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9회차] 처음처럼
1860레벨.
레벨이 이쯤 되면 스킬이 없어도 충분히 막강해진다.
물론, 레벨만 높고 방어계통 스킬이 형편없었던 요정왕은 허무하게 죽어버렸지만, 그건 종족 자체가 비실비실한 요정이었던 탓이다.
요정은 마법이나 내공 같은 판타지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은 무방비상태에서 칼에 찔리면 쉽게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네츄럴 휴먼.
겉보기엔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인간이지만, 몸무게는 비슷한 체구의 인간보다 약 3배쯤 무겁다.
내 몸을 구성하는 분자구조의 밀도가 높으면서도 특수한 탓이다.
내장기관과 피부는 질기고, 뼈는 금속처럼 약간의 탄성을 보유하면서도 단단하다.
여기에 재생력과 면역력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소환한 용사가 역모?!”
“용사? 정말로 용사가 맞긴 한 건가?!”
“라누벨 님! 당신은 무엇을 소환한 겁니까!”
나와 라누벨을 둘러싼 채 잠자코 듣고 있던 왕궁기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무척 가소로웠다.
▶빼꼼: 강한수 생도님.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지크 생도를 5년 동안 맡아보고 깨달았답니다. 강한수 생도님이 얼마나 훌륭한 용사님이었는지를요! 그렇다고 이 우매한 기사들을 죽이실 건 아니시죠? 옷 대신 나라를 달라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요.
교생 아가씨가 뭘 모르네.
지구에는 옥수수를 주고 다이아몬드를 받는 환상적인 외교로 유명한 지도자도 계신다.
패왕 간디라고….
안 바꿔주면 옥수수 대신 핵미사일이 날아온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웬만한 연예인보다 유명하시다.
▶경악: 정말 무시무시한 지도자이시네요…. 지구가 여태 멀쩡한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강한수 생도님. 정말로 그런 패왕님을 본받으시겠다는 건 아니시죠?
물론이다.
인성 점수는 소중하니까.
그래서 블랙박스를 활성화했다.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1860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영재ZZ 신성Z 마기Z 정령MAX 축복MAX 날조MAX 사랑SS 몰살S 영생S 불로S 불사A ■■A 우정A 통역A 행운A 농사B 낚시B 채집B 채광B 사육B 희망C 지배C 창고C 무한D 축제D 위압E 패기E 질주E 냉정F 통솔F 내정F
▷상태: 성검, 마검, 성녀
내가 잠든 5년 동안 스킬들이 멋대로 성장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B등급의 다섯 생산계통 스킬이다.
농사B 낚시B 채집B 채광B 사육B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만, 다섯 속성의 정령이 나를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숙련도가 오른 듯했다.
생산계통 스킬은 얻어보긴 처음이라서 좀 더 세세하게 살펴보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초 미만.
그 전에 스킬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꿇어라.”
이 한마디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마기Z가 나를 ‘고귀한 왕족’으로 격상하고, 신성Z는 ‘신성한 존재’임을 주위에 각인시킨다.
이 위에 날조MAX로 나를 ‘절대적인 상급자’로 한 번 더 덮어씌우면서, 마무리로 축복MAX가 퍼포먼스처럼 내 후광을 비추고 우매한 자들을 축복하며 고양한다.
지구인이라면 저항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860레벨로 강화된 초월영역과 일반영역 최대치 스킬을 견딜 수 있는 판타지 원주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오오!”
“아아!”
쨍그랑, 털썩!
망설임 없이 손에 쥔 장검을 버린 왕궁기사들이 주저앉듯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빛과 어둠을 다스리는 ‘신성한 마왕’을 영접한 그들의 두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존의 충성 따위는 상대가 안 됐다.
6초, 7초, 8초-
나는 10초가 흐르기 전에 블랙박스를 종료했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소환된 용사가 일시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뿐이라고 착각한 시스템은 ‘판타지 세계 소멸’을 발동하지 않았다.
내 계획대로다.
8회차에서는 이 시스템을 몰라서 이처럼 재시험을 보게 됐지만, 알게 된 현재는 다르다.
영리하게 회피하면 된다.
▶감탄: 놀라운 꼼수네요!
교생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온종일 블랙박스를 켜고 끄기를 반복할 순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의문: 뭔데요?
첫째. 귀찮고 번거롭다.
게임 매크로(macro) 같은 자동반복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지만, 블랙박스는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기에 그럴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블랙박스를 끄거나 켤 때 정신력 소모가 상당하다. 9초를 세면서 생활할 순 없다.
깜빡해서 10초를 넘기면 세계 멸망?
농담이 심하다.
둘째. 박탈감과 허탈감이 심하다.
