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9회차] 너는 이미 죽어있다
6회차였었나?
수련의 동굴에서 여사제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후, 하렘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최초의 용사가 가출해서 새살림을 차렸다고.
즉, 선배1은 마왕을 쓰러트리고 졸업한 게 아니라, 판타지아 차원을 자력으로 탈출한 것이다.
어떻게?
지금, 도적E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판타지 신의 도움이나 허가 없이 차원이동을 할 수 있다고.
▶당혹: 가능할 리가요….
교생 아가씨. 아는 거 없어? 비밀 친구끼리 감추는 게 있으면 매우 섭섭할 거야.
▶대답: 교직원 사이에는 뚜렷한 세대 차이가 있어요. 최초의 용사를 키워내신 교장과 교감 같은 대선배님들이 포진한 1세대. 최초의 용사랑 동시대의 선배님들로 구성된 2세대. 그리고 저처럼 파릇파릇한 교생으로 이루어진 3세대! 그래서 저는 알고 있는 정보가 적어요.
세대 차이라….
▶기대: 그러니 좀 더 다그쳐서 물어봐요. 저도 궁금하답니다!
교생 아가씨. 재촉하지 말라구.
“재촉하지 마라, 야만용사. 나도 자세한 원리는 모른다. 혼돈의 유물을 3가지 속성으로 각각 3개씩, 총 9개를 모으면 차원이동이 가능하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유물 2개와 아버지께서 찾으신 1개. 그리고 내가 발견한 1개. 우리 가문은 현재까지 4개를 수집했다.”
그리고 이 암시장에서 유물을 훔치면 5개째가 된다.
“흥미롭네.”
블랙박스에 차원이동 기능이 숨겨져 있다고?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A
▷S: □□□□.
▷A: 대상을 혼동시킨다.
▷B: 대상을 파멸시킨다.
▷C: 대상을 망각시킨다.
▷D: 혼동하지 않는다.
▷E: 파괴되지 않는다.
▷F: 망각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블랙박스랑 완전히 별개의 힘인 걸까?
도적E가 언급한 3가지 속성은 혼돈, 파괴, 망각이 분명하다. 종족 ‘카오스’의 종족특성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건 연구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때, 바람의 정령들이 내 고막을 뚫을 기세로 얼굴을 들이박으며 속삭였다.
“...그래?”
예상대로 나서스 왕자 측이 선전하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암시장 관계자 중에 숨을 쉬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하지만 진행이 매우 느렸다.
레벨과 스킬이 아예 수준이 다른 중간보스 나서스 왕자 혼자 움직였어도 진즉 상황이 종료됐어야 정상.
하지만 암흑상회 용병들이 분투하며 아직 버티고 있었다.
무엇을 노리는지는 볼 것도 없다.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요정들을 죽이겠다-!”
바로 이 상황을.
명백한 열세임을 자각한 용병들은 최근에 생포한 1레벨짜리 요정들의 목에 칼을 겨누면서 침입자들을 협박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커억?!”
“동족을 포기할 셈이- 앜?!”
사전에 얘기가 끝났던 침입자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포로 요정들을 한 명이라도 살릴 생각이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굼떴다.
덕분에 암흑상회 용병들은 다음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앞에 다섯을 죽여.”
“살려- 컥!”
“죽기 싫- 꺅?!”
내게 경험치를 빨리면서 1레벨로 전락한 요정들은 별 저항 못 하고 지푸라기처럼 목이 베이며 죽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푹! 푹! 푹!
침입자들이 쏜 화살이 방패로 전락한 요정들의 연약한 몸에 거침없이 박혔다.
활시위를 놓은 요정들의 얼굴에서 죄책감이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족이라도 어차피 파벌이 다르니까.
반대파 수장인 실비아 공주의 측근들로 구성된 인질들이 다 죽더라도 그들은 전혀 상관없었다.
아니, 고의로 천천히 압박하고 있었다.
다 죽을 때까지.
“미친! 인질이 안 통해!”
“요정은 동족애가 깊다고 들었거늘!”
“그냥 다 죽여버려!”
이 사실을 금방 깨달은 암흑상회 용병들은 붙잡고 있던 요정들을 무더기로 죽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탓이다.
어차피 죽을 거, 가증스러운 요정을 하나라도 더 저세상 길동무로 데려가겠다는 고약한 심보였다.
나서스 왕자의 계획대로.
