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01화 (101/430)

 101화

[8회차] 라누벨 활용법

아주 허술하게 꾸며놓은 건 아니었다.

맨홀 뚜껑을 열고 설치된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면, 정원에서 흘러든 빗물과 분수대에서 뿜는 물을 배수하는 기능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지저분한걸?”

그 깔끔한 척하는 요정왕이 마누라의 속옷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몰래 숨겨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요정왕만이 아니다. 비위가 약한 자라면 누구라도 호기심에 여기까지 왔다가 질색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20년 베테랑의 용사였다.

이 정도는 끄떡없었다.

“용사님. 이 장소는 너무 인위적이에요.”

“알아. 슬라임이 한 마리도 없지.”

슬라임은 박테리아처럼 어디에나 산다.

살인과 사냥의 뒤처리가 어설픈 판타지아 세계는, 슬라임 없이 생태계가 성립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라임은 무엇이든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적들이 사람을 죽이고 산길 한복판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더라도 시체가 부패해서 전염병이 번지는 일은 거의 없다.

들짐승이나 몬스터가 시체를 먹기도 하지만, 구덩이 함정에 빠졌거나 독살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온전히 슬라임의 몫이다.

부패가 시작될 때쯤에 감쪽같이 사라진다.

도시하수시설도 마찬가지다.

지구 같으면 여과기, 전기분해, 침전분리, 염소소독, 응집제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오염을 정화했을 것이다.

당연히 시설관리비 등이 꾸준히 들어간다.

그래서 제대로 돈 써서 정화하고 있는지 감찰도 오고, 땅값 떨어진다는 주민들의 탄원과 불만도 계속….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서는 이 모든 걸 슬라임이 전부 해결한다.

대충 하수구만 만들어주면 따로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슬라임이 알아서 자생하고 번식해서 오물 등을 처리한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슬라임은 좋은 경험치가 된다.

즉, 슬라임은 어디에나 산다.

그러니 슬라임이 살지 않는 이 하수구는 비정상인 셈.

“우우…. 라누벨이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정말로 용사님은 모르시는 게 없으시네요.”

“당연하지. 내가….”

20년 경력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지구에서는 경력이 길면 직장에서 대우받는 편인데, 나는 경력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기만 한다.

“용사님이 뭐요?”

“됐어. 따라오기나 해.”

“네! 용사님!”

여기는 고의로 지저분하게 해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렁이처럼 세상에 이로운 몬스터인 슬라임들이 살지 못하게 해둘 이유가 없었다.

나와 라누벨은 하수구를 따라 쭉 이동했다.

바닥에 진흙처럼 쌓인 오물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았음을 시사해줬다.

악취가 점점 심해졌다.

마치, 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내성F→내성E

후각F→후각E

우정E→우정D

쓸데없는 스킬마저 성장했다. 요리사들은 이 후각 스킬의 등급을 올리려고 부단히 애쓰지만, 나로선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악취가 더 심해졌다.

그래서 그냥 후각을 차단했다.

평온--

“아우우….”

손으로 코를 막은 라누벨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만, 그때까진 이 악취 속에서 몸부림쳐야 한다.

“흐음. 악취 다음은 미로인가.”

나는 갈림길 앞에서 멈춰섰다.

몬스터만 튀어나오지 않았을 뿐, 엘브하임 왕국의 왕궁 정원 지하 하수구는 던전이랑 구조가 매우 흡사했다.

보통은 여기서 헤매기 마련.

하지만 전문도굴꾼이 있으면 문제없다.

“용사님. 이쪽이에요.”

“그렇다면 저쪽이군.”

나는 라누벨이 가리킨 방향의 반대쪽 갈림길로 들어갔다.

“엣?! 왜요?!”

“비밀.”

이것도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다.

라누벨은 호기심 충족을 위해 고의로 잘못된 길을 알려줄 때, 엉덩이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드는 버릇이 있다.

어째서 거짓말을 하느냐?

이 앞으로 쭉 가면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떤 함정인지 궁금하다는 심보다.

1회차에서는 그 호기심 때문에 무너지는 던전에 생매장당했다.

“안 따라올 거야?”

“우우…. 아뇨. 갈게요.”

이후에도 나는 라누벨을 길잡이로 앞장세웠다. 그녀가 엉덩이를 흔들면 반대 길로, 얌전하면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덕분에 막다른 골목이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단번에 하수구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전문도굴꾼 라누벨.