블랙박스로 초월영역 스킬들이 봉인될 때마다 오는 무기력증은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다.
주고 뺏기를 반복한다고 생각해보라.
먹이로 장난치면 순종적인 애완동물도 발끈해서 주인의 손을 깨물지 않는가?
9초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긴 싫다.
셋째. 내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
변화한 종족 ‘자연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 최종적인 목표는 판타지 능력치에서 완벽하게 독립하는 것이다.
스킬의 유용성과 편리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나를 납치한 판타지 신의 장난감이 되는 건 사양이다.
그러자면 판타지 능력치에 의존 안 하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
지구에선 스킬과 레벨 없이도 잘 살았잖은가?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1860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A
▷상태: 마검, 성녀
그래도 비상시에 대비해서 광선검과 히프리아를 언제든 소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성검 뉴클리온을 배제한 이유?
수련에 도움 안 될 정도로 성능이 지나치게 우수하기도 했지만, 광선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탓이다.
광선검은 칼날이 따로 없다.
대신, 자원계통의 힘을 주입해서 빛의 칼날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바로 이렇게,
1860레벨→1859레벨
우우웅-
나는 소환한 광선검에 경험치를 주입했다.
고작 1레벨이지만, 상위레벨로 올라갈수록 1레벨 올리는데 필요한 경험치의 양도 많아진다.
그렇기에 이 1레벨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찬란한 녹색 광채를 뽐내는 광선검을 기습적으로 휘둘렀다.
유일하게 엎드리지 않은 라누벨을 향해.
촤악-!
내 광선검은 라누벨의 왼쪽 어깨부터 심장까지 수직으로 벴다. 도중에 초월적인 힘으로 가로막히는 낌새는 없었다.
200레벨 학자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죽었다.
너무나 평범하게.
“...아닌가?”
용사를 소환하는 라누벨.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나조차 아직 못하는 차원이동을 실현할 수 있는 마법사다. 유감스러우나 실력은 우수한 현자도 차원이동 마법만은 난색을 표현한다.
내가 2회차부터 차원이동 할 방법을 찾지 않고 졸업에만 집중한 것도 같은 이유다.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보상 외의 방법은 1회차에서 열심히 찾아봤었으니까.
그리고 전부 실패했다.
장거리 공간이동을 차원이동이라고 속이는 사기꾼들이었다.
“흠.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나….”
지구로 돌아가는 진짜 방법은 라누벨만 알고 있었다.
역방향 차원이동 마법은 모르지만, 판타지 신에게 신탁을 받은 그녀는 “용사님! 마왕을 쓰러트리면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라면서 내게 약을 팔았다.
1회차의 나는 그 말에 희망을 걸었다.
정말이기도 했고.
▶긍정: 신탁으로 전달한 사항이니까요. 판타지아 세계가 마음에 든 용사님들은 자발적으로 마왕을 쓰러트리지만, 강한수 생도님처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분들도 간혹 있었어요. 이분들은 마왕을 쓰러트릴 동기가 부족해서 차원이동 방법만 찾았죠. 그래서 일찌감치 신탁으로 유일한 방법을 알려준 거예요.
교생 아가씨의 설명처럼, 라누벨이 가르쳐준 방법이 유일했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회귀할 때마다 라누벨은 꼭 있었다.
그녀가 용사를 소환하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북대륙의 어느 마을에서는 ‘누추한 여동생’으로 출연했었다.
반면,
다른 동료들은 설정이 바뀐 적이 없었다.
여러모로 라누벨만 특별했다.
“그래서 초월적인 무언가로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귀여운 척하는 가증스러운 도굴꾼이었던 걸까?
▶난색: 강한수 생도님은 미녀에게도 정말 가차 없으시네요. 지크 생도는 동료의 실룩거리는 뒤태를 감상하는 낙으로 간신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모험할 수 있었는데.
지크 대신 교생 아가씨가 모험한 것 같네!
나는 라누벨이 내 기습공격을 막고는 “이런! 이 진리의 라누벨 님이 흑막인 걸 들켰나!”라면서 귀여운 척을 그만두고 아저씨 말투로 바뀌길 기대했었다.
그러나 허무하게 죽었다.
내 예상이 크게 빗나간 셈이다.
쓰러진 라누벨 주위로 붉은색 피가 낭자했다.
“헉!”
“맙소사….”
“이런!”
엎드려서 그 광경을 본 왕궁기사들이 경악하며 혼란에 빠졌다. 이런 용사님은 처음 본 모양이다.
▶난감: 당연히 봤을 리 없죠! 역대 기록을 다 살펴봐도 시작부터 귀여운 동료를 죽이는 용사님은 강한수 생도님이 처음일 거예요.
걱정하지 마, 교생 아가씨.
다 해결책이 있다.
