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07화 (107/430)

 107화

[9회차] 주인공이 죽으면?

“용사님. 이대로 지크를 묻어버릴까요?”

최초의 정령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지크는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죽이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동창A가 얼음공주를 자극했다가 꽁꽁 얼어붙었을 때도 세계는 멀쩡히 유지됐었으니까.

용사와 마왕.

이 구도가 깨져도 판타지 세계가 유지되는지 확인하려면 ‘용사 강한수’까지 깔끔히 사라져야 한다.

예전에는 확인이 어려웠다. 내가 죽어서 없는 세계가 존속되든 멸망하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죽지 않고도 확인할 방법이 생겼다.

나는 블랙박스를 활성화했다.

용사→마왕(용사→레벨↓)

지구에서 마왕이 됐었던 이후부터, 나는 블랙박스를 켜면 직업이 용사에서 마왕으로 바뀌게 설정됐다.

블랙박스를 끄면 다시 용사로 되돌아가고.

이러면 내가 굳이 죽지 않아도 실험해볼 수 있다.

다만,

파지지지직-!

신성Z와 마기Z, 두 초월영역 스킬이 충돌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속성을 익힐 수 있게 해주는 종족 ‘카오스 휴먼’이 아니게 되면서 마찰이 생기는 것이다.

이대로 계속 놔두면 내 몸이 상하리라.

“그렇다면 조치해야지.”

나는 종족특성으로 ‘자연의 가호’를 받는다.

그렇기에 자연의 법칙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신성과 마기.

서로 상충되는 두 힘을 가상의 공간에 둥글게 공처럼 응축한다고 연상한 후, 그 둘 사이에 ‘나’라는 중심축을 놓았다.

어울리지 않는 두 힘은 서로 나를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것 때문에 계속 충돌했던 거고.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주의 항성과 행성이 원심력과 중력의 균형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듯이, 신성과 마기가 상쇄되며 안정됐다.

그러나 이걸로는 부족하다.

상쇄된다는 건, 힘의 중화로 약화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변수를 추가했다.

항성인 태양 역할을 하는 ‘나’를 중심으로 행성이 둘뿐인 현재는 너무 허전하잖은가?

다른 속성을 첨가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크기는 초월영역에 접어든 두 힘보다 작았지만, 이것들이 스펀지처럼 빛(신성)과 어둠(마기)의 충돌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줬다.

“이거, 멋지군.”

내 몸속에 소우주가 형성됐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빛, 어둠.

7가지 속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성장하거나 진화할지는 모르겠지만, 큰 이변이 없다면 진짜 우주처럼 아주 천천히 진행될 것이다.

아무튼,

급한 불은 껐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실험이다.

“종족과 직업의 연관성을 알아볼까나~”

이건 앞으로 내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내가 실비아의 경험치를 온전히 흡수하고, 지크의 친위대를 쓰러트리며 얻은 경험치의 총량을 보고 생각한 가정은 총 3가지.

가정1) 5+95=100

합 연산이다.

일반적인 경험치 획득률을 1%라고 가정했을 때, 용사의 특전 5%와 자연인 종족특성 95%가 합쳐서 100%가 된다는 가정이다.

이러면 용사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다.

반면,

가정2) 5*20=100

곱 연산이라면?

용사의 특전은 일반 경험치를 5배로 뻥튀기해준다. 이걸 자연인 종족특성이 20배 뻥튀기해서 100배가 된다는 계산법이다.

이러면 용사를 포기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가정3) 100(5)=100

합집합이다.

대상이 가진 경험치 총량은 100%를 넘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100% 흡수하는 자연인 종족특성 때문에 용사의 특전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가정이다.

이거라면 직업 용사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마왕이랑 싸울 때 빼고는.

“곱 연산만 아니면 좋겠네.”

가정1의 95%나 가정3의 100%는 큰 차이가 없다. 둘 중 하나라도 맞다면 직업 용사를 과감히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걸 당장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경험치 수급으로.

“지크! 위대한 실험에 널 초대할게!”

내 레벨이 높아진 탓에 레벨 낮은 대상의 소소한 경험치로는 구분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고향별 친구를 동원하기로 했다.

친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커억-?! 가, 강한수···.”

내 손에서 멋대로 미끄러진 성검 뉴클리온이 용사 지크의 심장에 우연히 박혔다.

지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숨이 멈췄다.

행복한 에필로그도 불만이면 어쩌라고?

