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9회차] 참 쉽지?
다른 스킬처럼 표시되진 않았지만, 그동안 블랙박스는 A등급 숙련도 99.99%에서 계속 정체되어있는 느낌이었다.
A등급까지는 ‘혼돈’을 수집하면 스킬이 저절로 성장했었다. 하지만 S등급은 어떤 벽에 막힌 것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 이유를 마침내 깨달았다.
관점(觀點)
블랙박스를 평범한 스킬처럼 생각했었다.
최초의 용사가 개발한 힘이란 인식은 있었지만, 단순히 제작자만 달라졌을 뿐이라고 치부했다.
여기서부터 어긋났었다.
최초의 용사도 과거에는 판타지아 대륙의 ‘학생’이었다.
나처럼 판타지 능력치를 사용했으며, 레벨과 스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랬던 남자가 자신만의 스킬을 개발해서 탈주했다.
당연히 기존의 규칙을 무시할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쉽게 봤군.”
쉬운 일이 안 돼서 초조해졌었다.
그러던 중, 마스터 몰랑이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면서 온몸이 노곤해졌다.
몸과 마음이 차분해졌다.
저수지가 홍수처럼 터지듯 번뇌가 쓸려갔다.
그랬더니 방금까지 안 보이던 이치가 머릿속에 콕콕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건 그 결과였다.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S
▷SS: □□□□.
▷S: 기록한다.
▷A: 대상을 혼동시킨다.
▷B: 대상을 파멸시킨다.
▷C: 대상을 망각시킨다.
▷D: 혼동하지 않는다.
▷E: 파괴되지 않는다.
▷F: 망각하지 않는다.
모자이크로 가려져 있던 블랙박스 S등급 효과가 공개됐다.
기록한다.
순서상 ‘망각’이랑 관련된 효과일 줄 알았는데, 완전히 정반대의 효과가 튀어나왔다. 이 시점에 보통은 “무엇을 기록한다는 거지?”라고 한참을 고민했어야 했지만.
나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혼돈의 유물을 이걸로 만들었군?”
자신의 힘을 사물에 각인하는 기술이다.
마법사의 마법진이랑 비슷하지만, 그것은 돈을 주고 산 마법적인 촉매로 무한정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에 이 힘은 다르다.
사물에 힘을 부여한 만큼 자신의 힘이 감소한다.
약해지는 걸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즉, 최초의 용사가 마누라에게 선물한 브로치는 자신의 육체를 떼어다가 만들었다고 표현해도 절대 과하지 않다.
그리고 내린 결론.
나에게는 S등급 효과가 쓸모없었다.
내 힘을 주고 싶은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이라면 효도선물로 테니스라켓에 걸어드릴 의향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만날 방법이 없었다.
교생 아가씨. 택배업은 안 하지?
▶긍정: 당연히 안 하죠!
판타지아 세계에서 제작한 테니스라켓에 블랙박스의 힘을 부여해서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싶다. 그러면 세계제패는 힘들어도 전국제패쯤은 가능하실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번에 졸업해서 지구로 돌아가면 아무런 걱정 없지만,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대신 부탁하는 것이다.
▶의문: 누구에게요?
아주 좋은 질문이야, 교생 아가씨.
나는 지구에서 ‘늙은 왕자’를 만났었다.
그는 판타지아 세계를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늙은 왕자가 여성용 골렘에 처박혀서 약해졌을 때 방법을 물어봤었다.
늙은 왕자의 수법은 대단히 놀라웠다.
▶궁금: 뭔데요?
교직원 일동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알려줄게.
▶맹세: 비밀로 한다고 약속할게요!
좋은 마음가짐이야! 비밀 친구!
블랙박스로 지구와 판타지아 차원을 연결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드넓은 우주 위에 은하계 단위로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하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실로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한다면 어떨까?
실을 쫓아가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절대 끊어지지 않는 실.
만약에 정말로 우주에서 은하계 단위로 떨어진 두 사람이 실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 실은 단 1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우주가 팽창하기도 하지만, 우주에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걸 물리적으로 견딜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한다면?
블랙박스는 기존의 규칙을 파괴한 신기술.
이것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 실이었다.
▶감탄: 굉장하네요!
늙은 왕자는 초월영역에 접어든 스킬 ‘침투’로 판타지아 대륙에 흩어져 있는 ‘혼돈의 힘’을 추적해서 들어왔다.
그리고 빠져나갈 때는 외부에 연결해둔 실을 따라간 것이다.
나도 이 방법을 쓸 작정이다.
▶지적: 하지만 강한수 생도님. 늙은 왕자는 이미 소멸했잖아요?
어허! 교생 아가씨가 무서운 소리를 쉽게 하네!
늙은 왕자는 죽지 않았다.
내 경험치가 되어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늙은 왕자를 쓰러트리며 획득한 블랙박스의 힘을 새로운 골렘에 기록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에는 늙은 왕자가 예뻐하는 인어가 아직 살아있다. 어쩌면 생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랑 블랙박스로 이어져 있다면, 늙은 왕자는 다시 한번 지구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다.
