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9회차] 유료로 도와줄게!
내가 방심하다니!
요정 도적이 순수한 혈통임을 간과했다.
요정 종족은 자연법칙에 따라, 긴 수명만큼 출산율과 번식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출산의 비중이 낮은 요정 여성들의 젖가슴은 인간만큼 발달하지 않았다.
평균 2,000년에 달하는 긴 삶 동안 아이는 두셋밖에 안 가지기에 세대를 거듭하면서 퇴화한 것이다.
...라는 건 나만의 개똥철학이고.
판타지 신만이 알 것이다.
요정 여성의 가슴이 LCD 모니터인 진짜 이유를.
“그래도 나는 큰 편이다…!”
요정 도적의 주장처럼 실비아보다는 높게 쳐줄 만했다.
하지만 여기에 의미가 있을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 넘어가자고.”
“그딴 거?!”
“내가 알고 싶은 건, 도적 아가씨가 암시장에서 무엇을 훔치려고 했느냐는 거야. 단순히 돈이 목적이라면 그 레벨로는 너무 큰 모험 같은데.”
암흑상회는 바보가 아니다.
까칠한 보안만큼 상품도 철저하게 지킨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욕먹는 암흑상회지만, 안전성 부분에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유명하기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암흑상회의 창고를 털기란 매우 어렵다.
만약에 이곳에 침투해서 무언가를 훔칠 레벨과 스킬이 된다면, 이미 뭘 해도 성공할 능력이 되기에 굳이 구질구질하게 도둑질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의구심이 들었다.
이 137레벨 도적은 150레벨대 경비원과 마법 함정이 득실거리는 암시장에서 무엇을 훔치려고 숨어든 걸까?
그녀에게 무리수를 던지게 한 상품이 궁금했다.
“내가 훔치려던 건, 혼돈의 유물이다.”
요정 도적은 엄청난 사실을 공개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하지만 내 표정을 보고는 움찔하며 되묻는다.
“내 대답에 뭔가 불만인가?”
“당연하지. 망할 도적아.”
세상에는 온갖 유물이 존재한다.
천사의 유물, 고대의 유물, 전설의 유물, 신성한 유물, 사악한 유물, 영광의 유물, 영웅의 유물….
편할 대로 막 붙이면서 용사님을 낚는다.
혼돈의 유물?
작작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망할 도적이 아니다! 간악한 배신자 일족 때문에 왕족다운 생활은 못 하고 있지만, 남의 것을 훔치는 좀도둑이 아니다. 조상님께서 남기신 유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저절로 직업이…. 듣고 있는 것이냐?!”
“그래서 무슨 유물인데?”
“혼돈의 힘이 깃든 물건이다. 신이 정한 세계의 규칙과 섭리에서 벗어난 힘의 파편. 덕분에 나는 마기를 습득하고도 반대속성인 신성으로 악마의 지배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그보다도 야만인! 언제까지 본녀의 속살을 볼 셈인가! 가릴 옷을 줬으면 좋겠다.”
최초의 용사.
선배1의 힘이 깃든 물건을 ‘혼돈의 유물’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그 유감스러운 요정왕도 최초의 용사 동료였다. 블랙박스 스킬을 직접 다룰 순 없더라도 용사에게 하사받은 아이템을 활용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저 혼돈이란 속성이 유전이라면, 현재 엘브하임 왕국을 다스리는 왕족보다 진하게 피를 물려받았다는 건 틀림없다.
변변찮은 도적으로 연명 중이긴 하지만.
“야만용사! 듣고 있는가!”
“닥쳐. 그 가슴만큼이나 자존심도 졸렬한 왕족에게 야만인이란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아.”
“졸렬…?!”
이 요정이 뽕으로 사기 치는 바람에 금전적인 손해가 극심했다.
“도적 아가씨. 네가 훔치려던 그 유물은 암시장에 확실히 있는 거야? 대답하면 이 담요로 내일까지 가리게 허락해줄게.”
“고작 내일…?”
“싫으면 말고.”
“확실하다! 나는 혼돈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 모호하지만, 내가 붙잡히기 직전까지 분명하게 느꼈다. 그곳에 혼돈의 유물이 틀림없이 있다.”
요정 도적은 뭉개진 자존심을 가려줄 담요를 얻기 위해 비밀스러운 정보를 술술 이야기했다.
물론, 쓸모없는 정보도 많았다.
“네 이름 따위는 알 바 아니야.”
“야만용사! 말이 너무 심하다는 자각 자체가 없는가?!”
