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8회차] 이 용사님읙 경력이 또...
내가 ‘나’라고 인식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장 먼저 하체의 감각부터 멀쩡한지 확인했다. 이게 사라지면 어머니가 졸도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어나시자마자 테니스라켓으로 내 머리통을 후려치시겠지.
벌떡!
다행히 이쪽은 이상 없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안도할 수 있었다. 성전환이나 고자가 아니면 최소한의 위험선은 넘은 셈.
이제, 느긋하게 블랙박스를 활성화한 능력치를 확인해보자.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1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영재ZZ 신성Z 마기Z 정령MAX 축복MAX 날조MAX 희망SSS 사랑SS ■■A 우정A 통역A 행운A 창고C 무한D 축제D
▷상태: 변태, 성검, 마검, 성녀
종족이 바뀌었다.
최초의 용사가 깊게 연관된 ‘카오스 휴먼’에서 완전히 생소한 ‘네츄럴 휴먼’으로. 구수한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자연인’쯤 될까.
자연인이란?
인간의 육체를 가진 유기생명체를 뜻한다. 태어나서 생존해 있는 동안 법 앞에 평등한 권리능력을 갖는 인간의 총칭이다.
자연인에는 또 다른 의미도 숨어있다.
속세에서 탈출하여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법률상에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인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회사 대표가 직원의 인격을 모욕했다고 치자.
이걸 ‘회사’의 잘못이 아닌 ‘자연인’의 실수로 우기는 것이다. 이러면 회사 대표가 직급으로 약자를 핍박한 게 아니라, 개인 간의 사사로운 말다툼으로 끝난다.
“재미있네.”
종족 ‘자연인’에는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기를 활성화하면,
▷종류: 종족
▶명칭: 네츄럴 휴먼
▶등급: 고유
▶고유1: 경험치를 흡수한다.
▶고유2: 경험치를 보존한다.
▶고유3: 경험치를 사용한다.
▷특성1: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
▷특성2: 자연의 가호를 받는다.
▷특성3: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
▷종족1: 적응력이 우수하다.
▷종족2: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종족특성이 풍성하게 변화했다.
고유 3번째의 ‘경험치를 사용한다.’ 능력은 써봐야 알겠지만, 경험치를 흡수해서 보관한다는 설명은 이해가 쉬웠다.
그리고 이거랑 비슷한 효과가 이미 있다.
흡혈귀가 ‘피’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인간의 경험치를 빼앗거나, 치유사가 치료의 대가로 경험치를 받는 등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처럼 조건 없던 적은 없었다.
그 증거로,
1레벨→2레벨
경험치를 빼앗을 대상이 없음에도 나는 경험치가 올랐다. 자연에 흩어져 있는 힘을 흡수한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레벨이 상승한다니?
이건 기존의 능력치 시스템(법)을 이탈한 종족특성이었다.
그야말로 ‘자연인’다운 횡포!
뿌리부터 재구성되기 이전의 내 종족인 ‘카오스 휴먼’이랑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종류: 종족
▷명칭: 카오스 휴먼
▷등급: 고대
▶고대1: 모든 속성을 익힐 수 있다.
▷고대2: 가능성이 희망적이다.
▷특성1: 혼돈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2: 파괴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3: 망각 효과가 상승한다.
▷종족1: 적응력이 우수하다.
▷종족2: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종족 ‘휴먼’의 기본효과 빼고는 싹 바뀌었다.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모든 속성을 익힐 수 있는 사기적인 종족효과가 사라지면서 신성Z과 마기Z가 충돌하기 시작한 탓이다.
우드득! 콰광!
이건 좀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일단은 블랙박스의 활성화를 해제해서 두 스킬을 봉인했다.
그나저나 1레벨이라?
마왕 페도나르를 상대하려면 레벨은 낮을수록 좋지만, 이건 너무 내려간 게 아닐까.
어디서 경험치 수급을….
“용사님! 깨어나셨군요! 잘 주무셨나요?”
반듯하게 누워있는 내 목젖 위에 엉덩이 깔고 앉아있던 최초의 정령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아줌마. 내가 얼마나 잤지?”
“5년쯤 된 것 같아요.”
“맙소사….”
눈 깜짝할 사이에 판타지 경력이 5년이나 불어났다.
