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9회차] 왕비의 호위기사
깔끔하게 정리된 오크 군락지로 갔다.
내게 경험치를 싹 빨린 오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뼛조각과 피 한 방울까지도 깔끔히.
보통은 시체가 한동안 남아야 했지만, 존재를 구성하는 경험치까지 완전히 흡수되면서 형태를 유지 못 한 것이다.
“NuNu~?!”
낮잠을 자거나 드러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크들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방금까지 옆에 있던 동족들이 싹 몰살당했다.
겁에 질린 놈들은 도망치기 급급했다.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족장의 통나무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무너진 통나무 아래에 깔린 요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정한 신사라면 어려울 때일수록 숙녀부터 챙겨야 했지만, 오크들에게 거기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요정 아가씨, 괜찮으세요?!”
“당장 구해드리겠습니다!”
“이 야만용사가 그럼 그렇지….”
잡것들이 무너진 통나무를 치웠다.
정숙한 여인답지 못한 자세로 벌러덩 누워있는 요정이 구출됐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위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촤아아아-
내 몸에 들러붙어 있던 물의 정령들이 그런 요정을 물로 씻겼다.
허공에 생성된 물이 지저분한 요정의 몸을 한 차례 뒤덮고는 빨래통에 넣듯 세탁물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엄청난 세척력!
요정이 호흡곤란을 일으킬 틈도 없이 빠르게 씻겼다.
화르륵-!
불의 정령이 통나무집을 태워서 오들오들 떠는 요정의 추위와 물기를 걷어냈다.
덤으로 잡것들도.
“어, 어째서 우리까지….”
함께 씻겨진 도적E가 대표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신속하게 짐꾼이 메고 온 커다란 짐가방 속에서 모포를 꺼내어 여전히 알몸인 요정의 몸에 둘러줬다.
흙먼지를 씻겨내도 모양새가 영 아니었다.
오크 같은 거친 신사들이랑 몸으로 대화하면 피부가 상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영양결핍도 문제 중 하나.
안 그래도 태생적으로 비실비실한 요정이 제대로 못 먹는 바람에 나뭇가지처럼 삐쩍 말랐다. 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요정이 눈빛으로 감사를 전했다.
▷종족: 엘프
▷레벨: 892
▷직업: 조련사(조련→경험치↑)
▷스킬: 사육S 조련A 교감B 채집C 정령D…
▷상태: 저주, 염좌, 피로, 골절, 혼란
엉망진창인 능력치 상태는 2회차랑 비슷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내게 장애가 못 됐다.
“히프리아.”
우리는 지금부터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를 만나러 갈 것이다. 비중 없는 요정을 돌보기 위해 마을로 돌아갈 시간이 없다.
성녀가 못 고치는 부상 따위는 없다.
치료비만 충분히 낸다면.
▷종족: 엘프
▷레벨: 872
▷직업: 조련사(조련→경험치↑)
▷스킬: 사육S 조련A 교감B 채집C 정령D…
▷상태: 경악
부러진 뼈부터 피부의 생채기까지 말끔히 치유됐다.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았음에도 피부에 살이 올랐다.
심장을 잃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성녀다. 피부에 보기 좋은 수준의 적당한 지방을 생성하는 건 일도 아니다.
태생적인 결핍은 해결하지 못하지만.
“고, 고맙습니다….”
요정 조련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고마우면 이야기 좀 해봐.”
“그전에 제대로 된 옷부터 입으면 안 될까요….”
새빨개진 얼굴로 부탁하는 요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질의응답 시간은 뒤로 미뤄졌다.
그녀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은 포기했다.
요정왕 마누라를 지키는 기사 겸 시녀였던 요정 조련사의 상등품 전투복을 오크 신사가 찢어버린 탓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도적E랑 체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만두왕국에서 ‘S급 용사님의 동료’인 도적E를 위해 준비해준 예비복장이 꽤 있었다.
한 방이라도 맞으면 끝장인 그녀의 날렵한 전투 스타일에 맞춰서 얇고 가볍게 제작됐다.
