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9회차] 네가 그러고도 용사냐!
종족 ‘카오스 엘프’는 본 기억이 있다.
용사 페스티벌 때, 운 좋게 우주의 기운을 받아서 지하로 내려갔던 나는 부녀K를 만났다.
그 둘의 종족이 눈앞의 요정 도적이랑 같았다.
▷종류: 종족
▷명칭: 카오스 엘프
▷등급: 고대
▶고대1: 모든 속성을 익힐 수 있다.
▷고대2: 생명력이 무한하다.
▷특성1: 혼돈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2: 파괴 효과가 상승한다.
▷특성3: 망각 효과가 상승한다.
▷종족1: 생명력이 우수하다.
▷종족2: 보정된 가능성을 내포한다.
평범한 요정과 왕족보다 종족특성이 우월했다.
가장 큰 차별점은, 모든 속성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소지금을 확인했다.
찰그랑.
돈주머니를 흔들어보니 금화 소리가 묵직했다.
병 든 닭처럼 빌빌거리는 노예 둘을 저렴하게 사고, 난폭한 요정들을 팔아서 번 수익이 상당한 덕분이다.
딩동!
딩동!
딩동!
입찰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손님들은 저 도둑 요정의 가치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인간처럼 매력적인 몸을 소유한 ‘희귀한 요정’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지갑을 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인간 중에 가끔 절세미녀가 태어나서 나라를 흔들듯이, 간혹 돌연변이처럼 태어나는 풍만한 가슴의 요정!
수집욕이 강한 귀족이 군침을 흘릴 만하다.
나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황금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용사님. 이제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라누벨이 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요.”
“라누벨. 너답지 않게 야박하네.”
“나쁜 도둑이잖아요.”
나쁜 도둑이니 노예로 팔려도 괜찮다고?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라누벨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라누벨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요정공주 실비아 일당이 암시장을 습격해서 인간들을 학살할 때, 라누벨은 요정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사람을 죽이는 요정이 정의로울까?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왜, 왜요?”
“요정은 전부 착하다고 우길 줄 알았거든.”
내가 아는 라누벨이라면 “도둑질한 사연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라면서 무조건 요정을 옹호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암시장의 물건들은 불법이므로 얼마든지 훔쳐도 된다는 ‘용사의 동료다운’ 뻔뻔한 논리를 펼치던가.
숲에서도 그랬다.
실비아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먼저 나를 공격했다.
그때, 내 대응은 어떠했던가?
나는 화살촉을 겨누는 사나운 요정들에게 먼저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어떻게든 우호적으로 풀어가고자 애썼다.
어디 그뿐이랴.
나를 공격한 요정들을 죽이지 않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그런데도 라누벨은 불만으로 가득했었다.
반면, 저 요정 도적이 나를 해코지했나?
차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용사님! 라누벨은 바보가 아니에요! 저 요정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도둑질은 동대륙의 용병왕국과 서대륙의 암흑제국 빼고는 어느 나라에서나 중죄에 해당해요. 붙잡힌 도둑은 죄질에 따라서 손목을 자르거나 노예의 낙인이 찍혀요.”
“...그런 거로 해둘까.”
일단은 저 ‘혼돈의 요정’을 사는 게 급선무다.
딩동!
과열된 경매는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귀족이란 족속들이 이래서 문제다.
희귀한 수집품을 발견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다.
가난한 예술가의 작품들이 굶어 죽은 후에 인정받아서 무덤에 금칠할 수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혈안이 돼서 입찰하는 귀족들의 생각이 뻔히 보였다.
그들의 지갑을 여는 원동력은, 저 요정의 희귀한 젖가슴을 주무르겠다는 저열한 욕망이 아니다.
파티에 선보일 자랑거리.
학부모 혹은 친인척들의 모임에서 “우리 아이가 어느 대학에 입학했어.”라고 자랑하기 위해 비싼 학원비를 아낌없이 쏟아붓듯이 말이다.
아! 내가 이 말을 했다는 건 어머니께 비밀이다.
테니스라켓이 용서하지 않으리라.
▶제안: 강한수 생도님이 저 혼돈의 요정에게 흥미를 느끼시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낙찰가가 너무 올라가지 않나요? 이러면 여행자금이 빠듯할지도 몰라요. 그 반칙 스킬을 써서 9초 안에 해결하시는 게 어떨까요?
교생 아가씨의 의견도 일리가 있어.