요정 도적은 본인의 나이 빼고 전부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남의 신상정보를 훔치긴커녕 잘 빼앗기는 도적이라니….
“네 이름을 알아서 뭐에 쓰라고?”
“순결한 혈통의 고귀한 왕족이 쓰는 이름이다!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이름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도 야만용사가 최초로구나! 영광으로 알도- 푸핫?!”
펄럭!
나는 요정 도적의 얼굴에 담요를 던졌다.
중앙대륙의 신성제국 황녀가 비슷한 헛소리를 잘했었다. 자기 발을 닦는 영광을 주겠노라고.
“저…. 용사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모시는 분의 따님이신 실비아 공주님께서 이 근방에 와계시는지요?”
요정 궁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2회차를 돌이켜보면, 실비아를 위해 망설임 없이 자기 목숨을 버릴 만큼 이 요정의 충성심은 매우 뛰어났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숲에서 봤지.”
지금쯤 암시장에서 예쁘게 포장 중일 것이다.
요정왕국이 워낙 폐쇄적인 탓일까. 이 요정 도적처럼 귀가 일반 요정들보다 긴 실비아가 왕족이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앙칼진 토끼라고 소개했던가?
실비아의 가슴 빼고 보면 출중한 미모도 꽤 높이 평가됐지만, 귀가 긴 희귀한 요정이란 이유로 비싸게 거래됐다.
...다시 생각해봐도 열 받네!
실비아보다 3배나 비쌀 이유가 없었다.
“그 암시장의 인간들이랑 충돌하지 마셔야 할 텐데….”
“흥! 겁먹어서 도망친 모양이다.”
“당신은 누구신데 왕가를 모욕하고 적대하시는 건가요? 그 귀도 가슴처럼 가짜가 아니라면 왕족이 틀림없는데.”
“이 귀는 진짜다!”
“쉽사리 믿을 수가 없군요. 가짜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신 분의 말 따위는.”
요정 궁수의 말에 발끈한 도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조상님 때문에 이 가문의 남자들은 대대로 이상했다! 날개가 작아도 새는 새다! 어째서 부정한단 말인가!”
유감스러운 조상님 때문에 후손들의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건 잘 알겠다.
궁수 요정이 받아쳤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말만 하시는데, 역사를 다 뒤져봐도 동족을 비하하신 왕은 없습니다.”
“있다!”
“인간의 왕이랑 착각하신 게 아닌가요? 요정왕 중에선 단 한 분도 없었어요.”
“있었다!”
“없었어요!”
두 요정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진실은 요정 도적의 말이 맞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요정 종족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요정왕이 동족을 혐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왕권에 치명적인 탓에 철저하게 은폐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판타지 세상은 레벨만 높으면 장땡이다.
851레벨 궁수의 얄팍한 ‘위협’ 스킬도, 137레벨 도적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요정 도적이 저항하듯 외쳤다.
“읔! 왕족의 호위기사란 자가 왕족에게 위협을 가하는가! 악마 공작에게 왕비를 빼앗긴 게 이해되는구나!”
“어, 어떻게 그 사실을…!”
“혼돈의 유물을 추적하다가 우연히 보았다.”
“그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거기까진 나도 모른다. 다만, 악마 공작이 왕비를 곧바로 죽이지 않았다는 것만 알뿐.”
나는 잘 안다.
그 왕비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떠났지!
마왕의 성 테라스에서 야외플레이를 즐길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그녀는 용사력 9년에 마왕의 아이도 생겼다는 듯했다.
하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할 말도 궁색할뿐더러, 해줘서 내게 득 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주제로 은근슬쩍 넘어갔다.
“오늘부터 너희의 이름은 궁수E, 도적E다.”
“네, 주인님.”
노예로 교육받은 요정 궁수는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내가 신용등급 SSS급의 정의로운 용사님이란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내가 지어준 이름에 불만 없는 듯했다.
“부당하다! 뭐냐, 그 무성의한 이름 같지 않은 이름은?! 내게는 일리나 루 엘브하임이란 고귀한 이름이 있다! 애초에 무슨 권리로 내 이름을 바꾼단 말인가!”
“도적E.”
“내 이름은….”
“도적E.”
“......”
그렇게 정해졌다.
내가 이번 회차에서 생각하고 있는 임무는 2가지다.
우연히 만난 도적E가 언급했던 혼돈의 유물을 조사하고, 궁수E처럼 왕비를 호위하던 자들을 모으는 것이다.
