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10화 (110/430)

 110화

[9회차] Hidden-route

▶곤혹: 피치 못할 행위로 과오를 범하는 자는 없다는 격언처럼, 명백한 정당방위이긴 한데요. 강한수 생도님. 요정들을 노예로 팔면 나중에 문제가 더 커지지 않을까요? 인신매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성 학점에 타격이….

그러면 죽일까?

요정의 시체는 좋은 마법 재료로 쓰인다.

▶식겁: 아니요! 다시 생각해보니 적당한 처벌 같아요! 선량한 용사님을 공격한 요정들을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량을 베풀었다고 봐요. 인성에 문제없어요!

그래? 교생 아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불안: 너무 믿진 마세요….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경매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래도 되겠지?”

영웅 놀이에 심취한 자들 때문에 보안을 중요시하는 암흑상회는 손님을 뽑는 기준이 굉장히 까다롭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가 있는 법.

“물론입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특등석으로 모시겠습니다!”

암시장 관계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다수의 요정을 팔아줘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걸까.

난폭한 요정들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일정이 어긋날 뻔했는데, 2회차 전개랑 크게 어긋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2회차보다 많이 개선됐다.

실비아와 그녀의 일당들을 죽이지 않고 평화적으로 처리했다.

이젠, 경매장에서 ‘짐꾼’만 구하면 완벽하다.

“용사님. 라누벨은 마음에 안 들어요. 선택받은 용사가 인신매매에 가담하다니…. 판타지아 역사를 다 뒤져봐도 용사님이 최초일 거예요.”

라누벨은 여전히 불만인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싫으면 방해하지 말고 꺼져.”

“그건 더 싫어요!”

우리는 암시장이 열리는 지하로 내려갔다.

*

경매 진행은 2회차랑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실비아를 포함해서 다수의 요정을 팔긴 했지만, 곧바로 출품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노예의 낙인을 찍고, 노예 문서를 작성한다.

합법적인 노예처럼 꾸미려면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고, 노예 당사자의 협조도 ‘조금’ 필요하다.

반항해봐야 본인에게만 불이익일 뿐이라는….

현실적인 잔인한 이야기를 들려줘서 꿈과 희망을 죽이고, 최대한 순종적인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에서 상품으로.

족쇄와 수갑만 채운다고 노예가 되는 건 아니다.

여기에 출품되는 노예들은 이게 어느 정도 끝난 상태.

물론, 전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왕국 북부에서 활약하던 용병입니다. 식사를 오랫동안 거부해서 꼴은 이렇지만, 뛰어난 창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건강만 회복하면 훌륭히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청년처럼 노예가 되길 끝까지 거부하면, 경매장 측도 조교를 포기하고 빠르게 팔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시체는 돈이 안 되니까.

아직 살아있을 때 팔아치우는 것이다.

경매장 사회자는 2회차랑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짐꾼’을 소개했다.

능력치도 당연히 똑같았다.

▷종족: 휴먼

▷레벨: 286

▷직업: 용병(재산→생존↑)

▷스킬: 창술C 근성D 생존D 야영E 요리E…

▷상태: 공복, 나약

내 동료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스킬 수준.

하지만 그의 정신상태만은 합격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능력치는 내가 얼마든지 키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딩동!

나는 망설임 없이 입찰했다.

그리고 아주 저렴하게 낙찰할 수 있었다.

“셋, 둘, 하나…. 축하드립니다! 황금가면 손님. 좋은 물건을 아주 저렴하게 구매하신 겁니다!”

짝짝짝!

사회자와 참가자들이 내게 박수를 보냈다.

귀여운 애완동물을 분양해서 축하한다고 말하듯, 낙찰한 노예를 본전 뽑을 때까지 잘 부려먹으라는 덕담과 축복의 의식이다.

바로 옆에서 라누벨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뭐냐?”

“용사님이 라누벨을 차갑게 대하는 이유를 깨달았어요.”

“말해봐.”

정말로 궁금했다.

“귀여운 미녀보다 우락부락한 사내가 더 좋- 아얏?!”

“내가 없는 곳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면, 다 너 때문인 줄 알겠어. 라누벨. 내 말을 알아들었어?”

“아우….”

내 악의가 가득 담긴 꿀밤을 맞은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라누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 열쇠와 계약서입니다.”

경호원들이 수갑과 족쇄를 찬 짐꾼을 끌고 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계산하며 말했다.

“테이블에 놔둬. 그리고 이 노예가 먹을 제대로 된 음식을 좀 가져다 줬으면 좋겠네. 많이는 필요 없어.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체력이 생길 수준이면 돼.”

지시를 받은 경호원 중 하나가 알겠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짐꾼이 말했다.

“나는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고향에 짝사랑하는 소꿉친구와 복수하고 싶은 동료들이 있지. 안 그래?”

“......”