“지크가 죽어서 아쉽네요. 깊은 땅속에 가둬두고 자연을 파괴한 대가를 똑똑히 치르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위대한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영혼에 각인시켜주고 싶었거든요.”

최초의 정령이 입맛을 다셨다.

다른 정령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지크를 편안히 죽여준 걸 탓하진 않았다.

왜냐?

나는 정령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령을 때리면 ‘악의적인 폭력’이지만, 내가 정령을 때리면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1052레벨→1778레벨

지크의 경험치가 내게 흡수됐다.

그가 999레벨을 넘긴 탓에 온전히 전부 흡수했는지는 정확히 측정할 수 없지만, 순수한 ‘용사’로 얻을 수 경험치의 양은 한참 초과했다.

이건 경험치 5배로 절대 나올 수 없는 성장이었다.

앞으로 내게 레벨은 덧셈과 뺄셈의 숫자놀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용사 직업이 무의미해졌다.

▶피로: 정말 오랜만이에요! 강한수 생도님!

오잉? 교생 아가씨. 어디에 숨어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우울: 선배님이 인수인계하신 지크 생도를 따라다녔어요. 잘 어르고 달래서 5대 재앙을 쓰러트리는 것까진 어떻게든 성공했는데, 강한수 생도님이 붙여주신 동료들은 다 죽고···. 하아···.

지크가 죽으면서 도덕 선생이 떠넘긴 수업도 끝난 모양이다.

쯧쯧.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긍정: 말도 마세요! 지크 생도의 머릿속에는 교미밖에 들어있지 않아요. 본인은 이미 강하다면서 수련은 하지 않고 여자들이랑 시시덕거리기만···. 그러다가 5대 재앙이랑 싸울 때는 빌빌거리며 동료들의 힘을 빌렸죠. 스트레스로 보약만 10번은 달여먹은 것 같아요.

...교생 아가씨가 참 열심히 일했네.

▶침울: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열심히 일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죄송하지만, 강한수 생도님을 보조할 때보다 100배는 부지런히 했어요. 사전답사와 자료조사는 기본이고, 생도의 꿈에 천사로 나타나서 성욕을 잠재우는 꼼수도 몇 번 썼어요.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정반대네요. 그래서 제 참견이 지크 생도를 망쳐놓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저는 선생이 될 자격이 없는 걸까요···? 훌쩍!

교생 아가씨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듯했다.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덕 선생이 교생 아가씨에게 지크를 떠넘겼을 때는 이미 세상이 망하기 직전이었다.

이걸 올바르게 인도하기란 불가능하다.

역으로, 나는 교생 아가씨를 칭찬해주고 싶다.

도덕 선생이 맡았을 때는 모험 한 번 안 하고 요정왕국에 틀어박혀서 교미에만 관심 있던 지크가, 무려 3개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5대 재앙을 쓰러트렸기 때문이다.

물론, 동료들의 희생이 크긴 했지만.

그러니 교생 아가씨. 자신감을 가지라구!

▶감사: 정말 고맙습니다, 강한수 생도님. 조금은 위로가 됐어요. 이러려고 찾아온 건 아니었는데···.

음? 그러면 뭣 때문에 온 건데?

▶대답: 마왕에게 대적할 용사가 죽어버린 이 세상은 곧 사라질 거예요. 강한수 생도님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계시지만, 시스템이 용사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아요.

설마···?

블랙박스를 활성화한 내 현재 직업은 ‘마왕’이었다.

그리고 ‘용사’ 지크는 내 손에 죽었다.

▶설명: 전투 중에 일시적인 심장마비가 오거나, 일부 한심한 학도들은 간혹가다가 절세미녀를 보고 숨이 멎기도 해요. 그래서 대략 10초쯤 부활할 유예기간을 주는데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되살아나지 않으면 시스템이 완전히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재시험으로 넘어가요.

교생 아가씨. 이렇게 알려줘도 돼?

▶부정: 당연히 안 되죠. 학도들이 스스로 유추하는 것까진 막을 수 없지만, 교직의 관계자가 직접 가르쳐줘선 절대 안 되는 중요한 정보예요. 하지만···. 강한수 생도님은 비밀 친구니까요. 조금 전에 위로해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정말로 선생의 꿈을 접었을지도 몰라요.

그렇군. 하지만 교생 아가씨.

위험을 무릅쓰고 알려준 건 정말 고마운데, 너무 늦고 말았다.

