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8회차] 최초의 정령
그것은 실체를 가진 여성형 정령이었다.
등에는 잠자리 같은 날개가 2쌍 있고, 귀는 요정처럼 뾰족했다. 하지만 가슴은 납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정령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징(性徵)이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속옷으로 치부(恥部)를 가릴 필요가 없다.
조류처럼 알을 낳기 때문이다.
정령은 생식기와 항문이 통합된 ‘총배설강’이라는 기관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어째서 추측이냐면,
정령을 해부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탁: 기회가 생기더라도 하지 말아주세요….
교생 아가씨. 인류의 발전은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거야. 명심해둬.
▶한숨: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은 진실도 있답니다. 정령이 고결하다는 이미지가 깨지면, 순진무구한 판타지 아이들의 동심도 파괴된다고요.
아! 동심(童心)이라고 해서 옛날 일이 떠올랐다.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총배설강을 알게 된 이후부터 한동안 달걀 요리를 먹지 않게 된 적이 있었다.
달걀과 달걀이 들어간 요리만 보면 막 헛구역질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빵, 마요네즈, 달걀찜, 오므라이스, 달걀말이….
식욕이 진실을 뛰어넘었다.
“저기…. 저를 구하러 오신 용사님이 맞으시죠? 맛있는 닭고기처럼 보고 계신 건 아니신지…?”
정령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순수한 자연에 가장 근접한 정령 종족은 확실히 달랐다. 정령을 해부해보고 싶다는 내 마음을 어렴풋이 읽은 게 틀림없다.
“우선 자기소개부터 해봐.”
듣고 결정하기로 했다.
“네. 저는 태고의 판타지아 세계에서 태어난 최초의 정령입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이 다섯 속성의 정령들을 각각 다스리는 다섯 정령왕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예요.”
“아줌마란 거군.”
“...제 몸이 자유로웠다면 때려주고 싶은 감상이네요.”
최초의 정령은 내 팔뚝보다 조금 컸다.
물론, 평범한 3살 어린애 수준의 팔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제국주민등록법상(내가 만들었다.)의 내 나이는 3살이지만, 덩치는 성인이랑 비슷했다.
그렇다고 해도 최초의 정령이 작다는 건 변함없었다.
이런 정령의 몸에 악마의 사슬이 잔뜩 박혀있었다.
팔다리뿐만 아니라 몸통까지.
이팔청춘의 꽃다운 나이로 보이는 갸름한 얼굴을 제외하고는 꼼짝달싹 못 하게 해놨다.
나는 손을 앞으로 뻗어봤다.
“오! 정령이 만져지네.”
콕콕.
정령은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만 만질 수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 정령을 스킬로 벨 순 있어도 그냥은 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부터 믿기로 했다.
콕콕!
순수한 마음의 용사님이 만져본 최초의 정령은 무척 몰랑몰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의 문화가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통은 이걸 성희롱이라고 하지 않나요?”
“나는 3살이야.”
그러므로 합법이다.
“최초의 정령님. 어째서 이곳에 붙잡혀 계신 건가요? 그리고 저 요정은 누구고요.”
라누벨이 정령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귀여운 아가씨. 자칭 3살짜리 용사님. 처음 본 정령을 주무르는 것보다 이 질문부터 하시는 게 정상 아닐까요? 아니면, 제가 요즘 유행과 상식을 몰라서 과민반응하는 걸까요?”
“정령님이 정상이세요! 라누벨이 보증해요.”
“휴우! 다행이네요. 아무튼, 질문에 답변해드릴게요. 조금 전에 용사님이 쓰러트리신 저 요정은 3대 요정왕의 아내예요.”
...3대 요정왕이라고?
나는 그 단어에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최초의 정령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걸 멈추고 질문했다.
“혹시, 인간 아가씨들의 풍요로운 가슴을 사랑하는 유감스러운 요정왕을 말하는 거야?”
여전히 믿어지지 않지만, 용사 페스티벌에서 만났던 보스K가 3대 요정왕이라고 본인을 소개했었다.
인간의 도시를 천국이라고 표현했었지….
“엄밀히 따지면, 밋밋한 동족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지만요…. 어라?! 3살짜리 용사님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시는 거죠?! 3대 요정왕이 동족을 혐오했다는 진실은 날조되어 정반대로 알려졌을 텐데요.”
“내가 원래 좀 대단하지.”
“이번 대의 용사님은 비밀이 참 많은 분이시군요….”
최초의 정령이 이어서 설명했다.
“3대 요정왕은 말씀처럼 유감스러운 취향의 괴짜였지만, 그 이전까지 소규모 부족 단위로 힘겹게 살아가던 요정 종족을 통합해서 나라다운 나라를 세운 위대한 왕입니다.”
