘나’를 속이기엔 너무나 많은 인원이 동원됐다.
이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씰룩쌜룩.
귀엽게 엉덩이를 흔들며 앞장서서 걷는 라누벨도 현실이겠지.
“......”
“용사님. 왜요?”
“...아니. 그냥 봤어.”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기탄없이 물어보세요. 라누벨은 판타지아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서 아는 게 많답니다!”
내가 판타지 세계를 현실로 완전히 받아들일 때쯤에 이 나라의 국왕을 만났다.
왕의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만두처럼 생긴 남자였는데, 그래도 나는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여기는 민주주의국가가 아닌 계급사회였기 때문이다.
이 국왕의 명령에 내 운명이 걸렸다.
사형, 고문, 노역, 무기징역….
내게 무엇이든 강제로 시킬 권한과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알현실 입구에서 1시간 넘게 기다리게 해서 매우 짜증 났지만,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짐의 땅에 잘 와주었다! 용사여!”
“위대하고 영명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내 인사에 알현실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1시간 동안 벼락치기로 배운 예법으로는 이게 한계였다. 그래도 나는 왕에게 거슬리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지금도 손발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민주주의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지 절절히 실감 중이다.
“용사여. 능력치가 보이는가?”
“잘 보입니다.”
내가 판타지 세계에 소환됐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상태: 불안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능력치’가 보였다. 내가 모르는 언어였지만, 어째선지 그 의미는 정확히 이해됐다.
그리고 타인의 능력치도 볼 수 있었다.
▷종족: 휴먼
▷레벨: 285
▷직업: 국왕(국력→영입↑)
▷스킬: 사무A 정치B 경제B 무술C 사교C…
▷상태: 피로, 만족
만두처럼 생긴 국왕의 능력치였다.
이제 막 판타지에 소환되어 그 존재를 알게 된 능력치의 레벨과 스킬 등은 여전히 생소해서 봐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국왕이 용사인 내 등장을 만족스러워한다는 것만은 상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옥좌에서 일어선 국왕이 선언했다.
“선택받은 용사여! 악마의 영토와 가까운 이 나라에 위기가 도래했다! 악마들을 무찌르며 능력치를 올린 후,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려다오!”
“폐하!”
“음? 짐에게 할 말이 있는가, 용서여.”
“저는….”
싸울 줄 모른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방금까지 나는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내가 죽일 줄 아는 건 모기와 바퀴벌레가 전부였다.
컴퓨터게임에서는 친구들에게 ‘인성 더러운 학살자’라는 악명을 떨치고 있는 나였지만, 그건 게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실의 나는 냉혹한 전사가 아니다.
남을 해치거나 죽이지 못한다.
하물며 상대는 세계는 멸망시킬 힘을 가졌다는 마왕!
내 귀에는 자살하라는 명령으로 들렸다.
하지만,
“...아닙니다. 마왕을 쓰러트리겠습니다.”
나는 못 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문뜩, 옛 격언이 떠올랐다.
무섭다고 말할 줄 아는 것도 용기라고 했던가?
그건 정말이었다.
내 거절에 분노한 국왕이 나를 고문하거나 세뇌하라고 주위의 기사와 귀족들에게 명령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내 인생이 어쩌다가….
*
“용사님! 라누벨이 도와드릴게요!”
피로에 찌든 국왕의 퇴실 명령을 받고 알현실을 나오자마자 라누벨이 귀여운 어조로 약속했다.
내 동료가 되어주겠다고.
기한은 내가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릴 때까지였다.
“동료….”
“네, 동료요!”
200레벨 마법사 라누벨의 합류로 한시름 놓았다.
앞으로 이 위험천만한 판타지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했던 탓이다.
현재 내 레벨은 1.
왕궁을 청소하는 시녀들보다도 레벨이 낮았다.
이런 변변찮은 용사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기는 국왕과 판타지 신은 제정신인 걸까?
내가 성장할 때까지 마왕이 친절하게 기다려줄 리 없었다. 어쩌면 벌써 암살자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라누벨. 앞으로 잘 부탁해.”
“맡겨주세요!”
현재로선 그녀가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래서 당장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용사님.”
“화장실은 어디에 있어?”
“화장실이요?”
이때만 해도 나는 몰랐다.
수세식 변기를 걱정할 때가 아니란 것을.
나는 판타지 세계를 너무 얕잡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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