둘 다 단순한 수집욕.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25년차 용사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정도밖에 없었다.
▶당혹: 강한수 생도님. 좀 더 유익한 일이 있지 않을까요? 5대 재앙을 처치하는 일이요.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대륙을 파괴하는 5대 재앙을 몽땅 토벌했을 때, 그래도 판타지아 세계가 멸망하는지 궁금했다.
안 그래도 친애하는 망룡왕을 만날 계획이었다.
나는 9회차를 끝으로 졸업할 예정이기에, 미리 이 친구에게도 작별인사를 해두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도적E 탓에 사기당한 돈을 회수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암시장을 공격하는 야만적인 방식을 쓰지 않는다. 사기당한 내게도 잘못이 있으니까.
“도적E의 길쭉한 귀를 봤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거늘.”
엄연한 내 실수.
내 잘못을 암시장에 떠넘기고 화풀이할 생각은 없다.
어디의 편협한 판타지 신이랑 달리, 나는 공명정대한 용사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서스 왕자에게 연락하자!
*
나는 2회차에서 요정왕국 엘브하임의 왕위서열 1위인 나서스 왕자랑 두터운 친분을 과시했었다.
덕분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다.
“궁수E.”
“네, 주인님.”
“왕국에 연락해.”
왕국을 향한 충성심이 남다른 궁수E. 그녀는 만두왕국에 설치된 통신마법을 사용해서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요정왕국에 전달했다.
실비아 공주의 행방, 왕비의 실종, 용사….
본인이 아는 모든 정보를 낱낱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며칠 뒤,
중간보스 나서스 왕자가 사절단에 섞여서 만두왕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서스 왕자가 오는 이유?
위험한 인간의 땅에 선뜻 가겠다고 나서는 요정이 이 왕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회차처럼 실비아 일당들의 시신을 내가 보관 중인 건 아니었지만, 큰 흐름은 그때랑 똑같았다.
사절단의 선두.
요정왕국의 보물 ‘정령검 엔드미온’을 허리에 착용한 나서스 왕자는 요정답지 않은 늠름함을 자랑했다.
▷종족: 아크 엘프
▷레벨: 999+
▷직업: 검사(검술=절단↑)
▷스킬: 검술SS 검기S 재생A 정령A 위엄A…
▷상태: 기대
여동생이 실종됐음에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 상태도 포함해서.
역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죽었기를.
하지만 제삼자의 눈에는, 사랑하는 가족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에서도 허둥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훌륭한 왕자’로 비치리라.
왕자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서스라고 합니다. 소문이 자자한 전설의 용사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또한, 노예로 팔릴 뻔한 동포를 구해주셔서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아! 왕자라는 딱딱한 호칭은 빼고 나서스라고 편히 불러주십시오. 용사님은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이 중간보스는 여전히 호감 가는 인물이었다.
내가 2회차 때 뭐라고 회답했더라?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서스. 우리의 만남처럼 인간과 요정이 화합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야말로 바라는 바입니다.”
“건배!”
“하하하!”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남자가 둘 이상 모이면 나오는 정치부터 전쟁토론까지.
대화가 무르익어가던 중, 나서스 왕자가 내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용사님. 옆에 계신 아름다운 요정분을 소개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얘는….”
찰싹!
나는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도적E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집이 잡히는 부위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맞닿는 소리가 무척 영롱했다.
“무, 무엄- 으으으….”
도적E는 서둘러 입술을 가렸다.
왕위를 노리는 나서스 왕자 앞에서 왕족이라고 발언하는 행위는 자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정 왕족을 상징하는 길쭉한 귀 때문에 이미 들켰을 것이다. 그걸 노리고 데려온 거였지만.
“제가 키우는 음란한 도둑고양이입니다. 실비아 공주님처럼 밖을 나돌긴 하지만, 고삐를 확실하게 채워두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이만한 미인을 노예로 두시다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젠 도적E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요정왕국에서 파견한 암살자들에게 살해되기 싫다면 내게 몸을 의탁해야 한다.
“우리의 만남에 축복을.”
“축복을.”
“하하!”
“하하하!”
역사는 언제나 밤에 쓰이는 법.
우리는 만두국왕이 주최한 사절단 환영회가 끝나고 어두컴컴해진 테라스에서 단둘이 대면했다.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실종된 실비아 공주를 찾고 싶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정의로운 용사님. 아바마마께서 무작정 사랑하시는 여동생이 잘못된다면 제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플 것 같습니다.”
“저런! 그러시면….”
이 용사님이 유료로 도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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