귀여운 척하며 방심을 유도하는 그녀의 인성은 쓰레기지만, 길 하나는 정말 잘 찾는다.

미로가 끝날 때쯤에 더러운 하수구도 끝났다.

여기까지 들어왔으면, 아무도 이곳이 평범한 하수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하수구란 위장을 치우고 본격적인 던전이 됐다. 하지만 아직은 그 종류를 특정할 수 없었다.

미궁, 유적, 둥지, 무덤, 마굴, 신전….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

“암호문이군.”

거대한 문이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판타지아 대륙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고대언어를 연구한 고고학자와 현자, 마술사 등이 나설 차례였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라누벨의 본업이었다.

“이 석판은 고대언어로 작성되어있어요. 와아! 신기하네요. 중앙대륙에서 남대륙의 갑골문자가 쓰이다니. 하지만 요정의 고향이 남대륙이란 점을 고려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죠. 흠. 엘브하임 왕국의 요정들은 남대륙의 이주민이었던 걸까요? 이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대발견….”

“라누벨.”

“네, 용사님!”

“닥치고 읽기나 해.”

“우우…. 죄송해요. 그러면 지금부터 석판의 내용을 해석해서 문에 걸린 암호를 풀어볼게요.”

“그것도 됐어.”

“네?”

“요정들이 감춘 이곳에 무엇이 있으며, 도굴할 때의 주의사항 같은 거만 빠르게 찾아.”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누벨이 석판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 능력은 스킬이 아니다.

암기력을 올려주는 지력 같은 스킬의 보조는 있겠지만, 고대언어는 암기력이 좋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회의 문화와 비속어, 문법, 역사 등을 완벽하게 꿰차고 있어야 한다.

더욱 짜증 나는 건?

언어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사투리처럼 지역마다 조금씩 혹은 완전히 바뀐 단어와 문장구조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엄두도 못 냈다.

이건 통역A로도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고대의 악마가 봉인되어 있으니 호기심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하네요. 그래도 들어가고 싶다면 이 석판의 수수께끼를 풀거나 잡종이 아닌 고결한 요정왕의 피를 손잡이에 바르라는 모양이에요.”

“고대의 악마라….”

거짓말이다.

정말로 그렇게 강력한 악마가 이곳에 봉인되어 있다면, 내 마왕의 악마탐지능력에 걸렸을 것이다.

그런고로 이 지하에는 악마가 없다.

악마처럼 사악한 고대의 무언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수수께끼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차라리 지상에 잠시 올라가서 요정왕의 피를 이용하는 게 어떠세요?”

“죽었잖아.”

“실비아 공주님이 있잖아요.”

“그년은…. 아아. 생각해보니 순수한 왕족이었군.”

하는 짓거리가 난폭한 짐승이랑 다를 바 없어서 깜빡했다.

“용사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야….”

뿅!

나는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했다.

문을 파괴하지 말라는 경고가 없다는 건, 어떤 수단으로도 부술 수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당연히 문이 파괴됐을 때 발동하는 함정 같은 것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거리낄 게 없었다.

“알렉스의 성마검 소드마스타를 단칼에 잘라버렸던 그 성검이네요….”

라누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잘 봐.”

히쭉 웃어 보인 나는 뉴클리온으로 문짝을 벴다.

두꺼운 탓인지 순두부처럼 마찰 없이 부드럽게 베이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치즈처럼 자르는 손맛이 있었으니까.

스윽-

자른 후에 걷어찼다.

쿵!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면적의 통로가 생겼다.

“반칙 같은 성검이네요! 드디어 라누벨이 활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우….”

나는 라누벨의 핀잔을 무시했다.

라누벨이 붕어처럼 입술을 삐죽 내리며 귀여운 척할 때는 충동적으로 베어버릴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인내F→인내E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저 스킬은 전혀 쓸모 없다.

판타지 원주민은 심한 고문도 견딜 만큼 보조해주는 듯했지만, 내게는 전혀 도움 안 됐다.

아무튼,

“거의 다 온 것 같네.”

내 20년 경험이 끝나간다고 속삭였다.

악취, 미로, 수수께끼 다음에 퍼즐, 열쇠 찾기, 표적 맞히기, 함정 피하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성검 뉴클리온 앞에 평등했다.

“용사님. 모험 같지 않아요….”

고의로 함정을 밟으려다가 내게 발각되어 엉덩이를 걷어차인 라누벨이 앓는 소리를 했다.

