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17화 (117/430)

 117화

[9회차] Thank you!

“용사님! 저쪽에서 구조요청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아요!”

“네 기분 탓이야, 라누벨.”

이동방식은 2회차랑 똑같았다.

우리는 만두왕국의 수도 마탑(魔塔)에 설치된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타국의 도시 마탑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라고?

말도 안 된다.

만두왕국의 왕궁을 나와서 모험을 떠나고부터 고작 1시간 지났을 뿐인데, 벌써 사건이 터졌을 리 없잖은가?

정의로운 용사님이 살아있는 전염병도 아니고.

“정말이에요!”

라누벨이 발을 동동 구르며 계속 보챘다. 저러다가 다리 아프다면서 얼마 안 가서 주저앉을 것 또한 알고 있다.

“흠흠. 용사님.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나도 들었다, 야만용사.”

짐꾼과 도적E가 편승했다.

“너희들! 정의로운 용사님의 동료를 자처하면서 부끄럽지 않아?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따위에게 매수당하다니!”

“라누벨은 동료들을 매수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저의 귀여움은 타고난 거예요!”

“닥쳐!”

이제 겨우 4일차.

9회차 라누벨은 한번 말했을 뿐이지만, 나는 8가지 버전의 라누벨에게 비슷한 말을 100번쯤 들은 것 같다.

이것이 반복 학습의 힘이란 걸까?

라누벨을 향한 악의(惡意)가 나날이 커지는 게 체감될 정도다.

▶의문: 해탈하실 때가 된 것 같은데요?

교생 아가씨. 나도 그게 의문이야!

“잘 들어. 너희는 300레벨 미만의 잡것들이고, 나는 999레벨이 넘은 초월자야. 누구의 청력이 더 발달했을지는 말할 것도 없겠지? 내가 못 들었다면 그게 진실이야. 너희는 헛된 영웅심으로 환청을 들은 신출내기에 지나지 않아. 알겠어?”

“살려주시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용사 일행의 모험은 매우 순탄했다!

우리는 도시의 마구간에서 구매한 준마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쳐서 일직선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꾹 참았다.

9회차의 목적은 졸업이기 때문이다.

서두를 생각이었다면 벌써 마왕 잡으러 갔을 것이다.

전투력, 명성, 평판, 인성.

4가지 학점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나라도 평균점수 이하로 내려가면 졸업할 수 없다.

전투력은 회귀할 때마다 누적되면서 이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경지에 도달했지만, 나머지 셋은 늘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인성 점수.

채점의 판단 기준을 여전히 모르겠다.

25년 경력의 용사님이라도 이것만은 호언장담할 수 없다.

▶제안: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박차가 있어야 한다는 격언, 혹시 들어보셨나요? 저는 강한수 생도님의 훌륭함을 매우 잘 알지만, 모르는 우매한 민중의 호소를 약간만 들어주시는 게 어떨까요?

교생 아가씨의 제안은 지극히 옳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

훌륭한 내가 나서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히프리아로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고, 사이가 틀어진 남녀의 정신을 개조해서 잉꼬부부로 만드는 것마저 가능하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마을주민A의 부탁으로 죽은 자식을 살려줬더니, 마을주민B가 내 아이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소문을 들은 이웃 마을이나 도시의 주민C도 부탁하고, 주민D는 대범하게 하인을 보내며 찾아오는 서비스를 요구한다.

현실적으로 그들을 다 도울 순 없다.

전부를 구원하진 못한다. 그리고 도움을 못 받은 불특정 다수가 용사를 원망할 것이다. 내 인성을 비난할 것이고, 명성과 평판도 여기서 자유로울 순 없다.

반면, 용사 지크는 어떤가?

워낙 무능한 탓에 곧잘 한계에 맞닥트린다.

그래도 판타지 원주민들은 용사 지크가 실패해도 애써줘서 고맙다며 칭송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

▶난감: 어려운 문제네요···.

교생 아가씨.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대단히 피곤해지니까.

“KuKu···!”

“GuGu···!”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 곳곳에 사는 오크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방해하고 나섰지만, 내 앞길을 가로막을 순 없었다.

신성? 마기? 성검? 마법? 동료?

다 필요 없다.

“정령들아. 집세 낼 시간이다. 처리해.”

내 몸에 빼곡히 들러붙은 정령들이 조금씩만 노력하면, 오크 따위는 순식간에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한다.

“NuNu~?!”

