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8회차] 무엇입니까?
이 상황에선 당연히 ‘예!’를 골라야 하는 거 아닌가?
1회차 때, 별 시답잖은 이유로 망설이다가 일생일대에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를 날려 먹은 연놈들을 나는 꽤 많이 봤다.
그리고 기회를 잃으면?
안 겪어도 됐을 위기가 찾아온다.
이때부터 뒷수습은 용사인 내 몫이었다.
망설여서 기회를 망친 연놈들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라고 한마디 하고 끝이다.
정말로 죄송하면 자살해야지!
그 연놈들에게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야.” 같은 개똥철학을 들먹이며 망설이도록 부추긴 동료들도 짜증 나긴 마찬가지.
“나는 그딴 실수를 절대 안 하지.”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안전한 장소부터 물색하기로 했다.
어떤 방식으로 뿌리부터 재구성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번데기나 알 같은 거로 바뀌면서 의식을 잃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위험과 변수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 신사적인 마왕 페도나르가 방해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줌마.”
“계약하지 않은 자유로운 정령은 이름이 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몹쓸 친구가 절 부르는 애칭이 있긴 했습니다만….”
“아줌마.”
“최초의 정령이라고 불러….”
“아줌마.”
“...네.”
땅, 불, 바람, 물, 마음. 5가지 아들을 낳아놓고 아줌마가 아닌 척하지 말라고.
“정령은 자신의 힘이 담긴 영혼을 떼어서 알을 만들어요. 용사님께서 상상하시는 그런 세속적인 방법을 쓰지 않습- 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흠흠. 아무튼, 저는 아닙니다.”
“아줌마. 정령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봐.”
“아이들을 왜…?”
“지금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내 머리 위에 여전히 태평하게 누워있던 최초의 정령이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용사님. 그건 너무나 힘든 요구입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자유로운 정령들을 집결시키는 건, 아무리 저라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서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최초의 정령이 간악한 요정의 사슬로부터 풀려난 기념 파티를 연다면.”
“파티라…?”
“네. 정령은 파티를 매우 좋아합니다.”
“이런 폐허에서?”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의 침공으로 파괴된 시설들을 부지런히 복구 중이지만, 엘브하임 왕국이 이전 모습을 되찾으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뭐…. 자신 있으면 해봐. 단, 오래 걸리면 안 돼.”
나로선 실패해도 전혀 손해 볼 게 없었다.
“네, 용사님. 자아! 아이들아! 파티를 열자꾸나.! 간악한 요정에게 붙잡힌 기구한 정령을 구해준 용사님과의 격렬한 사랑 이야기가 듣고 싶은 아이들은 전부 모이렴!”
동서고금(東西古今),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이야기 주제가 있다.
사랑, 전쟁.
그건 정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초의 정령은 과장이 잔뜩 섞인 거짓말로 파티를 홍보했다. 판타지아 세계를 떠도는 순진한 정령들이 여기에 낚여서 우르르 몰려왔다.
수백, 수천, 수만, 수억….
끊임없이 찾아왔다.
*
파티를 위해 방문한 정령들은 빈손이 아니었다.
동대륙, 서대륙, 남대륙이 5대 재앙의 난동으로 파괴되면서 멸종위기를 맞이한 식물의 씨앗들을 잔뜩 가져왔다.
흔한 잡풀이 대부분이었지만, 특수한 환경에서만 자라는 전설이나 희귀로 불리는 영초와 약초도 섞여 있었다.
정령들은 엘브하임 왕국 전역에 그 씨앗들을 심었다. 그러자 몬스터처럼 빠른 속도로 급성장했다.
불탔던 숲과 초원은 금세 이전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갖췄다. 자연의 신비를 넘어선 사기였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선 이게 당연한 일이다.
대형 몬스터가 움직일 때마다 생태계가 파괴된다. 강력한 몬스터끼리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지형이 뒤집힌다.
5대 재앙은 아예 대륙을 지워버리지 않았던가?
이렇다 보니,
판타지아 대륙에선 5가지 정령이 힘을 조합하면 동식물의 성장 속도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호오~ 제법 그럴싸한걸?”