나와 도적E는 그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서 암시장의 창고로 숨어들었다.
혼돈의 유물.
나는 여전히 느낄 수 없었다.
“도적E. 그 유물은 어디에 있지? 여기까지 와서 착각이라고 하면 가만 안 둔다.”
“고귀한 왕족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를 따라와라.”
그때, 앞쪽에서 사람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관리자님! 공간이동 마법진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침입자 중에 포함된 고위마법사가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관리자님! 비밀탈출로도 막혔습니다! 자연적인 붕괴가 아닌 땅의 정령 소행이라 도저히 뚫을 수 없습니다!”
“관리자님! 침입해온 요정들에게 인질극이 통하지 않습니다! 동족을 죽인다고 협박해도 눈 하나 깜빡 안 합니다!”
관리자로 불리는 덩치 큰 사내를 중심으로 다수의 암흑상회 간부와 용병들이 집결해있었다.
그들은 짐을 한 보따리씩 짊어지고 있었다.
판매 예정이었던 상품 중에서 값비싼 위주로 챙긴 것이다. 그 상품 목록에 혼돈의 유물도 섞여 있는 듯했다.
덤으로,
“그 더러운 손으로 내 몸을 만지지 마-!”
미래의 요정왕, 실비아도 있었다.
세계의 정세에 먼지 만큼 지분을 차지하는 마을주민A보다 약한 1레벨이 됐어도 그 난폭한 성질을 버리지 못했다.
번데기처럼 밧줄에 돌돌 말린 실비아는 복(福)도 많았다.
말라깽이 요정 수컷이랑 비교 자체가 안 되는 튼실한 인간 사내의 넓은 어깨에 몸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둥바둥.
복에 겨운 그녀는 그 얄팍한 몸을 연신 흔들고 있었다.
마치, 지느러미가 잘린 인어 같다.
▶소름: 비유가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암흑상회 측은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도적E는 원래 이쪽으로 특화된 좀도둑이고, 나는 자연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에 동화된 덕분이었다.
공간이동 마법진 차단
지상이랑 이어진 길 차단
숨겨둔 비밀통로 차단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침입자들에게 퇴로가 완전히 막혔음을 깨달은 암흑상회의 판단은 빨랐다.
자포자기?
아니다. 아직 숨겨둔 한 수가 있었다.
관리자가 침중한 어조로 선언했다.
“순간이동 마법진을 쓰겠다.”
순간이동 마법진.
이름 그대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마법진이다.
하지만 나라끼리도 왕래할 수 있는 공간이동 마법진이랑 달리,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매우 짧다. 끽해야 이 암흑상회 아지트 위의 숲 어딘가로 이동하는 정도.
그 대신에 안정적이다.
지금처럼 공간이동 마법을 쓰지 못하게 방해받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최고의 방책.
하지만 공간이동 마법처럼 다수를 옮길 수 없다.
한 번에 동행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둘. 그렇기에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탈출할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관리자님.”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관리자님. 제 가족들을 잘 부탁합니다.”
“꼭 탈출해서 복수해주십시오.”
암시장 관리자는 예쁘게 포장된 실비아를 부하에게 넘겨받아서 어깨에 짊어졌다.
실비아는 멋진 관리자와 함께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탈출하는 행운의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귀가 더 길다는 이유로 특혜를 받았다.
외모지상주의는 어딜 가나 빠지질 않는다.
“도적E. 유물은 어디 있어?”
실비아가 여기서 살든 죽든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혼돈의 유물만 챙길 수 있으면 그녀가 어딘가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는 걸 방해할 생각 없다.
나는 관대한 용사님이니까!
“유감스럽게도 관리자가 가지고 있다.”
조작 같은 운명의 실이 나와 실비아를 자꾸 엮으려고 애썼다.
“쩝. 어쩔 수 없군.”
창고에 숨겨둔 순간이동 마법진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법진의 발동에 필요한 촉매의 충전이 끝나면 발동하리라.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됐다.
실비아가 여기서 빠져나가는 걸 원치 않는 오라비 때문이었다.
암흑상회 용병들이 순간이동 마법진 주위에 구축해둔 방어진으로 뛰어든 나서스 왕자.
그가 오른손에 쥔 정령검 엔드미온을 휘둘렀다.
촤악-!