용사 지크랑 함께한 5년이란 시간이 교생 아가씨에게 마냥 나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상한 잣대의 원칙을 중요시하는 고지식한 도덕 선생이랑 달리, 그녀는 제법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았다.
▶침울: 그런데도 실패했지만요···.
교생 아가씨! 힘을 내!
나중에 정말 힘들면 찾아오라구?
내가 밤새도록 술과 안주를 사면서, 가만히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그 구구절절한 하소연의 말동무가 되어주겠다.
이 S급 비밀 친구가 도와줄게!
▶감사: 영혼 없는 빈말이라도 고맙습니다.
교생 아가씨가 눈치도 늘었네!
비밀이 많은 교직원의 폐쇄적인 규칙 때문에 못 찾아오리란 사실을 뻔히 알기에 해본 소리다.
말로는 우주도 살 수 있다.
그나저나….
딩동!
딩동-!
나는 이 요정 도적을 아직도 낙찰하지 못했다.
물론, 결국엔 살 순 있을 것이다.
쉽게 번 돈이라서 아까운 줄 모르는 나랑 달리, 귀족들이 유흥비로 지출할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거참!”
“아쉽군….”
“쩝.”
내 예상대로 귀족들이 하나둘 포기했다.
하지만 정말 굉장했다.
저 요정 도적의 몸값은, 내가 1회차에서 실비아를 낙찰하는데 든 비용의 3배를 넘어섰다.
만두왕국 수도의 노른자 땅을 살 수 있는 가격.
성형외과 의사가 판타지아 대륙으로 오면 금방 부자가 될 것이다.
딩동!
“황금가면 손님께서 진귀한 꽃들을 전부 쓸어가시는군요! 이분께 더 도전하실 손님 안 계십니까? 없으시면 숫자를 세겠습니다. 셋! 둘! 하나…! 축하합니다! 황금가면 손님! 이 미모의 도둑고양이는 이제 손님의 소유물입니다! 이빨이 매우 날카로우니, 밤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축하합니다.”
“정말 손이 크시군요.”
“못 당하겠구려.”
짝짝짝!
나는 손님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요정 도적의 낙찰금을 냈다.
알이 꽉 찬 연어처럼 불룩했던 나의 돈주머니가 멸치처럼 쪼그라들었다.
요정 도적이 거칠게 저항하며 끌려왔다.
경매장 관계자가 제안했다.
“황금가면 손님. 원하신다면 도시의 주거구역까지 무상으로 호위해드리겠습니다.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안전하게 이동하시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란 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손님쯤 되는 강자께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만.”
“호위는 마음만 받고 마차나 소개해줬으면 좋겠군.”
혈기왕성한 사내들을 유혹하듯 씰룩이는 라누벨의 천박한 엉덩이 못지않게 이 요정 도적은 너무 눈에 띄었다.
경매장 관계자가 내 생각을 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입구에 마차를 대기해놓겠습니다. 그러면 손님. 절 따라서 이 위에 서주십시오. 왕국 수도 번화가로 안내하겠습니다.”
*
만두왕국 수도 서쪽 숲에 숨겨진 출입구를 통해서 암시장에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나와 잡것들도 다른 손님들처럼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했다.
끈질기게 나를 쫓아오던 정령들도 도시까지 따라오진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또 그렇지 않았다.
몸을 사람 손가락 크기로 축소한 정령들이 거머리처럼 내 피부에 달라붙어서 비비적거리고 있었던 탓이다.
어? 잠깐! 아무리 내가 좋아도 거긴 안 돼!
나는 매우 예민한 남자다.
“다음에 또 이용해주십시오. 황금가면 손님.”
“아아, 그러지.”
나는 암시장 간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공간이동 마법진이 숨겨진 집을 나왔다.
집 입구에는 부탁해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왕궁의 후문으로.”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차단된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에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사소한 마찰 하나 없이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궁을 수호하는 근위병들이 늘어난 인원수에 당황하면서 잡것들의 신원을 조회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에 싱글벙글한 도굴꾼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해결했다.
“라누벨이 보증해요!”
나와 잡것들은 고급스러운 방으로 모였다.
타국의 왕족에 버금가는 귀빈에게만 내주는 침실로, 내가 악마숭배자인 왕비를 복종시켰던 3회차에서 애용하던 장소다.
최대 장점은 방음처리.
아무리 큰 신음과 비명도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실내가 굉장히 넓었다.