“BuBuuu~?!”

땅의 정령이 오크들의 다리를 대지에 묻고, 불의 정령이 화염방사로 예쁘게 태운다.

바람의 정령은 오크 굽는 냄새와 불씨가 퍼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물의 정령이 타고 남은 숯덩이를 씻어낸다.

마무리로, 마음의 정령이 오크들의 명복을 빌어준다.

팔팔했던 오크가 먼지로 변하기까지.

그 과정은 대략 3초쯤 걸렸다.

“나는 순수한 정령들이 야만용사를 따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배려심 없고 독선적인 남자의 어디가 좋다고···.”

“직접 물어봐.”

“전부라는 대답에 생각을 포기했다···.”

변변찮은 도적으로 살아온 탓에 언제나 자기 발로 이동해온 도적E는 승마술을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라누벨 뒤에 타도록 지시했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가면 안 되겠느냐는 건방진 제안은 1초의 고민하는 척도 없이 기각했다.

그때부터 저리 툴툴거리고 있었다.

“뭐가 불만인데?”

“멀쩡한 사내를 놔두고 여자끼리 말을 같이 타는 모습을 제삼자가 본다고 생각해봐라. 틀림없이 오해할 거다.”

“그 반대는 괜찮고?”

부부나 애인으로 오해받기 딱 좋다.

“조상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남녀가 함께하려는 본능은 출렁이는 바다와 단단한 육지가 만나듯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특히, 이 고고학자 아가씨랑 붙어 있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진다. 고귀한 혈통의 요정 왕족이 평범한 인간 여성보다 매력이 떨어진다니. 신께선 어찌 이리도 인간을 편애하신단 말인가···.”

“자신감을 가져.”

“흥!”

“네가 라누벨보다는 매력적이라구?”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은 얼굴만 봐도 화가 솟구친다. 거기에 비하면 도적E는 내 취향에서 살짝 비껴갔을 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용사님이 거짓말해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신뢰.”

“그건 내 스승님을 소개해줘서 쌓는다고 했잖아. 여성의 미모를 칭찬하는 화법은 판타지아 귀족사회에서 예행인사 같은 거지. 이까짓 거로 신뢰가 쌓일 리가.”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기 위해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라? 용사님에게 스승님이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 전혀요!”

“위대한 존재를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스승이란 이야기는 안 하셨어요.”

“이젠 알았으니 됐네.”

“용사님! 거짓말은 좋지 않다고 라누벨은 생각해요! 판타지아 대륙에 소환되고 고작 5일 되신 분에게 스승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라누벨이 정론을 이야기했다.

2회차에서는 그냥 무시했지만, 도적E의 신뢰에 금이 갈 수 있기에 제대로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스승님과 나의 인연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어졌지. 라누벨. 너의 덜떨어지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우우···.”

잡것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스터 몰랑이 사는 마을.

위대한 존재의 가호를 받기 때문일까. 이 작은 마을은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서 손꼽히는 평화로운 장소였다.

“짐꾼. 저기 보이는 건물이 여관이야. 지친 말들을 그곳의 마구간에 맡기고 방을 잡아. 1인실이랑 3인실.”

“예? 2인실 2개가 아니라요?”

“어째서?”

“저랑 용사님이 같은 방을 쓰고, 라누벨 양과 일리나 님이 다른 방을 쓰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 2회차 짐꾼은 똘똘한 편이었는데, 곱게 큰 9회차 짐꾼은 상당히 멍청한 것 같았다.

“모험경비를 누가 대고 있냐?”

“용사님이십니다.”

“그러면 짐꾼, 네가 주장하는 상식인으로서 생각해보자. 내가 물주(物主)인데, 무전취식 중인 너희들의 편의까지 내 수준으로 맞춰줘야겠니? 여기가 공산주의- 어흠. 불만 있으면 너는 노숙하던가. 돈 아끼고 좋네.”

“아닙니다!”

짐꾼이 말들의 고삐를 모아쥐고는 여관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나는 마을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라누벨과 도적E가 그런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현재는 무더운 한여름의 정오(正午).

귀신의 마을이 아님에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었다.

주민들이 산산한 아침에 밭일을 일찍 마치고 다들 햇볕을 피해서 집에 틀어박힌 탓이다.

그들은 집의 창문 틈새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기대: 강한수 생도님께 그 사기적인 기술을 전수해주신 분이 여기에 사시는 거 맞죠? 정말 기대되네요.