남들은 2~3년이면 지구로 귀환하는데, 나는 벌써 25년이나 체류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이 정령 아줌마는 뭐지…?
“내 목 위에서 뭐 하냐?”
“작년쯤이었나요? 용사님의 몸에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특히, 당신이 내쉬는 달콤한 숨을 맡으면 그 향에 저도 모르게 취한답니다. 그래서 가장 냄새 맡기 좋은 명당을 최초의 정령이란 권한으로 독점 중이에요.”
...인간 남성의 입 냄새가 기분 좋다니?
이 정령은 변태가 틀림없다.
“독점 중이란 건 또 뭔데?”
“말 그대로예요. 당신의 몸을 한 번 보세요.”
“...그렇군.”
내 팔다리에 정령들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종족특성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 영향인 듯했다. 양심적인 환경파괴범인 내가 정령들로 하렘을 차릴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생각난 김에 최초의 정령도 살펴봤다.
▷종류: 종족
▷명칭: 퍼스트 스피릿
▷등급: 고유
▷고유1: 경험치를 생산한다.
▷고유2: 소멸하지 않는다.
▷특성1: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
▷특성2: 자연의 가호를 받는다.
▷종족1: 친화력이 우수하다.
▷종족2: 하나의 속성에 특화한다.
내 종족특성의 일부는 그녀에게서 기인한 듯했다. 수많은 정령에게 둘러싸인 환경이 내 뿌리부터 재구성에 영향을 준 것이다.
그 점은 매우 고맙다만,
“아줌마, 비켜. 너희들도.”
나는 귀찮은 파리 쫓듯 팔을 휘휘 저으며 일어섰다.
최초의 정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방석 취급하며 엉덩이를 깔고 앉았고, 정령들은 까르르 웃으며 내 몸 주위를 정신없이 돌기 시작했다.
2레벨→5레벨
이 와중에도 레벨은 부지런히 올랐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정령들이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속성의 힘이 고밀도의 경험치로 치환되어 내게 흡수되고 있었다.
끊임없이.
나는 찬찬히 고개를 좌에서 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내가 방금까지 누워있던 장소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한 화원의 정중앙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산산했다.
영재ZZ 효과로 내가 잠든 후에 옮겨진 게 아니라면, 정령들이 집단거주하면서 이 일대가 지상낙원으로 변한 것이다.
“내가 잠든 5년 동안 일어난 큼직한 사건들을 이야기해줘.”
“네, 용사님.”
최초의 정령이 세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사건은 없었다.
용사력 11년.
숯덩이처럼 활활 타버린 남대륙으로 모험을 떠난 용사 지크가 5대 재앙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검왕 알렉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허리디스크가 와서 전사(戰死)!
하필이면 용암에 빠져 죽는 바람에 시체를 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성녀A가 알렉스를 부활시킬 수 없었다.
용사력 12년.
거의 모든 육지가 물에 잠기고 다도해(多島海)로 변한 동대륙으로 용사 지크가 넘어갔다.
인어공주 아쿠아의 활약으로 5대 재앙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 하지만 그녀는 유감스럽게도 민물인어였다.
바닷물에 너무 장시간 노출되어 탈진한 아쿠아는 수호신의 죽음에 분노한 바다인어들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소금에 절여졌다.
용사력 13년.
용사 지크는 성녀A와 라누벨을 이끌고 죽은 자들의 땅으로 변한 서대륙으로 이동했다.
강력한 신성을 보유한 성녀A는 끝없이 몰려오는 좀비들을 상대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5대 재앙마저 토벌!
하지만 죽어가던 5대 재앙의 영혼이 탈진한 그녀의 육체에 침투하면서 비극이 반복됐다.
용사 지크의 선택은?
새로운 5대 재앙이 된 성녀A를 라누벨이 막는 틈에 그는 중앙대륙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어여쁜 12살 연하의 공주랑 결혼했다.
서대륙에 홀로 남은 라누벨은?
타락한 성녀A를 끌어안고 자폭했다.
“거참! 나보다 더한 놈일세!”
1회차에서 나도 적지 않은 동료를 떠나보냈다.
하지만 나는 지크랑 달랐다.
내가 약하거나 멍청해서 동료를 죽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원인은 언제나 본인들의 부주의나 잘못된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아줌마. 병신 지크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어?”
“으음…. 아! 있어요.”
용사력 14년.