나는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다.
늙은 왕자를 먼저 지구로 보낸 후, 내가 늙은 왕자의 블랙박스를 추적해서 지구로 넘어가는 것이다.
“뭐…. 그건 내가 10회차까지 갔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까지는 매우 순조로웠다.
이대로 쭉 모험이 진행되면 졸업은 문제없다.
굳이, 탈출과 안전이 확실하지 않은 불완전한 편법으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나는 겁쟁이니까.
▶황당: 그건 조심성이 많다고 하는 거예요….
아무튼, 능력치로 표시되지 않는 성장도 있었다.
내 육체의 진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 한복판에 떨어진 나는, 재회한 늙은 왕자와의 전투에서 대단히 불리했었다.
날개가 매우 절실했다.
그 마음이 날개를 생성하도록 했다.
모든 건 마음가짐이다.
굉장한 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도 꿈쩍하지 않는 내 하반신이, 마스터 몰랑의 몰랑거림에 단 1초를 견디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뿌득, 뿌득.
나는 육체를 재구축했다.
뼈마디에서 섬뜩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강해질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판타지 능력치 없이도 5대 재앙쯤은 간단히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강력한 생명체의 표본이 더 필요했다.
“뇌비우스의 협조를 받아야겠군.”
망룡왕 뇌비우스.
그 친우는 단단한 비늘과 지독한 맹독을 가졌다.
황혼기를 조용히 보내란 뜻으로 웬만하면 안 건드리려고 했지만, 이 근방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라면 망룡왕 뇌비우스밖에 없었다.
그때,
몰랑?
마스터 몰랑이 솔깃하며 몰랑거리셨다.
“허! 스승님. 제가 떠나서 기쁩니까?”
몰랑몰랑!
긍정하듯 더욱 출렁거리셨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올 만큼 굉장히 섭섭했지만, 지난 닷새 동안 라누벨이 저지른 만행들이 있어서 따지진 못했다.
*
나와 잡것들은 마스터 몰랑이 사는 마을에서 엿새를 머물렀다.
그 뒤에 2회차 코스를 그대로 답습했다.
“KuKu…!”
“BuBuu!”
평균 50레벨의 오크들이 모여 사는 군락지로 이동했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내 평판과 업적, 인성에는 전혀 문제없지만, 여기에 요정왕 마누라의 호위기사가 살고 있다.
인간 대신 오크랑 화합하려는 그 요정의 판단과 결정을 방해하고 싶진 없지만, 2회차 때 대화조차 못 나눠서 정보가 부족했다.
구해주면 숨겨진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을까?
궁금하기에 간섭하기로 했다.
무슨 이벤트일까?
이번에 졸업하면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지구의 졸업생 중에 그 이벤트 내용을 아는 인간이 있을 거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일반적인 용사는 알렉스의 샌드백이기 때문이다.
“용사님! 오크가 잔뜩 있어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흠. 나도 가담하겠다. 야만용사.”
나는 잡것들을 말리지 않았다.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채 온종일 성희롱하는 정령들을 활용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할 수 있지만, 잡것들의 레벨이 지금처럼 너무 낮으면 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자기 몸을 지킬 수준의 레벨은 돼야 한다.
“당장은 평균 500레벨이면 최소조건은 될 것 같은데….”
S급 용사님이랑 모험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
“TuTu~?!”
“JuJuu~?!”
잡것들이 빠른 속도로 오크들을 처치했다.
짐꾼은 300레벨에 근접한 높은 레벨과 창술로 50레벨 오크들을 어렵지 않게 처치했다.
라누벨은 불덩이 마법으로 오크들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귀여운 척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이 자꾸 거슬렸다.
도적E가 가장 화려했다.
“엘브하임의 부름에 응하라! 위대한 마검이여!”
혼돈의 유물은 아니지만, 도적E의 가문 대대로 내려온 마검이었다.
그 칼날은 시커먼 마기로 둘러싸여 있었고, 허리춤에 찬 평범한 단검에는 순백의 신성이 휘감겨 있었다.
오른손에 마기.
왼손에 신성.
도적E는 스킬 블랙박스가 없어서 상반된 두 힘을 혼용해서 다룰 순 없지만, 종족이 ‘카오스’라서 지금처럼 따로따로 활용은 가능했다.
보통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힘을 낭비하는 실력이 상당하군!”
고작 50레벨 오크 정찰대 잡는데, 지나치게 힘을 퍼붓는다.
나처럼 스킬 ‘무한’이라도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도적E는 평범한 원주민이었다.
히프리아 같은 관계자가 아니다.
“아직 거뜬하다!”
“오! 기세가 마음에 드는걸.”
지금부터 오크를 50만 마리쯤 사냥해야 한다. 다 잡을 때까지 지치지 않길 기원하겠다.