“히프리아.”
펄럭!
내 부름에 0.1초의 지연도 없이 응답한 성녀 히프리아가 3쌍의 날개를 우아하게 펼치며 등장했다.
“시작부터 화끈하시네요, 주인님. 후후.”
“뭐…. 그렇게 됐네.”
라누벨을 죽이고 확인해볼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동료를 죽이면 안 돼!” 같은 묘한 정신간섭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종족 ‘자연인’이 된 현재는 그런 정신적인 속박과 강요에서 해방됐다.
어디까지나 내 기분 탓일 수도 있다.
“라누벨을 부활시킬게요.”
“그래.”
이럴 때를 대비해서 라누벨의 경험치도 흡수하지 않았다.
팟!
히프리아의 손에서 성스러운 빛이 쏟아졌다. 직업 성녀만의 고유능력인 ‘부활’이었다.
성스러운 빛이 라누벨의 상처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내 광선검에 어깨부터 심장까지 끔찍하게 갈라졌다. 그 과정에서 피부만이 아니라 쇄골(鎖骨)과 척추, 허파 등도 손상됐으며, 심장은 아예 사라졌다.
하지만 성녀의 힘은 사망자의 상처만이 아니라 사라진 신체와 장기까지도 백시멘트처럼 메꿔준다.
레벨만 충분하다면.
▷종족: 휴먼
▷레벨: 134
▷직업: 학자(지식=마술↑)
▷스킬: 마법A 마술A 매력B 요리B 불로C…
▷상태: 혼란
라누벨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내 공격이 강력했던 만큼 부활의 대가 또한 컸다. 내가 그녀의 경험치를 흡수하지 않았음에도 200레벨에서 단숨에 134레벨까지 떨어졌다.
부활한 라누벨이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너무해요, 용사님! 라누벨은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뿐이라고요! 아! 맞다! 아름다운 천사 성녀님!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용사의 전설을 추적하는 고고학자 라누벨이라고 해요! 라누벨은 고대언어로 ‘진리’란 뜻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본색은 무슨.
라누벨은 라누벨일 뿐이었다.
“들어가.”
“네, 주인님.”
나는 기운 빠지는 어조로 히프리아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러자 라누벨은 또 야단법석을 떨었다.
“용사님! 용사님!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 성녀님은 정령인가요? 어떻게 계약하고 소환하신 거예요? 아! 혹시, 골렘인가요?! 그건 그것대로 굉장한데요! 살아있는 천사 같았어요! 용사님이 원래 살던 세계의 주민들은 모두 용사님처럼 굉장한가요?”
“닥쳐.”
“하지만 용사님, 라누벨은 너무너무 궁금- 아얏?!”
“좋게 때릴 때 닥쳐.”
눈치 빠른 왕궁기사 중 하나가 왕궁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지시해서 내가 입을 옷을 가져왔다.
쉽고 빠르게 입을 수 있는 평상복이었다.
혼자 입으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닌 귀족의 옷은 피했다. 판타지아 문화를 모르는 용사를 배려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가장 화려한 귀족의 옷으로 내놔.”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판타지아 세계 25년 경력의 용사님에게는 문제없다. 모든 대륙의 복식(服飾)을 눈감고 입을 수 있다.
나이는 8살이지만, 경력은 25년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그 슬픈 사연을 이야기로 풀면 판타지 소설책 10권은 나올 것이다.
*
나는 왕족에 버금가는 화려한 옷을 입고 만두국왕을 만났다.
옥좌에 권태롭게 앉은 왕(王)보다 더 지배자 같은 나의 위엄에 알현실이 혼란에 휩싸였다.
내 태생은 북대륙 황제.
갓난아기 때부터 나라들을 정복하며 스스로 황제까지 오른 몸이다.
선왕이 붕어하면서 옥좌를 손쉽게 물려받은 금수저 만두국왕이랑 격이 다르다.
이야기 흐름은 2회차랑 비슷하게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는 유일한 용사다! 죽일 테면 죽여봐!”라고 배짱 좋게 나섰던 2회차랑 달랐다.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기선제압이 됐다.
그 결과,
찰그랑!
2회차처럼 두둑한 돈주머니를 받았다.
“용사님! 어디 가세요?”
쪼르르 따라온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며 내게 질문했다. 나에게 조금 전에 살해됐었음에도 그녀는 변한 게 없었다.
용사님을 던전 함정 쪽으로 뻔뻔하게 안내하는 라누벨다운 정신력이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답해줬다.
“암시장.”
같은 상황이라도 경력 10년과 25년 차의 대처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때의 나는 지금이랑 비교하면 너무나 미숙했다.
그래서 2회차의 실수를 바로잡기로 했다.
즉, 복습이다.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