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9회차] 콩가루
협상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와 나서스 왕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달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테라스에서 악수하며 헤어졌다.
정말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마른 멸치처럼 안타까웠던 내 돈주머니도 아름다워졌다.
찰랑!
금화의 이 맑은 울림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라 더욱 보람찼다.
“용사님! 용사님!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받으셨어요? 라누벨은 너무너무 수상하다고 생각해요!”
“어허! 정당하게 번 돈이야.”
“요정왕국의 왕자님이 왜 돈을 줬는데요?”
“라누벨. 내가 어디서 돈을 받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했냐?”
“라누벨이 아는 척해봤는데 정말이었네요!”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었기에 나는 정의로운 용사다운 미소를 지으며 알려줬다.
“난폭한 요정들이 암시장에 붙잡혀갔다고 나서스 왕자에게 이야기해줬지. 그랬더니 고맙다면서 돈을 이렇게 많이 주더라고. 라누벨. 아직도 이 용사님에게 불만 있어?”
“네! 왕위를 노리는 나서스 왕자에게 실비아 공주님의 위치를 알려주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친오빠가 사랑하는 여동생을 찾겠다잖니. 비밀로 했다가 공주가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래?”
“용사님이 책임지시면…. 꺅?!”
“닥쳐.”
나는 자기 인생 아니라고 막말하는 라누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사사건건 참견하길 좋아하는 판타지 야만인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남의 가정사에 멋대로 관여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딸이 실종돼서 요정왕이 얼마나 슬퍼하고 있겠는가?
나는 실비아와 그녀의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본 위치를, 그녀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는 오라비에게 알려줬다. 그것으로 정의로운 용사님이 할 의무는 끝났다.
도적E가 슬쩍 끼어들었다.
“나서스 왕자가 실비아를 어떻게 할지는 나도 관심 없다. 하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음흉했다. 순수한 혈통의 내 몸을 노리는 게 틀림없다. 야만용사가 나를 노예라고 소개하는 재치를 발휘한 덕분에 당장은 포기한 듯하지만….”
“풋! 망상이 심하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몸으로 어떤 남자를 유혹한다고.
“아니다! 정말이다! 내가 똑똑히 봤다! 그 왕자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그래그래. 먼 친척이 너에게 반했다고 쳐줄게. 그러니 좀 닥쳐. 슬슬 짜증 나려고 하니까.”
“......”
정말로 교미를 원하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서스 왕자는 내 실력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니까. 내 몸에 빼곡하게 달라붙은 정령들을 통해서.
현재 내 정령 스킬은 MAX.
요정왕보다 레벨은 아직 낮아도 스킬 등급은 더 높다.
내가 기억하는 나서스 왕자라면, 강자의 소유물을 건드려서 부스럼을 만들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다.
만두왕국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며 외교에 힘쓴 나서스 왕자의 사절단은 궁수E를 증인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요정왕국의 단 하나뿐인 왕비를 지키지 못한 호위기사에게 추궁하고 싶은 내용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나서스 왕자의 계획을 안다.
실비아 공주를 향한 충성심이 높은 궁수E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퇴장시켜두는 것이다.
▶감탄: 강한수 생도님. 모험경비를 이렇게 충당하시다니. 정말 굉장하세요.
교생 아가씨. 이 정도는 기본 아니야?
▶우울: 지크 생도는 늘 가난했어요. 동료들이랑 힘들게 번 돈을 굶주린 자매에게 줘서 파티 전원이 쫄쫄 굶은 적도 있었는걸요. 오늘 처음 만난 황녀를 위해 보증을 섰다가 빚을 떠안기도 했고요. 그리고 또….
그만! 교생 아가씨. 나중에 술 마시면서 들어줄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도적E.”
“......”
“도적E. 두 번 부르게 하지 마. 이 이름을 요추(腰椎) 4번과 5번에 새겨주는 수가 있다.”
“말해라, 야만용사.”
“혼돈의 유물이 지금도 암시장에 있어?”
“그렇다. 하지만 언제 출품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미 옮겼거나 판매가 취소됐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도적E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부정적으로 말했다.