평화로운 북대륙에서는 건강한 황자(皇子)를 출산한 검희가 섭정(攝政)하고 있었다.
그녀는 2년 만에 북대륙을 통일했다.
골렘의 힘을 온전히 흡수한 북대륙 통일제국의 군사력은 5대 재앙마저 도망칠 정도라고 한다.
“마왕님은?”
나는 정령의 설명을 끊었다.
북대륙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팔랑팔랑~
어느새 등에 돋아난 정의로운 날개가 간질간질했다. 당장 북대륙으로 날아가고 싶다고….
최초의 정령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정했다.
“그쪽은 전혀 모르겠어요. 마기나 신성이 짙은 장소는 제 아이들이 오랫동안 머물 수 없으니까요.”
“그렇군.”
“하지만 용사 지크의 이야기라면 잘 알아요! 북대륙의 통일제국에 자극받은 그는 중앙대륙을 정략혼으로 묶었어요. 거절하는 왕국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빠르게. 지크는 지난 1년 동안 결혼만 8번 했고, 미녀로 구성된 친위대도 있어요.”
여기까지 들은 나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심지어 끝난 게 아니었다.
“용사님. 아주 좋은 시기에 깨어나셨어요. 지크가 중앙대륙의 각국에서 차출한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침공해오는 중이거든요. 인간을 배신한 요정 종족을 전부 노예로 만들겠대요.”
“얼씨구?”
자기가 가장 먼저 인간을 배신해놓고 뭔 개소리래?
그때였다.
“용사님! 용사님!”
요정왕국 공주님이었던 실비아가 나를 부르며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옷차림이 석기시대의 원시인이랑 비슷했다.
얄팍한 속옷도 안 입었다.
“야. 옷차림이 그게 뭐냐?”
“고결한 정령님들이랑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기 위해….”
말하면서 눈가를 파르르 떠는 걸 보니, 이 난폭한 요정이 정말 원해서 원시인 복장을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종족: 아크 엘프
▷레벨: 647
▷직업: 노예(경험치 50%)
▷스킬: 매력S 정령A 채집A 무용A 아부B…
▷상태: 다급
지난 5년 동안 열심히 노예로 복무한 걸까?
실비아는 과거의 SS등급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스킬 정령을 A등급까지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스킬 구성을 보니, 고생 꽤 한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왜 불렀냐?”
“아차! 저희 요정들을 제발 구해주세요! 지크가 저에게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어요. 용사님, 당신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이 몸이라도….”
“열성인자로 가득한 네 몸은 됐어.”
0.1초의 고민조차 없이 단호하게 사양하겠다.
▷종류: 종족
▷명칭: 아크 엘프
▷등급: 희귀
▷희귀1: 생명력이 무한하다.
▷특성1: 청력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2: 매력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3: 영재 효과가 상승한다.
▷종족1: 생명력이 우수하다.
▷종족2: 보정된 가능성을 내포한다.
자세히 살펴본 ‘아크 엘프’의 종족특성은 상당히 훌륭하지만, 판타지 능력치가 전부는 아니다.
내가 관찰해본 실비아의 유전자는 매우 저질이다.
“그, 그런…!”
“하지만 경험치에는 관심 있지.”
나는 실비아의 도톰한 입술을 잽싸게 훔쳤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던 그녀는 당황했지만, 처음뿐이었다. 거부하지 않고 빠르게 적응했다.
아예 내 목에 양팔을 두르며 적극적으로 임했다.
“으음.”
“씁-!”
하지만 내 목적은 그녀의 몸이 아닌 경험치였다. 착각은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다.
“우웁…?!”
용사 지크랑 꽤 연습했었는지, 세 치 혀가 예사롭지 않은 실비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실컷 즐기고 다 빨린 후에 깨달은 듯했다.
강한수: 7레벨→ 647레벨
실비아: 647레벨→1레벨
종족 ‘자연인’의 경험치 흡수율이 매우 높았다.
익숙한 키스로 흡입해서?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봐야 명확해지겠지만, 현재로선 매우 만족스러운 종족특성이었다.
털썩!
갑작스러운 레벨 하락으로 무기력증에 빠진 실비아가 꽃밭 위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반대로 나는 힘이 넘쳐났다.
“자! 선불도 받았으니 지크를 잡으러 가볼까.”
흡수한 경험치를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실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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