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9회차] 용사님의 고찰
2회차 때, 나는 왕궁의 알현실을 나오자마자 돈주머니를 들고 만두왕국 수도 시장으로 향했었다. 거기서 낡은 주점의 바텐더 토니를 만나서 암시장 입장권을 따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미 암시장이 열리는 장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용사님. 여긴 숲인데요?”
자연스럽게 따라온 라누벨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다.
“라누벨. 왜 따라오냐?”
“라누벨은 용사님의 동료니까요!”
그 대답은 지난 25년 동안 지겹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살짝 질린 어조로 질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게 또 살해될 수도 있는데?”
이번 9회차에서 나는 처음으로 라누벨을 죽였다.
물론, 라누벨이 최초는 아니었다.
나는 1회차 막바지에 동료들을 기습으로 몰살시켰다.
2회차에서도 덤벼오는 요정공주 실비아를 죽이고, 검왕 알렉스도 ‘실전 같은 훈련’이라서 죽었다.
3회차에서는 빠른 경험치 수급을 위해 인어공주 아쿠아의 목을 부러트린 적도···.
...일일이 따져보니 참 많이도 죽였네.
하여간 라누벨은 처음이었다.
나를 납치한 시점에 100번 죽어야 마땅했지만, 당사자 관점에선 이유도 없이 살해된 셈. 그런데도 이처럼 태연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라누벨이 대답했다.
“라누벨은 용사님이 절 공격한 이유가 이해돼요.”
“...뭐?”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경계하는 게 당연하죠. 라누벨이 성급했다고 생각해요. 신전과 유적 등의 문언(文言)에 따르면, 막 소환된 용사들은 약하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용사님은 매우 강하시죠. 닭장에 용을 풀어놓은 셈이랄까요? 그리고 저처럼 매력적인 여자가 알몸을 가까이서 훔쳐보면 부끄러워서 손이 먼저 나갈 수도 있죠!”
논리적으로 진지하게 설명하던 라누벨이 어깨에 힘을 주며 우쭐대기 시작했다.
“바보니? 부끄럽다고 사람을 죽이진···. 음···.”
반박하려던 나는 말끝을 흐렸다.
1회차의 검희가 딱 그랬었다. 8회차에서는 내가 3살 미만의 귀여운 아기라서 칼부림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용사님. 숲은 왜 오셨어요?”
“산책.”
라누벨이 따라오겠다는 것까진 막지 않지만, 친절하게 설명해줄 필요성과 의무는 느끼지 못했다.
회귀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비밀이다.
미래의 정보를 독점해서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단지, 내 회귀가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이어질 “왜 회귀했는데요?”라는 질문을 받기 싫었을 뿐.
회귀는 자랑할 일이 아니다.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들만 회귀하기 때문이다. 쪽지시험 성적이 낮아서 재시험을 보듯이.
회귀는 부끄러워해야 할 굴욕이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처럼 “흐흐! 병신 같은 내 과거를 세탁하고 잘살아보자!”라며 기뻐할 일이 절대 아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 한다.
“산책이라면 더 좋은 장소를 알고 있어요. 용사님께 소개해주고 싶은 새로운 동료도 있고요.”
새로운 동료, 검왕 알렉스를 말하는 것이리라.
“됐어.”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기사단장 알렉스가 주최하는 오리엔테이션은 원래 5일 뒤였는데, 내 실력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연기됐다.
무려 30일이나.
힘의 균형이 깨진 탓이다.
조금 전에 라누벨도 말했듯이, 나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S급 용사님이라서 야만적인 무력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친분이라도 쌓아뒀으면 괜찮다.
약한 용사의 성장을 도우면서 빚을 지워두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시작해보기도 전에 실패했고, 만두왕국의 관점에서는 사자(마왕)가 무서워서 호랑이(용사)를 끌어들인 셈.
왕국 나름의 대비책을 짤 시간이 필요했다.
“와아! 용사님! 보세요! 정령들이에요!”
그때, 라누벨이 내 주위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더러운 도시 밖의 숲인 탓일까?
정령F→정령E→정령D
블랙박스를 활성화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자연인 냄새’를 맡은 정령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스킬 숙련도 또한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빨랐다.
“아아, 이 근방에 주둔 중인 건가?”
정령들이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것은, 이 근처에 정령사와 주술사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방증.
나는 히쭉 웃었다.
이 시기의 이 숲에 다수의 정령사와 주술사가 집결해있다면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난폭한 요정들!
왕국 수도의 서쪽 숲 지하에 숨겨져 있는 암시장을 습격하고자 실비아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모여있는 게 틀림없다.
노예처럼 부려지는 불쌍한 정령들까지.
하지만 내가 등장함으로써 요정들의 사악한 계획은 어려워졌다. 암시장까지 땅굴을 파야 할 정령들이 내게 싹 달라붙은 탓이다.