후후! 교생 아가씨도 존경하게 될 거야.

“잡것들. 스승님과 나의 인연. 방해하지 말고 잘 지켜봐.”

나는 고위귀족처럼 차려입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려다가 멈췄다. 바람의 정령들이 이미 깔끔하게 청소해준 까닭.

제법 눈치가 있는데?

나는 짧게 심호흡 후, 마을 촌장이 사는 집의 문을 정중히 두드렸다.

똑똑.

“실례지만, 누구세요···?”

문 안쪽에서 친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만남이었던 2회차로부터 어느새 15년이나 흘렀지만, 이번 세 번째 만남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 소녀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꼬마 아가씨가 키우는 무지갯빛 슬라임을 보러 왔단다. 절대로 해코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끼이익-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

양팔로 슬라임을 꽉 끌어안은 소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내게 질문했다.

“누구신데, 우리 몰랑이를 찾으세요?”

몰랑?

소녀의 품에 안겨있던 마스터 몰랑께서 출렁거리셨다. 아무리 위대한 분일지라도 기억이 없긴 마찬가지.

그 무신경함이 굉장히 섭섭했다.

“나는 16년쯤 전에 아가씨의 친구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란다. 그 보답을 하려고 왔어요.”

“16년?! 와아! 몰랑이 나이가 엄청 많았구나!”

몰랑···?

위대하신 스승님. 나이를 오해받은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만 좀 몰랑거리십시오.

제 어깨너머에서 두 잡것이 의심의 눈초리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용사님. 16년 전이요?”

“야만용사의 스승님은 참···. 귀엽군.”

그때, 집 안쪽에서 엿듣고 있던 촌장 내외가 “귀하신 분들을 모시기엔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라고 말했다.

귀중품을 노린 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라누벨과 도적E는 복장이 떠돌이처럼 변변찮지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풍스러운 귀족처럼 꾸민 덕분이다.

이유는 또 있다.

귀족에게 거슬리지 않는다.

철저하게 계급사회로 굴러가는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서 힘없는 서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요령을 깨우치면 어른이 됐다는 의미.

하지만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소녀는 문 옆으로 비켜서며 천진난만하게 인사했다.

“저희 마을에 어서 오세요! 몰랑이도 얼른 인사해야지!”

몰랑? 몰랑!

나와 잡것들은 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기연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

온종일 몰랑거리는 마스터 몰랑의 움직임은 참으로 심오하다. 하나의 율동으로 모든 대화와 표현을 총망라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판타지 능력치랑 대조된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고 싶다.

“콜록콜록!”

심마(心魔)에 빠질 뻔했다.

붉은색 피를 한 바가지 토한 나는 수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두 번째 가르침으로부터 15년이 흘렀고, 육체는 자연체에 가까워지면서 세 번째에는 더 많은 게 보이리라고 예측했다.

여기까진 맞았다.

몰랑몰랑~

마스터 몰랑이 수풀에 벌러덩 누운 내 위에서 경치를 구경했다. 모든 걸 이룬 존재답게 참으로 느긋했다.

“...마스터 몰랑. 벽을 넘어설 힌트 같은 거 없습니까?”

몰랑···. 몰랑-!?

끈질기다고 나무라듯 몰랑거리던 마스터 몰랑이, 내 바지 속으로 빠르게 몰랑거리며 파고드셨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용사님. 몰랑이 못 보셨어요?”

어느덧 닷새째 못살게 괴롭히는 라누벨 때문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네요. 용사님이랑 산책하러 나갔다고 들었는데···. 몰랑이를 찾으면 라누벨에게 알려주세요. 꼭!”

“......”

“저기, 용사님? 듣고 계세요?”

“...그래.”

“우우. 몰랑이가 어디 갔지···.”

라누벨이 떠나고 나와 마스터 몰랑만 남았다.

모, 몰랑···?

나는 바지에서 몰랑몰랑 조심스럽게 나오는 무지갯빛 슬라임을 양손으로 떠받들었다.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어졌다.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2765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정령MAX 축복MAX 조련SS 영감SS ■■S···

▷상태: 성검, 성녀, 마검, 현자

블랙박스가 S등급으로 오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지만, 능력치로 표시되지 않는 발전과 성장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게 전부-

“감사합니다, 마스터 몰랑!”

몰랑몰랑~

자비로운 스승님은 늘 그렇듯 겸손하게 몰랑거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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