나, 라누벨, 짐꾼, 요정 궁수, 요정 도적.
이렇게 다섯이 들어왔음에도 공간이 많이 비었다. 하지만 전원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라누벨에게 지시했다.
“라누벨. 너는 짐꾼을 데리고 가서 잔뜩 먹여.”
“예? 용사님. 지금부터 가슴 벅찬 꿈과 희망의 모험계획을 짜려던 거 아니었나요?”
“오냐. 가슴 터질 때까지 맞자꾸나.”
“다녀올게요! 용사님!”
라누벨과 짐꾼이 빠르게 퇴장했다.
남은 인원은 셋.
S급 용사님이랑 약물에 찌든 변변찮은 요정 둘이었다.
여전히 손발이 자유롭지 않은 두 요정은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200레벨대 왕궁기사와 50레벨대 근위병들이 빼곡하게 지키는 왕궁에서 손발 묶인 채로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하기에.
하지만 둘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암시장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경매장에 출품된 요정 궁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체념의 눈빛이었지만, 노예의 낙인조차 찍히지 않은 요정 도적은 공격적으로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내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히프리아. 치료해줘.”
“네, 주인님.”
날개 3쌍의 천사 성녀는 소환되자마자 두 요정에게 걸린 각종 상태 이상을 회복시켜줬다.
우우웅-!
성스러운 빛이 두 요정을 포근하게 감쌌다.
요정 도적은 레벨이 낮아서 마취가 풀리고도 속박을 자력으로 풀지 못했지만, 851레벨의 요정 궁수는 아니었다.
두두둑.
활시위를 당기던 힘으로 수갑을 부쉈다.
하지만 요정 궁수는 자기 발목에 채워진 것들은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놔뒀다. 도망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안 도망치네?”
“도망치려는 조짐을 보이는 순간,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살해되리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에게 걸려있던 악마의 저주를 풀어주신 은혜를 갚지 않고 떠날 만큼, 저는 파렴치한 요정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요정이 실비아처럼 난폭하진 않았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너는 보스K랑 어떤 관계지?”
“보스K…?”
재갈이 풀린 요정 도적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 설명이 부족했군. 가슴을 사랑하는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이랑 무슨 관계지?”
“그 유감스러운 왕이 내 조상님이다.”
“이봐, 도적 아가씨. 네가 왕족이란 사실은 평균치보다 길쭉한 그 귀만 봐도 알 수 있어.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은 너의 종족, 혼돈이지.”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용사님이니까.”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용사? 그렇다면 당신이 수작을 부린 건가?”
“수작이라니?”
나는 오늘 소환됐다. 무려 25년 전에 소환되긴 했지만, 이번 9회차에 한에서는 하루도 안 지났다.
아무리 내가 S급 용사님이라고 해도 수작을 부릴 시간이 없었다.
▶부정: 하루 만에 마왕을 잡으신 적도 있잖아요.
교생 아가씨. 소환되자마자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준 용사님에게 수작이라고 하면 안 되지!
“내가 흘린 정보에 낚인 멍청한 공주가 경매장을 급습하지 않은 이유가 당신 때문이 아닌가?”
“실비아를 이용해서 뭘 훔치려고 숨어든 거지?”
“질문은 내가 먼저 했다.”
“내가 주인이야.”
“나는 노예 따위가 아니다! 배신자의 더럽고 무능한 피가 섞이지 않은 엘브하임의 진정한 정통후계자다!”
“그건 네 생각이고.”
이야기가 영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홀라당 벗겨서 출입구에 하루만 매달아두면 누구든 고분고분해지게 되어있다. 나는 효수(梟首) 같은 야만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이건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대화는 내일 천천히 하자고.”
“나를 풀어줘!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거다!”
내 손을 거부하듯 요정 도적이 뒷걸음치지만, 묶여있는 발로는 한걸음 움직이는 것조차 벅찼다.
찌익-!
나는 그녀의 검은색 상의를 잽싸게 벗겼다.
그리고 드러나는 하얀 속살.
“이건….”
툭, 툭.
브래지어처럼 생긴 보호구가 옷이랑 함께 떨어졌다.
“야만인! 네가 그러고도 용사냐! 흑흑!”
묶인 양손으로 애처롭게 가슴께를 가린 요정 도적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비난했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네가 그러고도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왕족이냐! 뽕이라니!”
S급 용사님은 사기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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