“곤란한걸.”
“무엇이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이라면….”
“혼돈의 유물을 감지해내는 능력 때문에 너를 되팔지 않는 건데, 유물이 없다면 쓸모가 없잖아.”
“나를 팔 셈인가?!”
“사실, 나서스 왕자가 비싸게 불렀거든.”
액수를 듣고 솔직히 놀랐다.
가슴이 가짜란 사실이 들통난 후, 왕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 외에는 변변찮았던 도적E.
하지만 그녀의 몸값은 줄긴커녕 더욱 늘어났다.
내가 거절할 때마다 나서스 왕자가 제시하는 액수가 높아졌다.
그는 작은 도시를 살 수 있는 무지막지한 돈이랑 왕국의 비보, 정령검 엔드미온을 담보로 걸기까지 했다.
그만큼이나 도적E를 탐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 그 이상한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그러니 나를 팔지만 말아다오! 나는 그 더러운 배신자의 후손에게 몸이 더럽혀지는 것만은 죽어도 싫다!”
“하는 거 봐서.”
“부탁한다!”
“뭐든지?”
“...그렇다.”
도톰한 분홍빛 입술을 깨문 도적E가 떨리는 손으로, 붉은색 드레스의 어깨끈을 옆으로 밀어냈다.
드레스는 아무런 마찰 없이 폭포수처럼 훌러덩 떨어졌다.
“너, 뭐하냐?”
“그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하는가! 나를 수치사(羞恥死) 시킬 작정이냐!”
무방비하게 속살을 내비친 도적E가 새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정말로 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다.
“까불지 말고 그냥 나가. 이 S급 용사님은 아무 여자랑 잠자리할 만큼 가벼운 몸이 아니시다.”
“아…. 미안하다. 내가 멋대로 착각을….”
“너보다 훨씬 매력적인 아가씨랑 오늘 밤에 예약되어 있거든~”
그렇다고 오해는 금물!
내가 의도하거나 강요한 하룻밤이 아니다.
새가슴인 만두국왕이 어떻게든 내게 잘 보이려고 아름다운 하녀를 파견한 것이다.
내 경력이 벌써 25년이다. 촌스러운 판타지 미인계 따위는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호의를 거절하면 만두국왕은 더욱 불안해할 것이고, 내가 고자라는 악의적인 헛소문이 하녀들 사이에서 퍼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건 정당한….
“야만용사! 천벌 받을 거다!”
자존심 상한 도적E가 눈물을 글썽이며 빽 소리쳤다.
“라누벨은 용사님이 일리나에게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요.”
“라누벨, 네 의견 따위 안 물어봤다.”
“우우….”
“그런데 일리나가 누구냐?”
바로 옆에서 “나다! 좀 외워라! 야만용사!”라고 외치면서 울컥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라누벨과 짐꾼에게 여행 채비를 시켰다.
목적지는 예정대로 위대한 존재가 사는 마을. 그곳에서 다시 한번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받아볼 계획이다.
10년차와 25년차.
분명히 또 다른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너무해요! 라누벨에게만 일 시키고 용사님은 놀고!”
“나도 일하러 간다.”
“어디로요?”
“굉장히 위험한 곳으로.”
*
나는 도적E만 동행한 채 다시 한번 숲을 찾았다.
암시장이 열리는 장소는 계속 바뀌지만, 고작 며칠 만에 경매장 시설과 상품을 싹 옮길 순 없다.
아지트 이주는 대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자주 할 짓이 아니다.
“역시….”
다수의 요정이 숲에 집결해있었다.
비실비실한 요정에게 어울리지 않는 금속으로 된 갑주를 완전무장한 최정예 부대.
그들의 능력치는 평균 350레벨을 웃돌았으며, 스킬 구성과 등급 또한 굉장히 준수했다.
그 무리의 중심에는 나서스 왕자가 있었다.
여기에 모인 요정들은, 훗날 요정왕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주범들이었다.
모두가 나서스 왕자의 사람.
암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함구할 자들이다.
나는 수풀에 몸을 감춘 채 그들이 움직이길 느긋하게 기다렸다.