“헤에~ 둘이 무슨 사이?”
“친구였어요. 그러니 이상한 상상은 자제해주세요! 이 조그마한 몸에 들어갈 리 없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앗?!”
3대 요정왕의 최고 업적은 최초의 정령이랑 친구가 된 것이었다.
머나먼 과거.
태생적으로 비실비실한 요정들은 오래 산다는 걸 제외하면 장점 하나 없는 약한 종족이었다.
요정이랑 자면 회춘하고, 피를 마시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구잡이로 인간들에게 사냥당했다. 특히, 요정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시기한 인간 여성들의 핍박이 극심했었다.
이유?
요정이 인간보다 약한 탓이다.
자연법칙에 따라서 수명이 긴 요정은 번식력이 극도로 떨어졌고, 그렇다고 몬스터처럼 태생적으로 강한 것도 아니었다.
요정 부족들의 고령화 현상도 심각한 문제였다.
연륜이 쌓인 요정들이 자연스럽게 중책을 맡았다. 그들은 위험한 외부활동을 젊은 아이들에게 떠넘겼다.
그 결과, 경험과 조심성이 부족한 젊은 요정들은 쉽게 인간들과 몬스터에게 사냥당했다.
요정의 최대 장점은 긴 수명인데, 전혀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활용은커녕 약점이 돼버렸다.
“저희는 그런 요정들에게 힘을 빌려줬어요.”
무식한 원시인처럼 살던 요정 종족에 정령들이 가세했다.
3대 요정왕이랑 친구가 된 최초의 정령은, 자신의 후손들에게 요정을 도울 것을 당부했다.
이때부터 요정들은 약자가 아니게 됐다.
웬만한 마법사보다 강하지만 극도로 희귀한 ‘정령사’가 요정들에게는 흔한 직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정령사가 되는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자연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이 때문에 정령사가 된 이후에도 문제였다. 생명을 죽이고 지형을 파괴하는 일에 정령을 동원할 수 없었던 탓.
이래선 전쟁 수행이 무리였기에 정령사는 강해도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요정은 달랐다.
“순수한 계약이 아니었군?”
“그렇습니다. 툭하면 제 가슴을 만지며 귀찮게 하는 친구를 위해, 저는 꽤 무리한 부탁을 후손들에게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몹쓸 요정 친구였지만, 요정 종족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위대한 왕이 틀림없습니다.”
요정이 소환한 정령은 전쟁에 활용할 수 있었다.
정령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요정들은 인간 나라에 붙잡힌 동족들을 구출하고, 빼앗긴 숲과 강을 탈환해서 나라를 세웠다.
튼튼한 성벽으로 보호받는 도시와 마을들을 빠른 속도로 건설했다.
비실비실한 요정이 무슨 수로?
당연히 정령의 힘이었다.
지구의 현대 인류가 ‘전기’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요정도 정령 없이는 하루도 살기 힘든 생활구조가 됐다.
그게 문제였다.
살기 편해진 요정들은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정령은 전기랑 달리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3대 요정왕은 매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어요. 그는 순수하게 가슴만 좋아하는 바보였거든요. 그런 요정이 저의 친구였기에 요정왕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라와 그를 동일시하며 엘브하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보스K의 이름이 엘브하임이었군.
오늘 처음 알았다.
▶황당: 판타지 경력 20년 동안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요…. 실제로 3대 요정왕을 만나서 동행하기도 하셨잖아요.
하지만 교생 아가씨, 정말로 몰랐는데 어쩌라고?
“정령이란 강력한 패를 쥔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의 권력과 힘은 절대적이었어요. 이때 인간 왕국은 휴전과 사과의 뜻이 담긴 혼인동맹을 그에게 제안했어요. 그는 흔쾌히 수락했죠. 사심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네요. 그 공주님이 가슴이 엄청났거든요. 그리고 여기에 발끈한 그의 아내와 요정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그래서 이 꼴이 된 건가?”
“네.”
최초의 정령은 요정의 친구에서 포로가 됐다.
이때부터 요정들은 난폭한 요정공주 실비아처럼 정령들에게 부탁이란 이름의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살해와 파괴 같은 정령이 싫어할 법한 만행에 마구 부려먹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긴 세월 동안 반복되면서, 후대에 태어난 정령들은 요정의 부탁이면 뭐든 들어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언제든 뒤집힐 수 있었다.
최초의 정령
이 존재가 풀려나면 정령들은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다섯 정령왕의 분노를 산 요정 종족은 멸망하게 된다.