정령D→정령C→정령B
내 스킬 등급이 올라갈수록 요정들은 혼란에 빠지리라.
8회차의 실비아가 그러했듯이.
“당신은 누구죠?!”
“우리의 정령을 훔치다니!”
“인간이 먼저 습격을?!”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냄새에 유혹된 정령들을 추적해온 요정들이 사방의 나무 위에서 활시위를 당기며 나를 위협했다.
난폭한 요정다운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 판타지 야만인들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의는 항상 승리하기 때문이다.
정령B→정령A→정령S
요정들이 접근해오면서 정령들의 이주는 더욱 가속화됐다. 급격한 성장을 이룬 내 스킬 등급이 그 결과였다.
“정령들아! 돌아와~!”
“더러운 인간을 따라가면 안 돼~!”
“어째서 말을 안 듣는 거야?!”
요정 주술사와 정령사는 이미 공황에 빠졌다. 멀쩡히 나를 위협하는 자들은 궁수와 검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조금씩은 정령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당혹스럽긴 마찬가지.
“어떻게 이런 일이···?!”
요정공주 실비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많은 정령을 잃은 그녀의 충격이 가장 심하지 않았을까.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졌다.
나트륨과 탄수화물 함량이 높은 라면을 먹고 잠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볼일을 봤음에도 몸무게가 1kg이나 쪄서 심각해진 여학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름: 예시가 너무 무서운데요!
교생 아가씨도 라면의 공포를 경험해본 모양이다.
▶단호: 아니요. 없어요.
교생 아가씨.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구?
“요정 여러분. 한 번만 소개할 테니, 뾰족한 귀 씻고 잘 듣도록. 나는 선량한 귀족A라고 해. 내게 꼬리 치며 귀여운 척하는 이 여자는 음란한 시녀A. 왕국 수도에 사는 우리는 이 숲으로 목적 없이 산책하러 왔어. 이번에는 우리가 질문할 차례. 인간들의 땅에 난폭한 요정들이 왜 온 거지? 너희야말로 수상한걸.”
이것이 25년 경력 용사님의 어휘력이다!
요정들의 목적이 이 지하에 감금된 요정을 구출하기 위해서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선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른 척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라누벨이 음란한 건 사실이고, 귀족 복장을 한 내가 선량한 용사님인 건 하늘이 알고 있다.
암시장으로 산책 나온 것도 맞다.
어때? 교생 아가씨.
▶난감: 너무 솔직해서 문제 아닐까요?
...솔직해서 문제라고?
수족처럼 따르던 정령들을 잃고 얼굴색이 시커멓게 변한 실비아가 내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암시장으로 가는 저 인간 귀족이 무슨 사악한 술수를 부린 게 틀림없어! 저 인간을 제압하고 우리의 정령들을 되찾자!”
“네! 공주님!”
“인간! 내 정령을 돌려줘!”
실비아의 선동에 넘어간 요정들이 나를 공격하려 했다.
그때, 라누벨이 양팔을 벌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에요! 오해에요! 우리는 암흑상회의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정체를 감춰서 죄송합니다. 저는 고고학자 라누벨. 그리고 이쪽은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용사님이에요. 정령들은 용사님이 좋아서 쫓아온 것뿐이에요. 절대로 이상한 술수를 부린 게 아니에요!”
“바보야. 그걸 왜 말하냐?”
내가 ‘용사’란 사실은 비밀이다.
신탁으로 알려졌기에 마왕의 귀에도 이미 들어갔지만, 용사가 소환된 정확한 장소와 신상정보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용사의 정체를 감추는 이유?
마왕 페도나르의 위협 탓이다.
용사가 성장하기도 전에 암살당하는 수가 있다.
그 신사적인 마왕님은 암살 같은 치졸한 수법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회귀하지 않은 원주민들은 모른다.
그런데 라누벨이 멋대로 까발린 것이다.
라누벨만이 아니다.
용사의 동료들은 늘 이런 식이다.
내 의견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위기를 불러온다.
만약, 마왕 페도나르가 신사적인 인격자가 아니었다면, 며칠 이내에 999레벨 악마 암살자가 방문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충분히 강해서 괜찮지만, 알렉스에게 처맞기 바쁜 보편적인 1레벨 용사는 막을 수 없다. 사랑과 우정의 힘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내 1회차가 지옥 같았던 이유다.
▶의문: 왜요?
교생 아가씨. 잘 생각해봐.
지금이야 마왕 페도나르가 신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1회차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때, 내 위치가 악마들에게 알려졌다.
지구인의 감성으로는, 주민등록번호와 신용카드, 비밀번호 등의 신상정보가 전부 유출됐다고 상상하면 비슷할까?
1회차의 나는 밤마다 암살의 공포에 떨었다.
내성 스킬이 A등급에 오르기 전까지는 음식물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었다.
