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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116화 (116/430)

 116화

[9회차] 용사의 아내.avi

아주 기묘한 감각이었다.

유모의 자궁 속에 있을 때랑 또 달랐다.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자각은 있지만,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보고 듣는다.

현재, 내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은 이 둘뿐이었다.

한 가족이 누울 수 있을 만큼 넓고 화려한 침대 위에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남녀가 보였다.

탁, 탁, 탁, 탁….

무릎 꿇고 엎드린 인간 여성의 풍성한 엉덩이 뒤편에서 남성이 열심히 리듬을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살이 맞닿을 때마다 찰진 소리가 기관차 엔진음처럼 규칙적으로 들렸다.

그러다가 뚝 멈췄다.

‘여보. 벌써 끝났어요?’

여인이 아름다운 얼굴로 뒤편을 돌아보며 새침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게. 미안. 몸이 예전 같지 않네.’

시선이 맞닿은 사내가 멋쩍은 얼굴로 대답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상체는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하체의 분신만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보는 내가 애처로울 지경이다.

‘먼저 씻을래요.’

‘그래.’

찜찜하다며 샤워실로 먼저 떠난 여인을 배웅하고 혼자 남은 사내는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서 휴지로 자신의 아래를 닦았다.

그의 몸에는 다양한 종류의 흉터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내가 아는 것도 있었다.

무려 5가지나.

등에 붉은색의 톱니 모양으로 쭉 그어진 상처는 남대륙 5대 재앙의 화염 손톱에 화상을 입으면 남는 흉터다.

안 씻어서 발이 연녹색으로 변한 게 아니다. 중앙대륙 5대 재앙의 맹독 숨결에 노출되면 완치 후에도 저렇게 남는다.

멋진 복근을 짓뭉개며 둥글게 말린 푸른색의 회오리는 북대륙 5대 재앙의 얼음 송곳니에 물리면 생기는 후유증.

왼팔에 한가득한 기하학적인 문신은 멋이 아니다. 서대륙 5대 재앙의 영혼을 왼손에 봉인해둔 것이다.

목 언저리에 닭살처럼 볼록볼록 돋아난 여드름. 동대륙 5대 재앙의 저주를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내가 자세히 아는 이유?

1회차 때 비슷한 코스를 밟았었다.

‘예전 같지 않아. 예전처럼 흥분되지 않아…. 음?’

자신의 흔적을 닦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넣던 사내는 멈칫했다. 그리고는 쓰레기통에 손을 넣어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브로치였다.

도적E가 암시장에서 발견한 혼돈의 유물.

영상의 브로치는 유물이라고 불릴 만큼 낡진 않았지만, 디자인이나 정황상 똑같은 장신구가 틀림없다.

‘여보. 씻어요. 그리고 샤워실 두 번째 선반에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끼는 비누니까.’

‘어, 그래.’

사내는 여인 모르게 등 뒤쪽에서 브로치를 휴지에 둘둘 만 후, 왼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샤워실로 향했다.

‘다 씻은 후에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요.’

‘...그러지.’

연신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단히 짧게 샤워를 마친 사내는 옷도 빠르게 입었다.

실내복이 아닌 외출복.

여인의 진지한 이야기만 듣고 나가려는 듯했다.

‘당신. 재작년에 넷째 언니의 아들에게만 새로운 수련법을 몰래 가르쳐줬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아, 그거? 조그마한 녀석이 혼자 낚시 나가는 나를 쫓아온다고 해서 기특하잖아. 그래서 낚시하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가르쳐줬지. 대단한 수련법은 아니야.’

‘당신과 나의 아들은요?’

‘...왜?’

‘그 쥐방울만 한 아이에게 처음으로 졌다고요! 외모부터 재능까지 완벽한 내 아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 새로운 수련법에 당했어요! 함께 관전하던 넷째 언니가 제 앞에서 얼마나 잘난 척했는지 알아요?’

‘그…. 미안.’

뭐라고 대꾸하려던 사내는 포기하며 사과했다. 그러면서 호주머니에 숨겨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정말로 미안하면, 이틀 뒤에 저랑 아들의 아카데미 학부모간담회에 참석해줘요.’

‘이틀 뒤? 그날은….’

‘당신 때문에 우리 아들이 완전히 풀이 죽었다고요! 선생들 앞에서 칭찬 좀 해주고 새로운 기술도 가르쳐줘요. 그까짓 낚시 따라간 게 뭐라고 자식들을 차별해요? 제가 이런 굴욕과 멸시를 당하려고 당신의 아이를 낳은 게 아니라고요. 알겠어요?’

‘...그래.’

‘이틀 뒤에 올 거죠?’