판타지아 북대륙의 희귀한 식물 씨앗까지 수입되면서 엘브하임은 거대한 식물원처럼 변모했다.
이름을 붙인다면 ‘정령의 낙원’쯤 될까.
더는 요정의 나라로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최초의 정령이 요정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자 소소한 복수일 것이다.
이젠 우리가 주인이라고.
“용사님. 보셨죠? 이게 정령의 힘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정령들에게 둘러싸여서 서커스 원숭이 같은 꼴이 된 연인 실비아의 타락한 모습을 본 지크.
그가 부르르 떨다가 외쳤다.
“이딴 세계에 더는 못 있겠어! 천사님! 듣고 있겠지요?! 저를 회귀시켜주십시오! 이번에는 당신의 바람대로 마왕을 쓰러트리겠습니다! 실비아! 두고 보자! 애초에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노예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게 아니었어. 큭큭!”
비열하게 웃는 지크는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광기 스킬이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원래 저런 놈이었나?”
“용사가 저렇게나 망가지다니….”
“역시, 단순한 변태였군요.”
요정 구조 활동을 어느 정도 끝마친 알렉스와 성녀A, 아쿠아가 지크를 보면서 한마디씩 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나를 돌아봤다.
희망B→희망A
망할 연놈들아. 내게 희망을 걸면 곤란하다구?
이 와중에도 요정왕국 엘브하임은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태초의 밀림, 정글처럼 변하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판타지가 아닐까?
반대로, 용사 지크의 광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긴커녕 심해지기만 했다.
“천사님! 마왕을 쓰러트리라고 하셨습니까? 회귀시켜주십시오! 이처럼 망해버린 세계를 구해서 뭐합니까! 그리고 저는 지구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저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가족과 친구 따위 알 바 아닌…. 천사님? 듣고 계십니까? 천사님! 천사님! 빌어먹으을~! 젠자아앙~!”
...그래도 나는 지크를 날뛰게 가만히 놔뒀다.
겁쟁이라서 내게 덤비지도 못할뿐더러, 지크의 정신병이 심해질수록 잡것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격상됐기 때문이다.
희망A→희망S→희망SS
아주 바람직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지크를 근처에 놔둘 생각은 없었다. 내가 영재 ZZ등급 효과로 재구성하는 틈에 앙심을 품고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라누벨에게 지시했다.
“쟤 좀 데리고 나가서 악마 한두 마리만 잡고 와라.”
“라누벨이 왜요?”
“네가 지크를 소환했으니까. 끝까지 책임져야지. 결혼하라고는 안 할 테니 좀 데리고 나가봐.”
“우우…. 네.”
“덤으로 알렉스도 가져가. 너희 둘만 보내면 하루 만에 객사할 것 같거든. 그래도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용사님! 라누벨의 생환을 빌어주세요!”
“꺼져.”
그렇게 은근슬쩍 추방했다.
나머지 두 잡것도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내 전용 성녀 히프리아를 본 이후부터 자신감을 상실한 성녀A가 자발적으로 지크의 모험에 동행했고, 밤낮없이 내게 추파를 던지던 인어공주 아쿠아는 성녀A에게 질질 끌려갔다.
하지만 내 주위가 허전해지진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정령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던 탓이다.
정령의 형태는 주변 환경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몸을 구성하는 색으로 5가지 속성이 구분된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정령이 모이며 대자연의 기운이 집중됐다.
이곳은 그중에서도 ‘태풍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부. 정령에게 둘러싸여서 안전하면서도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한 장소였다.
즉, 명당이었다.
“여기가 좋겠네!”
나는 영재 ZZ등급 효과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들려온 메시지.
▶질문1: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①여자
②슈퍼로봇
③몰살
④전리품
⑤가족
...뿌리부터 재구성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갑자기 오지선다형 문제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정해진 답이 없는 심리테스트 같은 거였다.
이러면 신조차 예상할 수 없긴 하겠다. 내 선택에 따라 재구성되는 뿌리의 결과물이 달라질 테니.
대신,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그런데 보기로 나온 5가지 전부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가장’이라고 했으니 하나만 골라야 했다.