“경매가 끝나면 너에게 2가지 선택지를 줄게. 나를 믿고 따라오던가, 자유의 몸으로 떠나던가. 선택에 따른 보복은 없어. 어째서 잘해주느냐고 묻는다면, 네가 그냥 마음에 들었거든~”

라누벨의 눈빛이 또 의미심장하게 바뀌었지만, 응징은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했다.

“...정말입니까?”

“객관적으로 생각해봐. 내가 예쁜 노예 아가씨들을 놔두고 너처럼 볼품없는 놈에게 돈까지 써가며 거짓말해서 무슨 이득이 있지? 네가 황제의 사생아라도 돼? 아니잖아. 그냥 동료를 믿었다가 뒤통수 맞은 멍청한 용병이지. 경매가 끝날 때까지 먹으면서 고민해 보라구.”

내 말에 설득된 짐꾼은 단식투쟁을 멈추고 테이블에 간소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흐뭇: 강한수 생도님이 요정들을 두드려 패고 인신매매에 손을 뻗으셨을 때는 조금 걱정했었는데요. 이렇게 선행활동을 하시는 모습을 보니, 괜한 기우였던 것 같아요.

교생 아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저기, 용사님.”

라누벨이 내 소매를 손끝으로 잡아당기면서 귀여운 척했다.

“...왜?”

나는 가증스러운 라누벨의 턱주가리를 자동반사처럼 후려칠 뻔했던 주먹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내 절제력은 스킬이 없어도 썩 훌륭한 편이다.

인내F→인내E

해탈F→해탈E

그래도 스킬을 준다면 사양하진 않는다.

“이 분이 새로운 동료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일단은 2회차 때처럼 변변찮은 짐꾼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그리고 육성의 최종 테크트리(Technology tree)는 만두왕국의 왕이다.

아리따운 공주님의 뱃속에서부터 시작했던 8회차에서 나는 많은 걸 깨달았다.

판타지아 세계.

여기는 용사나 마왕이 퇴장하면 사라질 세상이다.

하지만 이런 허무한 세계 안에서 치열하게 사는 판타지아 원주민들이 ‘진짜 사람’이란 사실 또한 알게 됐다.

곧 사라질 세상이니 가상현실게임처럼 대충 해도 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의문: 강한수 생도님의 생각은 어떠신데요?

교생 아가씨. 아주 좋은 질문이야!

우리는 집에서 애완동물을 키운다.

그중에 가장 많이 사랑받는 대표적인 동물이 개와 고양이인데, 우리는 평균 10년, 길어도 20년 밖에 못 사는 개와 고양이를 아끼고 사랑한다.

판타지아 대륙도 비슷하다.

용사 지크처럼 아무것도 안 하면 이 세계는 10년 안에 멸망한다. 그리고 아무리 잘 운영해도 20년을 넘기기 힘들다.

이 세계의 수명은 애완동물이랑 비슷하다.

내 마음이 딱 그렇다.

▶감탄: 한 차원을 애완동물이랑 비교하는 강한수 생도님의 배포에 감탄했어요!

후후! 교생 아가씨가 안 본 사이에 아부가 늘었네.

▶침울: 당연하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교미인 지크 생도를 어르고 달래서 용사다운 일을 시키려고 열심히 공부했는걸요.

...파면 팔수록 괴담뿐인 지크였다.

내가 교생 아가씨랑 대화하는 동안에도 노예 경매는 계속됐다.

라누벨은 ‘새로운 동료’라는 단어에 꽂히더니, 짐꾼에게 귀여운 척하면서 친밀도를 빠르게 올리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짐꾼은 벌써 휘둘리는 중.

“선택받은 용사님의 모험에 당신을 초대할게요!”

“저처럼 보잘것없는 놈이 용사님의 파티에…?”

“새로운 동료는 언제나 환영이죠!”

“미모의 고고학자 라누벨 양.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암시장에서 짐꾼을 구한다는 당초의 목적은 완수했다. 하지만 아직 더 볼일이 남았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됐나?

사회자가 한 요정 여성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하게 소개했다.

“대륙 최남단의 유명한 숲에서 주운 요정입니다! 보시다시피 정신은 좀 망가졌지만, 외모와 혈통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순결하죠. 우수한 2세를 바라시는 손님이라면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

“오오!”

“오오오!”

손님들의 지갑이 얇아지면서 서서히 식어가던 경매장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종족: 엘프

▷레벨: 851

▷직업: 궁수(궁술=관통↑)

▷스킬: 궁술A 속궁B 시력C 추적D 정령D…

▷상태: 저주, 봉인, 중독, 탈진, 마취

요정왕 마누라의 호위 임무를 맡았던 요정이다.

상급 악마에게는 무더기로 덤벼도 상대가 안 되지만, 요정 종족 기준에선 상당한 실력자에 속한다.