‘꼭 갈게.’

‘호호! 사랑해요, 여보.’

‘...나도.’

진지한 이야기를 마친 사내는 곧바로 외출했다.

5대 재앙의 흉터를 골고루 가진 자답게 능력 또한 범상치 않았다.

대궐처럼 으리으리한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날개도 없이 하늘을 훨훨 날아서 어딘가로 향했다.

비행 내내 주위의 경치는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정보가 아니란 뜻일까?

그렇게 한참 동안 날아간 사내는 아름다운 바닷가에 착지했다.

“하하!”

“호호!”

수영복 입은 사람들이 물장구치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사내는 힐끔 주위를 둘러보고는 허공에서 소환한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목적 없는 산책이 아니었다.

일직선으로 걸어간 그는 어느 파라솔 그늘에 누워있는 요정 남성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엘브하임. 자네는 역시나 여기 있었군.’

나도 아는 요정이었다.

후손을 힘들게 하는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

그가 헤벌쭉 웃으며 해변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사내에게 반갑게 회답했다.

‘오! 공사다망한 용사님께서 아름다운 해수욕장에는 무슨 일이신가? 인간과 요정의 화합을 위한 7차 정상회담은 이틀 뒤에 갖기로 했던 것 같은데.’

요정왕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쥐어짜는 어조로 부탁했다.

‘나도 아는데…. 하루만 연기해줬으면 좋겠어.’

‘말이야 쉽지. 이번 회담은 두 종족의 지긋지긋한 원한을 마침내 정리할 기회라서 매우 중요해. 비공식회담이긴 하지만, 강대국과 종족들을 대표하는 높으신 분들이 모인다고. 그들에게 1시간도 아니고 하루나 기다려 달라는 건….’

‘미안하네.

‘또 가족 문제인가?’

‘......’

‘거참! 용사님의 싸움은 마왕을 쓰러트려도 안 끝나는구먼.’

3대 요정왕이 ‘용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내.

그가 ‘최초의 용사’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는 엘브하임, 자네야말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인간과 요정의 화합과 공존을 위해서 가장 바빠야 할 사람은 요정왕이어야 할 텐데.’

용사가 요정왕 옆에 털썩 앉으며 말을 받았다.

‘하하! 주위에서 나를 힘들게 하거든.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출렁거리는 파라다이스를 구경하며 마음을 다잡지. 아! 파도 말일세.’

그때, 요정왕의 시선은 좌에서 우로 천천히 이동했다.

첨벙첨벙 해변을 따라 오른쪽으로 뛰어가는 인간 아가씨들의 속도랑 우연히 딱 맞았다.

아름답게 출렁거린다.

‘...엘브하임. 감상이 끝나려면 멀었나?’

‘아! 미안. 하여간 알겠네. 어렵게 성사한 회담을 하루 연기해달라고 해서 솔직히 좀 짜증 나긴 했지만, 출렁거리는 파도를 보면서 마음이 진정됐네. 어쩔 수 없지! 용사님의 가정이 평화로워야 세상도 평화로워지니. 하하!’

‘이해해줘서 고맙네.’

이후, 두 남자는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자리를 옮겨서 해변에서 장사하는 술집으로 이동. 살짝 취기가 오른 용사가 호주머니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그 브로치는 뭔가?’

‘내가 신출내기 용병이던 시절, 가진 돈을 전부 털어서 아내에게 선물했던 걸세. 당시엔 선배 용병이었던 그녀에게 참 잘 어울리겠다 싶었거든….’

‘낭만적이군.’

‘나도 그때는 젊었으니까.’

‘선물했다면서 왜 자네가 가지고 있나?’

‘오늘…. 휴지통에서 발견했네.’

그 뒤로 두 남자는 한참 동안 말없이 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침묵도 영원하진 않았다.

주점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구경하며 실실 웃던 요정왕이 귀 끝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질문했다.

‘그 브로치. 버릴 건가?’

용사가 브로치를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잘 모르겠네. 자존심 강한 아내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이 브로치에는 착용자를 지켜주는 효과가 있거든.’

‘설마…? 용사님께서 자신의 힘을 떼어서 직접 걸어둔 효과인 건 아니겠지?’

‘......’

‘허허. 내 딸에게 선심 쓰듯 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비보(祕寶)였군. 쉽게 처분할 물건이….’

‘가지게.’

자신의 힘이 깃든 브로치를 3대 요정왕에게 건네는 최초의 용사.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무언가를 내려놓듯 담담했다.

‘정말로?’