▶당혹: 강한수 생도님. 2회차보다 좀 많지 않나요?
교생 아가씨가 잘 봤어. 100배쯤 되지 않을까?
나는 잡것들이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맹독 숨결에 간단히 죽어버리지 않도록 단련시킬 예정이다.
그래서 대충 계산해봤더니….
잡것 셋이서 오크를 50만 마리쯤 잡으면 될 것 같다.
“와아! 용사님은 짐꾼이라고 무시하시지만, 창술이 예사롭지 않으시네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라누벨 양이야말로 고고학자답지 않게 마법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아! 물론, 일리나 님의 날렵한 쌍검술도 대단했습니다.”
“흥! 입바른 소리는 됐다. 뭐…. 너희도 제법이긴 했다.”
변변찮은 오크 정찰대 하나 쓰러트리고 우쭐대는 잡것들. 서로에게 금칠하는 모습들이 무척 꼴사나웠다.
나는 긴장을 놓으려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내일 저녁에 5대 재앙이랑 싸우니까, 부지런히 레벨이랑 스킬 숙련도를 올려놔.”
“...예?”
“네? 잘못 들었습니다?”
“뭐라고…?”
용사력 10일이면 고룡(古龍)쯤 사냥해줘야 정상 아닌가?
성공 가능성은 2회차 때 검증이 끝났다. 그리고 그때보다 형편이 훨씬 좋았다.
잡것이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으니까.
이 인원이면 마왕 페도나르도 쓰러트릴 수 있다.
▶난감: 강한수 생도님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동료는 손에 꼽을 정도일 거예요.
어허! 교생 아가씨.
S급 용사님이 시범을 보여줄게.
“따라와. 내가 레벨을 빨리 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나는 잡것들을 이끌고 오크 군락지로 접근했다. 수컷뿐인 오크 종족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점 중인 요정도 이곳에 살고 있다.
우리는 조잡한 나무 울타리를 넘어서 깊숙이 침투했다.
“CuCu.”
“VuVu.”
오크들은 근처를 휙휙 지나가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돼지코를 가진 오크 종족은 후각이 발달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후각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경비초소의 병사가 자신의 눈과 귀를 믿듯이, 오크는 침입자의 냄새를 맡지 못하면 경계가 풀어진다.
나는 그 허점을 이용했다.
바람의 정령들을 이용해서 우리의 냄새를 훨훨 위쪽으로 날려버렸다.
2회차 때처럼 오크의 피를 뒤집어쓸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족장의 통나무집까지 단 한 번도 안 들키고 접근할 수 있었다.
“HuHu…!”
“흑흑!”
통나무집 안에선 오크 신사와 요정 숙녀가 두 종족의 화합과 공존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쌀쌀한 밖이랑 달리, 내부 공기는 후끈후끈했다.
▷종족: 오크
▷레벨: 387
▷직업: 족장(통솔=부족↑)
▷스킬: 투기B 통솔C 격투D 내성D 체력E…
▷상태: 흥분
오크 족장의 능력치는 내 기억이랑 다르지 않았다. 그 거구 아래에 힘없이 누워있는 요정도 마찬가지였다.
“용사님! 당장 구해야…! 웁웁!”
“라누벨. 당장 닥치지 않으면 너랑 저 요정을 바꿔치기한다.”
“......”
우리는 조용히 오크 군락지를 빠져 나왔다.
나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내가 굳이 너희를 이끌고 안까지 다녀온 이유는…. 정찰 아니다. 짐꾼. 닥치고 들어. 레벨을 빠르게 올리려면 신속한 사냥이 필수이기 때문이야. 지금부터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오크가 요정을 죽이거나 해코지할 틈도 없이 빠르게 사냥을 끝내는 모습을.”
나는 광선검을 소환해서 오른손에 쥐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대지랑 수평을 이루도록 해야 해. 그리고 요령을 덧붙이자면, 오크의 심장을 노리지 않고 허리 높이. 굳이 심장이나 목을 노리지 않아도 돼. 허리가 잘려도 오크는 죽거든~”
경험치를 광선검에 불어넣었다.
2765레벨→2665레벨
찬란한 녹색의 광채가 솟구쳤다.
나는 오크 군락지를 향해 수평으로 광선검을 휘둘렀다. 오크의 허리 높이로 반듯하게 긁었다.
2665레벨→2813레벨
나무 울타리부터 망루, 막사, 오크까지 예쁘게 베어졌다. 음란한 자세로 누워있던 요정 빼고는 싹 처리됐을 것이다.
투자한 레벨은 바로 복구됐다.
“용사님…?”
“허허, 허허허…!”
“이 무슨….”
그 과정을 지켜본 잡것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코미디언으로 데뷔해도 될 정도로 가관이었다.
나는 광선검의 소환을 해제하며 물었다.
“어때? 참 쉽지?”
대답은 없었다. 너무 쉬워서 질문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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