이미 시스템이 내게 통보 중이었다.

▷용사님. 모험은 즐거우셨나요?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당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배우며 함께 성장하지 못한 당신은 유감스럽게도 사악한 마왕을 처치하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지금부터 성적을 알아볼까요?

용사가 모험하다가 죽으면 이런 메시지가 뜨는 모양이다.

지크도 이걸 보고 있을까?

▷이름: 강한수

▷전투력: S

▷업적: S

▷평판: S

▷인성: A

▷비고: 어째서 또 들어온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다. 그러니 지구로 보내달라구!

▷불합격했습니다.

결과를 통보받은 나는 현기증이 몰려왔다.

야만적인 판타지아 차원에서 연약한 아기부터 시작하여 무려 8년 동안 생활한 이번 8회차 성적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트리플 S학점!

판타지아 북대륙에서 아기의 몸으로 3년 동안 부지런히 일하며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았으니 당연했다.

판타지 신의 주관적인 편파판정이 가장 심했던 인성 과목마저도 A학점이 나왔다.

그런데도 불합격이라니!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사유: 당신은 남을 위하는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그 점은 존경받아야 마땅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원통하게 패배한 당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성장하고 강해지세요.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구해주세요!

▷재시험을 시작합니다.

판타지 시스템이 ‘S급 용사님 사망!’으로 처리한 것이다.

블랙박스를 비활성화한 상태에서 지크를 죽였다면, 내가 ‘용사’이기에 이런 오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활성화하는 바람에 ‘마왕’으로 인식됐다.

“딱 하나 알았네.”

용사와 마왕.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

이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었지만, 졸업할 기회를 눈앞에서 놓쳤다는 사실이 대단히 뼈아팠다.

▷교직원 일동이 당신의 귀환에 절망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파견할 전문교사가 없습니다.

재시험을 뜻하는 회귀의 빛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건 저항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존재가 사라진다···.

저장해둔 게임 데이터를 삭제하듯이 세상이 지워지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남아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최초의 정령이 말했다.

“세상에 정말 오랜만에 나왔는데 바로 붕괴해버리네요. 용사님. 다시 절 구해주실 거죠?”

“내가 뭐하러?”

회귀하면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곧 시작될 9회차의 ‘최초의 정령’은 제삼자나 다름없다. 정령의 총배설강 궁금증도 풀렸고.

8회차의 모든 존재는 곧 소멸한다.

“정말로 그럴까요?”

“뭐-?”

“기다리고 있을게요, 용사님.”

“아줌마! 떡밥 뿌리지 말고 당장 설명해! 안 그러면 손가락으로···.”

빛이 내 몸을 완전히 감쌌다.

*

판타지아 북대륙의 마법왕국 차원이동 마법진이나, 어느 누추한 마을의 침대 위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공주님의 포근한 뱃속도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세월이 꽤 흘렀지만,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최초로 납치된 이 장소를.

중앙대륙의 만두왕국이었다.

“환영합니다, 용사님!”

판타지아 서대륙에서 타락한 성녀A를 끌어안고 자폭했다던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면서 내게 인사했다.

9회차가 시작됐다는 증거.

어디에 화풀이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망할···.”

내 손으로 지구행 열차표를 찢다니?

8회차 때, 내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을 것이다.

어째서 나는 8회차 성적이 나쁠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쉽게 포기했단 말인가?

이게 다 지크 잘못이다.

녀석이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다.

▶의문: 지크 생도가 그랬었나요?

교생 아가씨. 내가 똑똑히 들었다구!

어여쁜 응원단을 잃은 용사 지크가 마음의 소리로 말했다.

“용사님, 슬슬 정신을 차려주세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소환돼서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이곳은 판타지아. 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랑 다른 차원입니다.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옷부터 내놔라. 이 관음증 년아.”

나는 정의로운 날개를 치마처럼 둘러서 아래를 가렸다.

8회차가 정상적인 소환이 아니었던 탓에 ‘교복 차림의 17살 청소년’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몸.

정자(精子)로 회귀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죄송해요. 준비를···.”

“그러면 옷 대신 이 왕국이라도 내놔.”

“...예?”

야만적인 왕궁기사들과 라누벨 따위에게 알몸을 보인 내 정신적인 피해보상을 받아야겠다.

내놓지 않으면?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1860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A

▷상태: 짜증

8살짜리 용사님이 용서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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