일격에 용병들이 무더기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전성기의 검희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에 S등급 검기를 막아낼 수 있는 인간은 정말 극소수. 인류의 수호자나 이전 세대의 영웅 정도다.
그리고 이 자리엔 그들이 없었다.
“꺄아악?!”
“컥?!”
“이런…!”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인간들이 사방에 널브러졌다. 그들은 목숨을 구걸할 틈도 없이 단말마를 지르며 생명을 마감했다.
첨벙첨벙.
나서스 왕자는 인간의 피로 형성된 붉은색 웅덩이를 밟으며 천천히 순간이동 마법진에 접근했다.
파직-
그의 간섭으로 마법진 일부가 파괴되며 빛이 흩어졌다.
“괴, 괴물….”
뎅강!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관리자의 목이 정령검 엔드미온에 베이며 허무하게 떨어졌다.
“꺄흑….”
관리자에게 붙잡혀있던 실비아도 덩달아 떨어졌다.
여전히 손발이 묶인 그녀는 꼼짝달싹 못 했다. 피와 흙이 섞인 진흙 위에 얼굴도장을 찍으며 꼴이 엉망이 됐다.
“사랑하는 내 동생 실비아. 너를 믿고 따라온 소중한 동족들이 참으로 많이 죽었더구나. 이 오라비는 유가족들에게 이 참극을 어떻게 전해야 좋을지 벌써 막막하다.”
“아….”
“어떻게 속죄할 테냐?”
“저, 저는….”
실비아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자결(自決).
2회차 때도 그녀는 스스로 생매장되려고 했었다. 아주 편리한 일회성 책임회피, 면죄부다.
나는 실비아가 얼른 피 웅덩이에 코 박고 자살하길 기다렸다.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린 모양이다.
“용사님. 나오시지요. 이미 포위되셨습니다.”
나서스 왕자가 차분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라누벨처럼 아는 척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숨어있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 정정한다.
“미, 미안하다. 나 때문에 들킨 것 같다….”
어깨와 목을 움츠린 도적E가 내게 사과했다.
두 눈에 힘을 주며 부릅뜬 나서스 왕자는, 내가 아닌 옆의 요정 암컷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적E가 들킬 만한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서스 왕자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아름다운 당신의 몸에서 풍기는 감미로운 향기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오. 스킬로 기척을 지운 채 없는 척해도 소용없소. 두근두근 떨리는 내 심장이, 뜨거워진 영혼이, 그대가 이곳에 와 있음을 내게 알려주고 있으니! 자! 이만 포기하고 당신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오. 그녀의 주인을 자처하는 용사님도.”
나는 도적E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망할 도적아. 고결한 척하는 왕족이면 좀 씻고 살아라. 판타지 촌년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억울하다! 이건 모함이다!”
“변명은 죄악이야.”
“큭!”
도적E를 침묵시킨 나는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 들키고 말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서스 왕자. 나는 그대가 좀 더 이성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무척 실망스러웠다.
“하하! 용사님.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나 봅니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당신이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름다운 숙녀분을 해방하고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그러면 무사히 밖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용사님도 아시겠지만, 여기서 변을 당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오길 기다린 건가?”
나서스 왕자는 진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장자로서 충고하겠습니다. 들켰다는 말에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정말 초보적인 실수입니다. 하하! 용사님의 특기인 정령은 소용없습니다. 이미 당신은 제 사정권 안에 있으니까요. 정령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제가 용사님을 베는 시간이 더 짧습니다.”
“충고라….”
“그녀를 제게 넘겨주십시오. 당신 곁에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습니다.”
“나서스. 뭔가 크게 착각하는데….”
“착각?”
쫘악-! 툭, 툭….
되묻는 나서스 왕자의 육체가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좌우로 예쁘게 이등분됐다.
“나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구?”
목격자는 그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부정: 있는데요?
교생 아가씨에게 지적받은 내 시선이 땅바닥으로 향했다.
사랑하는 오라비의 분홍색 내장과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실비아가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눈이 딱 마주쳤다.
“또 만났네.”
“히익?!”
처음 만나면 우연이지만, 두 번째부터는 운명이라고 했다.
나는 입가에 친근한 미소를 그렸다.
“안녕? 나는 정의로운 S급 용사님이라고 해. 구해주셔서 고맙다고 말하고 죽을래? 안 하고 죽을래?”
둘의 차이가 뭐냐는 도적E의 멍청한 질문은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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