선택 장애가 오면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④전리품
고민 끝에 나는 4번을 골랐다.
보상 없는 무료봉사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용사란 이유만으로 공짜로 부려먹으려 했던 판타지 원주민들에게 신물 난다.
그래서 나는 전리품이 좋다.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서 보람도 있고.
▶질문2: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①협공
②동료
③무료봉사
④교직원
⑤회귀
질문은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가장 싫어하는 것을 물어봤다.
“아…. 이번 문제는 좀 어렵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귀신같이 잡아내서 보기로 넣었다. 하나만 고르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안 고를 순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이 선택이 내 재구성에 영향을 주리란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지능적으로 고를 필요가 있었다.
1번과 2번을 고르면 ‘우정의 힘’에 상당한 면역력이나 대항책을 갖추게 될 것이다.
3번은 첫 번째 문제에서 내가 고른 ‘전리품’이랑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이걸 고른다면 더욱 강화되지 않을까?
4번과 5번은 판타지 교육시스템에 대항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선택은,
⑤회귀
회귀하면 모든 게 초기화된다. 블랙박스로 능력치 일부를 보존할 수 있긴 하지만, 사람이 능력치만으로 살 순 없다.
그간 쌓인 인간관계는?
지크 같은 사회부적응자들은 “이번에는 잘해서 누구랑 꼭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좋아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현실을 외면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5번이다.
▶질문3: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① 목디스크
② 허리디스크
③ 살인미소
④ 손가락
⑤ 정의구현
이 문제는 매우 쉬웠다.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는 지금 실력으로도 충분하고, 살인미소와 손가락은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런고로 이거다!
⑤ 정의구현
나 같은 정의로운 용사님에게 잘 어울리는 특기다.
▶질문4: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①몰랑이
②죽음
③어머니
④회귀
⑤우주
이번에도 제법 쉬웠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활용할 때마다 이 위대한 존재가 무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선량한 분이시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런고로 1번은 제외.
어머니를 이겨서 어쩌자고? 그래서 3번도 제외.
남은 선택지는 2번과 4번, 5번이었다.
죽음은 늘 두렵지만, 안 죽기만 해서는 소용없다. 강해져서 죽을 상황 자체를 피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2번 제외.
비슷한 이유로 4번도 제외다. 판타지 능력치를 빼앗겨도 문제없을 만큼 강해지면 된다.
그런고로,
⑤우주
방대한 면적의 우주는 알면 알수록 경이롭다. 우주의 시간으로 따지면 영원한 생명조차 찰나에 지나지 않기에.
블랙홀을 만드는 마법이라고?
정말로 만들게 되면 행성이 먼지 크기로 압축된다는 걸 모르는 사기꾼과 허풍쟁이들의 개소리다.
나는 우주가 가장 무섭다.
▶질문5: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①라누벨
②뇌비우스
③알렉스
④쏘시아
⑤몰랑이
05가지 보기를 쭉 훑어본 나는 4번이 무척 의외였다.
마왕의 딸. 비겁한 년.
내가 아는 ‘쏘시아’라는 악마 여성의 정보는 이게 다였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을 줄이야.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③알렉스
내 선택은 3번이었다.
괜히 1번이나 4번을 선택했다가 여자로 성전환될 수도 있잖은가? 그것만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비슷한 이유로 2번도 기각.
망룡왕 뇌비우스는 내가 친애하는 동료이긴 하지만, 내가 날도마뱀이 되고 싶진 않았다.
5번의 유혹이 강렬했지만,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여자만큼이나 고자가 되기도 싫었다.
▶영재ZZ: 수고하셨습니다. 질의응답에 성실히 답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뿌리부터 재구성하면 회귀와 전생을 포함한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으며, 누구도 그 결과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내용을 이해하셨다면 동의해주십시오. (예/아니오)
마지막까지 사람 불안하게 하네!
그래도 내 선택과 결정이 뒤집히는 일은 없다.
이제, 힘차게 외쳐보자.
예!
▶영재ZZ: 뿌리부터 재구성을 시작합니다.
견딜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나는 정령들의 축복과 사랑 속에서 깊은 수면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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