부스럭.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
“야만용사. 저들이 왜 여기에 있는가?”
만두왕국에서 골라준 파티복이랑 마찬가지로, S급 용사님의 동료로 인정받으며 받은 그럴싸한 전투복을 입은 도적E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또 사기를 치고 있었다.
일전에 본 ‘브래지어처럼 생긴 보호구’를 옷 안쪽에 넣었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도적E가 새빨개진 얼굴을 옆으로 휙 돌리며 변명했다.
“우리 가문 여성들에게 대대로 내려온 전투복이다. 혼돈의 힘이 깃들어있진 않지만, 소유주의 마음에 따라 형질이 바뀌는 환상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금속이 진짜 가슴처럼 변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환상의 금속?”
“로맨티넘(Romantinum). 가슴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 있으셨던 조상님께서 판타지아 전역을 다 뒤져서 간신히 모은 희귀금속이다. 강철처럼 단단하진 않지만, 성검으로도 벨 수 없다고 전해진다. ”
“정말로?”
“그렇다고 시험해보진 마라!”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나서스 왕자는 땅의 정령들을 이용해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암시장으로 침입하기 위해.
나서스 왕자가 주위에 모인 동료들을 둘러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동족들을 구출한다. 단, 그들이 인질로 쓰이면 과감히 포기하고 철저하게 복수한다. 실비아도 예외는 아니다. 노예로 붙잡힌 동족을 구하려다가 본인마저 노예가 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전우가 없길 빈다. 가자!”
요정들이 우르르 지하로 내려갔다.
그 광경을 본 나도 슬슬 이동하기로 했다.
“야. 망할 정령들아. 그만 들러붙고 너희도 일해라.”
도적E가 딴죽을 걸었다.
“야만용사. 정령은 우리의 노예가 아니다.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공손히 부탁해라. 정령을 함부로 대하면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누가 친구래?”
“음…?”
“도적E. 잘 봐둬. 이것이 S급 용사님의 클라스다. 자! 내 명령을 받고 싶은 정령들만 모여라!”
쿠구구구-
울창한 숲이 진동했다.
내 눈치를 보며 주위에서 기웃거리기만 하던 정령들이 반색하더니, 경쟁하듯 우르르 몰려든 까닭이다.
그리고는,
부비부비.
정령들이 헤벌쭉 웃으면서 나를 성희롱하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만지는 곳이 없었다. 거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 어떻게 이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도적E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용사니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두두두두-!
일꾼이 많으면 편하다. 정령들은 조금씩 거들었을 뿐이지만, 숫자가 많았다.
현대의 굴착기마저 겸손하게 만드는 속도로 지하 깊숙이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힐끔, 어두컴컴한 터널 아래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도적E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느껴져?”
판타지 세계의 파멸을 막는 사명을 띤 용사님은 불필요한 여성을 지킬 만큼 한가하지 않다.
혼돈의 유물을 찾으려고 도적E를 데려온 것이다.
“그렇다. 이 아래에 확실히 있다.”
바짝 긴장한 도적E가 구덩이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내 귀로도 어렴풋이 비명과 소음들이 들려왔다.
도적E처럼 어떤 기운을 느낄 순 없었지만, 저 아래쪽에서 벌써 인간과 요정들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원래는 실비아가 암시장에서 소란을 일으켰었다. 그 틈에 도적E가 혼돈의 유물을 훔쳐서 달아나고.
하지만 꼬여버린 9회차에서는 그녀의 오라비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적E.”
나는 땅굴을 내려가면서 뒤따라오는 요정을 불렀다.
“말해라.”
“너는 그 유물로 뭘 할 셈이지? 단순한 수집? 아니면 그 힘을 추출하는 방법이라도 아나?”
도적E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
“다른 차원에 갇혀계신 조상님을 구출할 것이다.”
“...음?”
“내 꿈이 허무맹랑하다고 비웃을 테면 비웃어라. 하지만 나는 기필코 차원을 넘어서 조상님을…. 히익?! 가깝다! 얼굴이 너무 가깝다! 이러다가 입술이라도 닿으면 어쩌려고….”
“야. 자세히 설명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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