현재, 저주로 힘을 못 쓰는 상태.

하지만 치료한다면 그럭저럭 쓸모가 있을 것이다.

딩동-!

나도 경매에 뛰어들었다.

2회차에서도 그랬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다.

“또 입찰하는 황금가면 손님! 셉니다! 이 신사분께 도전하실 분, 더 없으십니까? 셋! 둘! 하나! 축하합니다!”

짝짝짝!

2회차에서는 이때 난장판이 된다.

하지만 원흉인 난폭한 요정들을 내가 미리 제압해둔 덕분에 습격 사건 없이 경매가 조용히 마무리됐다.

이제 돌아갈까나?

“짐꾼.”

“...용사님. 저 말씀입니까?”

“그러면 너 말고 짐꾼이 또 있니? 나갈 때 2가지 선택지를 준다고 약속했었는데, 라누벨의 엉덩이를 힐끔힐끔 훔쳐보는 꼬락서니가 이미 글렀네.”

“요, 용사님?! 그건…!”

“닥쳐. 너는 오늘부터 짐꾼이다. 바로 첫 임무를 줄게. 이 요정을 업고 따라와.”

나는 손발을 예쁘게 묶어서 포장한 요정 궁수를 가리켰다.

그런데 짐꾼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용사님이 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왜?”

나는 조금 전의 발언을 듣고 살짝 충격받았다.

2회차의 짐꾼은 은혜를 갚는답시고 고분고분 말을 잘 따랐었는데, 9회차 짐꾼은 상당히 반항적이었던 탓이다.

“이런 미녀를 업는 영광을 제가 어찌 감히….”

“하! 헛소리는 적당히 해.”

코웃음 치긴 했지만, 짐꾼의 마음가짐은 마음에 들었다. 자기가 좋다고 판단되는 건수를 내게 양보한다는 뜻이잖은가?

하지만 사고방식은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비루한 노예에서 위대한 왕까지 진급할 남자가 이리도 미녀에 취약해서야….

짐꾼이 왕후마마 모시듯 공손히 요정 궁수를 업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사랑받을 게 틀림없다.

나와 잡것들의 다음 일정은?

위대한 존재, 마스터 몰랑이 사는 마을이다.

그때,

“손님 여러분! 예정에 없던 깜짝 상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겁도 없이 이곳에 침투한 도둑고양이입니다! 원칙대로라면 양손을 자르고 노예의 낙인을 이마에 찍어서 출품해야 하지만, 그 미모가 아까워서 그냥 판매하기로 했습니다. 자! 보시지요!”

사회자가 새로운 노예를 소개했다.

나는 암시장을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호옹…. 히든 루트(Hidden-route)네.”

난폭한 실비아 일당이 난동부리는 틈에 암시장의 창고에 숨어든 도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간섭으로 습격 없이 경매가 순탄하게 진행되면서 도둑의 계획이 어긋났다. 그리고 암흑상회 용병들에게 생포됐다.

암흑상회는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판다.

괘씸한 도둑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튼, 25년 경력의 S급 용사님도 몰랐던 숨겨진 전개다. 흥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우웁…!”

떠들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도둑이 암시장의 경비원들에게 질질 끌려왔다. 손발이 꽁꽁 묶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복장은 도둑답게 검은색. 늘씬한 몸매가 고스란히 다 드러나도록 착 달라붙는 디자인이었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찢어진 옷이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암시장에서 노렸다면 뭘 좀 아는 친구로군?

“오오!”

“오오오!”

손님들의 반응이 요정 궁수 때보다 뜨거웠다.

“이 도둑고양이를 붙잡는 과정에서 저희의 손해가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손님께서 이 앙칼진 도둑고양이를 길들이시는 데 성공한다면, 무엇이든 훔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손님의 그것도 말이죠.”

“하하!”

“하하하!”

사회자는 음담패설을 섞은 장난스러운 진행으로 경매장 분위기를 한껏 띄운 후, 연출을 위해 다시 씌웠던 도둑의 두건을 벗기며 외쳤다.

“오늘의 마지막 경매를 시작합니다!”

암시장에서 호언장담한 도둑의 아름다운 얼굴이 공개됐다. 그리고 요정 왕족인 실비아만큼이나 뾰족하게 솟은 긴 귀가 드러났다.

“세상에!”

“오! 맙소사!”

“이건 질러야 해!”

모두가 굴곡진 가슴을 보면서 “당연히 인간이겠지.”라고 예상했던 도둑은 놀랍게도 요정이었다.

나는 감탄하는 손님들 속에서 눈을 빛냈다.

도둑의 종족 탓이었다.

▷종족: 카오스 엘프

▷레벨: 137

▷직업: 도적(약자→행운↑)

▷스킬: 마성A 은신B 정령C 신성D 마기E…

▷상태: 마검, 속박, 굴욕, 마취,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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