“그래서 저 요정이 지키고 있었던 거였군.”
쓰러진 요정B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네. 쿠데타를 일으킨 주모자인 3대 요정왕의 아내는 까마득한 세월 동안 저를 감시해왔어요. 그녀는 밖의 상황도 몰라요. 이 폐쇄된 공간에서 수백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후손들을 막연히 기다리는 게 유일한 낙인 여자죠. 그런데 저리 허무하게 죽을 줄은….”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모든 요정을 죽일 겁니다.”
최초의 정령은 평온한 어조로 설명했다.
“제 아이들이 착취당한 세월은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정령이 다른 종족을 지배하거나 복수에 얽매인다는 것도 무리죠. 그렇다면 자연의 순리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정령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진즉 멸족해서 사라졌을 요정이 가야 할 운명으로.”
“이미 멸종 직전인데.”
요정왕국 엘브하임은 멸망했다.
요정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남대륙은 5대 재앙의 난동으로 사라졌으니, 현실적으로 북대륙과 중앙대륙에 사는 요정이 전부다.
그리고 왕국은 여기 하나뿐.
대륙 곳곳에 흩어져서 사는 요정들을 간접적으로 보호하던 엘브하임이 멸망했으니, 노예 사냥꾼들이 부지런히 활동할 것이다.
굳이 정령이 나설 것도 없다.
“그런데 용사님. 언제 이 사슬을 풀어주실 건가요?”
“나는 풀어준다고 한 적 없는데.”
“예?”
“음?”
“......”
“......”
“정의로운 용사님! 이 끔찍한 사슬을 풀어주신다면 마왕 페도나르를 처치하는 위업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용사의 동료였습니다. 정령의 대표로서 최초의 용사를 도왔었지요.”
“...그래?”
뿅!
나는 성검 뉴클리온을 소환했다.
“용사님…?”
“정령 아줌마. 미안하게 됐어. 북대륙의 내 집 정원에 관상용으로 요정이랑 인어 몇 마리를 키우는데, 유모가 좋아하거든. 안 그래도 내가 없어서 우울한데, 마음의 위안을 얻던 애완동물들마저 죽으면 대단히 슬퍼할 거야.”
“자, 잠시만요!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친구에게 안부 전해줄게.”
예쁘게 죽었다고.
*
“이상해. 총배설강이 아니면 어떻게 알을 낳는 거지?”
우리는 용무를 마치고 하수구 밖으로 나왔다.
폐허가 된 지상에선, 요정A의 지시를 받은 요정들이 정령의 힘으로 파괴된 건물을 보수하고 있었다.
동료로 임명한 잡것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용사님?”
뒤따라오던 라누벨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왜?”
“용사님이 맞으시죠?”
“내가 용사가 아니면 뭔데? 안 그래도 멸종 직전인 요정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정령을 어떻게 그냥 풀어주냐? 라누벨. 네가 생각하는 올바른 해결책을 말해봐.”
“설득이요!”
“설득?”
“네! 세상에 나쁜 요정만 있는 건 아니라고, 우리랑 함께 모험하면서 좀 더 지켜보자고 설득하는 거예요! 그렇게 동료로 영입한 후에 차차 원한을 불식시키는 거죠!”
라누벨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성공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성공한 사례가 1회차에서 있었다.
인간혐오가 극에 달했던 요정공주 실비아가 모험하면서, 암흑상회나 요정을 노예로 둔 인간만 보면 발작하던 정신병이 완화됐다.
아주 조금.
그때 나는 결론을 내렸다.
“예전에 인간만 보면 죽이려고 날뛰던 난폭한 요정이 있었어. 그년이 발작해서 망친 계획과 일정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 그건 동료가 아니라 민폐 덩어리였어.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이가 갈리지.”
“용사님. 3살 맞으시죠?”
“그런데?”
“언제 그런 요정을 보셨어요?”
라누벨이 쓸데없이 예리한 질문을 했다.
“...3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라누벨. 그 귀여운 척하는 엉덩이 내밀어봐. 내가 상대성이론을 너의 골반에 새겨줄게. 아플 때는 시간이 참 안 가거든.”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 않는다.
일반 아기들이 걸음마 떼고 있을 때, 나는 북대륙을 정벌하고 제국을 세웠다.
날조SSS→날조MAX
사랑E→사랑C
희망D→희망B
스킬 작업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감탄: 저도 놀랐어요. 강한수 생도님이 그 무시무시한 성능의 성검을 소환할 때까지만 해도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교생 아가씨. 잘 들어.
내가 20년 경력 용사님이야!
이 용사님의 손가락에 걸리면 최초의 정령도 별거 아니다. 히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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