‘그래. 딸아이에게 준다고 했었지? 자네의 혈통만 효과를 쓸 수 있도록 조금 전에 조정해뒀네. 중요한 회담을 내 멋대로 연기한 사죄의 뜻으로 받아주게.’

‘용사님께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최초의 용사가 아내에게 선물했던 브로치는 3대 요정왕의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멀쩡한 호주머니 놔두고 왜…?

연극의 막을 내리듯 어두컴컴해졌다.

*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주위의 경치를 찬찬히 둘러봤다.

암흑상회 아지트 위의 울창한 숲.

판타지아 세계로 무사히 돌아온 듯했다.

“야만용사?! 갑자기 왜 유물을 버리는가?!”

“불결해서.”

요정왕의 거기에 들어갔던 브로치다. 몰랐다면 상관없지만,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현재는 계속 만지고 싶지 않았다.

“후손이 뻔히 보는 앞에서 근거도 없이 가보를 욕하다니! 나중에 천벌 받을 거다! 야만용사!”

“...너는 못 봤군.”

그 영상은 나만 본 듯했다.

“뭘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야.”

이 브로치는 애초부터 봉인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요정왕의 혈통에만 발동되도록 설계되어있는 건 맞다.

유전자는 영구적이지 않다.

근친혼이 아닌 이상, 세대를 거듭할수록 조상님의 피가 옅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재는, 혈통이 옅어져서 착용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먼 후손의 피를 직접 묻히는 식으로만 효과를 발동시킬 수 있는 게 아닐까?

“도적E.”

“사과라면 받아주겠다.”

내가 수풀에 버린 브로치를 소중하게 챙긴 도적E가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사과는 됐고.”

“그렇다면 왜 불렀는가?”

“지금까지 모은 혼돈의 유물은 어디에 있지? 이 브로치 빼고 4개를 모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혼돈의 유물마다 영상이 남아있다고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그 영상들을 본다면,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를 탈출하거나 교직원 일동에게 한 방 먹여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질문의 진위는 모른 채 도적E가 대답했다.

“남대륙에 있다.”

“남대륙 전체가 네 집이니?”

“이 이상은 가르쳐줄 수 없다. 실비아에게 했던 것처럼 정신계통 스킬을 쓰든 고문하든 그건 야만용사의 자유다. 하지만 나도 사랑하는 가족의 안위가 걸린 문제인 만큼, 폭력에 굴복해서 발설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그대를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도적E가 꽤 강하게 나왔다.

피곤한 전개다.

“요정을 집에서 키우는 가축쯤으로 아는 인간 귀족에게 안 팔려가도록 해줬잖아.”

“그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에서 성급한 판단으로 가족을 위기에 빠트리고 싶진 않다. 답답하거나 섭섭하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

“......”

“뭐…. 좋아. 느긋하게 신뢰를 쌓아볼까.”

정말 오랜만에 하는 평판작업이다. 내 실력이 녹슬었는지 확인해볼 좋은 기회다.

“진심인가?!”

“뭘 놀래? 먼저 신뢰를 쌓으라고 말한 건 너라구?”

“그렇긴 하지만…. 야만용사라면, 내 존엄성을 몇 번이고 짓밟으면서 어떻게든 알아내려 할 줄 알았다.”

“어허! 나는 용사야.”

정의롭지 않은 수단과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의문: 그랬나요? 여태 몰랐어요!

교생 아가씨.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어.

도적E가 뽕으로 내게 사기 치긴 했지만, 못 가진 자의 애교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다.

민폐를 끼치거나 심각한 피해를 준 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집 주소를 가르쳐줄 수 없다는 명목 또한 공감할 수 있는 부분.

적대적이거나 비협조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내 말이 틀렸어?

▶답답: 전부 맞아요! 선배님들도 강한수 생도님의 정의로운 마음씨를 오해하지 않으면 참 좋을 텐데요. 제가 괜히 속상해지네요.

괜찮아, 공명정대한 교생 아가씨!

나중에 복리(複利)로 계산해서 전부 받아낼 거니까!

“야만용사가 신뢰라고?”

“싫어?”

“아, 아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먼저 공개하는 거지.”

“음?”

가슴만큼 뇌도 빈약한 요정이 이해를 못 한 듯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도적 아가씨. 내 가족은 다른 차원에 살고 있어서 집 주소를 가르쳐줘도 증명할 방법이 없어. 그래서 가족 대신에 신뢰의 표시로, 내가 존경하는 스승님을 소개해줄게.”

“야만용사의 스승님…?”

“그래.”

“맙소사!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란 말인가…. 나의 알량한 머리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아주 몰랑몰랑한 분이시지!”

정의로운 용사님과 잡것들은 마스터 몰랑이 사는 마을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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