“함정에 빠져서 부지런히 굴러야 모험이니? 라누벨. 그렇게 구르고 싶으면 여기서 내가 해줄까?”

“아뇨.”

“싫으면 닥치고 있어.”

라누벨을 침묵시킨 나는 넓은 지하광장을 쭉 걸어갔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습하고 어두컴컴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무척 환하고 건조했다.

수천에 달하는 불의 정령이 반딧불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던 탓이다.

불의 정령만이 아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정령이 뒤엉켜서 놀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직후까지.

현재는 모든 정령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하광장의 벽에는 정령과 요정이 어울리는 모습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고, 요정과 정령이 나란히 선 조각상도 꽤 보였다.

그중 일부는 참혹하게 파괴되긴 했지만.

▶흥미: 고결한 요정과 순진한 정령이 친목과 화합을 도모했던 역사적인 장소인 걸까요? 강한수 생도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교생 아가씨는 모르는 게 많네.

▶움찔: 모를 수도 있죠! 전부 알았으면 저도 선배님들처럼 벌써 정규직으로 진즉 채용됐을…. 어머! 직장 이야기는 절대 하면 안 되게 되어있는데…. 강한수 생도님. 이건 비밀이에요. 아셨죠?

걱정하지 마. 비밀 친구.

아무튼, 내 생각은 교생 아가씨랑 반대다.

불륜이 아닌 이상, 친목과 화합을 이렇게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친절하게 해설해줄 누군가 등장할 타이밍이었으니까.

“용사여. 멈추세요.”

예쁘게 생긴 요정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요정 왕족을 상징하는 긴 귀부터 아담한 발가락 끝까지 호화찬란한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었다.

귀걸이, 팔찌, 피어싱, 인조손톱, 티아라….

하지만 천 쪼가리는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종족: 그랜드 엘프

▷레벨: 999+

▷직업: 수호자(수호→피해↓)

▷스킬: 정령Z 축복MAX 최면MAX 휴식MAX 민첩SS…

▷상태: 수호, 해동

평범한 용사는 100번 싸워서 100번 질 능력치였다.

내가 아는 어떤 요정왕처럼 방어계열 스킬이 부족했지만, 그걸 무마할 직업 ‘수호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멈추기 싫다면?”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수호자 요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령들이 나를 에워쌌다. 그리고 마음의 정령이 내 정신으로 침투를 시도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령들에게 포위된 채 가만히 있는 내게 다가온 수호자 요정이 무게추처럼 생긴 장신구를 들고 내 앞에서 흔들었다.

“용사님! 최면술이에요!”

나처럼 수많은 정령에게 포위된 라누벨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경고했다.

수호자 요정이 달콤한 어조로 내게 속삭였다.

“정의롭고 슬기로운 용사님. 왔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어머!”

덥석.

나는 내 앞에서 장신구를 흔드는 수호자 요정의 가녀린 손목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당황한 요정이 재차 말했다.

“제가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우읍?!”

나랑 라누벨을 커플로 오해한 수호자 요정의 나쁜 입술을 내 정의로운 입술로 혼내줬다.

아, 맞다.

“쭈읍!”

그녀의 혀도 공범이므로 연행해서 감금 조치했다.

내 판결을 인정하지 못한 수호자 요정이 엉덩이를 뒤로 쭉 빼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내 왼손에 저지됐다.

찰싹!

그 뒤,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몸도, 마음도, 경험치도.

*

“나도 즐거웠어. 요정B.”

“......”

우리의 사랑이 너무 정열적이었던 걸까? 목이 꺾여버릴 만큼 지친 수호자 요정은 대답이 없었다.

“쌀쌀맞긴.”

나는 흐트러진 옷무새를 단정히 다듬은 후, 지하광장의 심층부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수호자 요정은 던전의 보물을 지키는 보스.

이제, 그 보물을 획득할 차례다.

“용사님! 용사님! 저 위의 제단을 보세요!”

시청료도 내지 않고 무단으로 훔쳐본 라누벨이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고자 앞장서서 뛰어갔다.

공범인 정령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변호: 강한수 생도님.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교생 아가씨. 안 물어봤거든?

나는 라누벨이 가리킨 작은 제단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종족: 퍼스트 스피릿

▷레벨: 1

▷직업: 여왕(매력→지배↑)

▷스킬: 불사Z 불굴Z 매력Z

▷상태: 속박, 감금, 봉인, 약화, 저주…

10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