사람을 가까이할 때도 마찬가지.
내 방어계통 스킬을 관통할 암살 기술이 있는지 능력치를 꼼꼼히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멀리했다.
바텐더 토니가 유일한 예외 아닐까?
불안한 내 정신상태를 바로 알아본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공포에 삼켜져서 진즉 미쳐버렸을 것이다.
“저 인간이 용사라고···?”
“어째서 용사가 우리의 정령을···.”
“믿지 마! 용사란 증거도 없잖아!”
라누벨의 발언을 들은 요정들이 웅성거렸다.
요정공주 실비아가 대표로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용사고, 사악한 술수를 부린 게 아니라면, 우리의 친구들을 돌려주세요.”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논리였다.
이 요정들은 용사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생각하는 걸까? 용사이기에 가진 걸 내놔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정령S→정령SS
정령들이 떼쓰는 아이처럼 더욱 내게 달라붙었다.
하물며, 정령은 전투계열 스킬에 해당한다. 돌려준다면 내 정령 스킬 등급은 떨어지게 된다.
즉, 이 요정들은 용사가 강해지는 걸 방해하는 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다.
“잘 들어. 정령들은 내가 좋아서 따르는 거야. 너희가 정말로 정령의 친구라면 구슬리거나 부탁해서 직접 데려가.”
“역시! 술수가 틀림없어! 공격!”
이 시점에 나는 깨달았다.
난폭한 요정들에게 평화적인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
땅속에 숨겨진 암시장이라고 해서, 지상이랑 이어진 출입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공간이동 마법이 공짜라면 모를까, 아무리 보안을 중요시한다고 해도 상품까지 비싼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옮기는 건 수지타산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헉! 여긴 어떻게 알고 들어왔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당연히 경계도 삼엄한 편이다.
숲의 어느 깊숙한 장소.
암흑상회가 주최하는 암시장으로 내려가는 동굴 앞을 200레벨대 정예용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답했다.
“실례합니다. 요정들을 좀 팔고 싶은데요.”
예전 같으면 난폭한 요정들을 싹 죽여서 내가 용사란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졸업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9회차의 나는 관대했다.
▷종족: 엘프
▷레벨: 1
▷직업: 궁수(궁술=관통↑)
▷스킬: 궁술D 명중D 채집E 휴식E 검술F···
▷상태: 속박, 절망
목숨 대신 경험치만 가져갔다.
이 용사님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영광을 줄 수 없어서 살짝 유감이지만, 중요한 알맹이는 가져왔기에 큰 불만 없었다.
자연인은 정말 굉장하다.
판타지 야만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최적화됐다.
“으으으···.”
“으윽···.”
난폭했던 요정들이 얌전해졌다.
태생적으로 비실비실한 요정들이 1레벨로 떨어지면서 터무니없이 약해진 영향이었다. 지푸라기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었다.
숲에서 대충 구한 덩굴로 요정들을 굴비처럼 엮어서 암시장 입구까지 끌고 오는 내내 전혀 문제없었다.
딱 1명 빼고.
“용사님. 라누벨은 지금도 반대예요.”
라누벨이 성가시게 옆에서 쫑알댔다.
계속 떠들면 홀라당 벗겨서 요정들이랑 세트로 판다고 위협을 줘서 그나마 얌전해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요정을 파신다고요?”
용병의 보고를 받은 암시장 관계자가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는 포박된 요정들의 고급스러운 전투복과 양호한 건강상태, 수십에 달하는 숫자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암시장 관계자는 상대방의 레벨을 유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법도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마법 안경.
원리는 몸에 품고 있는 ‘경험치의 밀도’를 보는 것이다.
촌스러운 디자인의 저 안경을 쓰면, 적외선 망원경처럼 몸에 품은 힘이 녹색으로 표시된다.
레벨이 높을수록 녹색이 짙어진다.
요정들을 쭉 둘러보며 확인을 마친 암시장 관계자가 말했다.
“실례지만 손님. 요정들의 레벨이 너무 낮아서 좋은 가격은 못 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파시겠다면···. 헉?!”
난색의 어조로 나를 돌아본 그가 헛바람을 삼켰다.
쩌적-!
마법 안경에 금이 갔다.
“흠. 요정의 레벨이 너무 낮아도 가치가 내려가는 모양이네. 생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마음에 안 드네···.”
경험치를 너무 박박 긁어간 걸까?
“아, 아닙니다! 손님! 요정들의 레벨이 낮은 건 틀림없지만, 여성은 얼굴이 반반하고 남성은 체구가 요정치고 좋은 편입니다! 최고의 가격으로 전부 매입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십시오! 위대한 존재이시여!”
“...그래?”
나는 시무룩했던 표정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공갈E→공갈B
위압D→위압C
거래F→거래D
나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스킬 숙련도가 오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괜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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