속옷도 예외는 아니었다.
“흠…. 속옷 취향이 참….”
“시끄럽다!”
모험 출발 전날에 라누벨이랑 시장에서 속옷을 샀었던 도적E가 대꾸했다. 그녀의 귀는 매우 새빨개져 있었다.
이건 끈 달린 깻잎 수준이었다.
그리고 보라색이었다.
“열성인자로 가득한 요정은 이래서 안 돼. 피해망상에 빠져서 칭찬해줘도 지랄이네.”
“그건…. 좋다는 뜻인가?”
도적E의 기다린 귀가 쫑긋했다.
나는 그녀의 하찮은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고 잡것들을 한 번씩 돌아보면서 지시했다.
“내 시범을 잘 봤겠지? 너희는 지금부터 레벨을 올리도록.”
최고령 용(龍)의 맹독에 죽기 싫다면.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잡것들의 성장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게 쉬웠다면 내 1회차가 그리 힘들지 않았을 테니까.
천부적인 재능 탓에 낙천적이고 게으른 ‘용사의 동료’들은 귀찮은 수련보다는 약자 앞에서 잘난 척하길 좋아했다.
진정한 강자를 만나면 비열한 협공으로 이긴 후에 “제법 강했으나 우리의 상대는 아니었어!” 같은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축배를 들고, 약자는 대화로 질질 끌며 실컷 농락하다가 쓰러트린다.
누가 악당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 새끼들의 머릿속엔 ‘노력’이란 개념이 없다.
“조련사 아가씨.”
“네, 용사님. 말씀하세요.”
300레벨도 안 되는 먼지 같은 잡것들에게는 오크 사냥을 지시해두고, 나와 요정 조련사만 남았다.
이미 오크 주둔지는 울창한 숲 일부로 변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속성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오크들에게 개간된 땅이 과거의 자연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자기 일을 마친 정령들은 내 몸에 다시 찰싹!
찰거머리가 따로 없다.
나는 땅의 정령이 만들어준 근사한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정면의 쓰러진 통나무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요정에게 질문했다.
“네 동료 중 하나인 궁수에게는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세한 부분은 도통 말을 안 해주더군. 그러니 네가 대신 상세하게 설명해봐.”
“고지식한 그 친구답군요….”
“너는 아니란 건가?”
“...예전이라면 그랬겠지만, 저는 이곳에서 견디기 힘든 절망과 굴욕을 맛보았습니다.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주신 은인께 진실을 감출 만큼 저는 뻔뻔하지 못합니다.”
아주 좋은 걸 배웠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직후에 구해줘야 협조적이란 것이다.
▶난감: 그건 좀….
교생 아가씨.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세상을 구할 용사님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판타지 원주민들 탓이다.
웃는 얼굴로 좋게 타이르면 “용사님.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면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같은 개소리를 지껄인다.
부탁이 하나면 그나마 양반이다. 일부 뻔뻔한 새끼들은 ‘연계 퀘스트’로 용사님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이 연놈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궁수 요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라는 내 요구에 “구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왕실이랑 관련된 정보라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대답을 회피했었다.
물론, 나는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회귀’로 미래를 아는 덕분이다. 이기적이고 우매한 원주민들이 협조해준 건 아니다.
“설명해봐.”
그런데 묘안이 있었다.
빨간색 19금 딱지로도 부족할 만한 극한의 상태에 빠져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면, 은인에게 매우 협조적으로 변한다.
메모해두자.
“네. 그러니까….”
요정왕 마누라는 인간들의 세계를 동경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처럼 짧은 생을 격렬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문화에 심취했다.
그래서 종종 인간들의 마을을 방문했다.
긴 귀는 감추지 않는다.
인간 나라에 사는 요정이라고 해서 무조건 노예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역으로 극소수다.
암시장에서 판매되는 노예의 대부분이 ‘인간’ 종족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노예의 기준에는 종족이 없다.
노예 낙인이 찍히면 누구든 노예인 것이다.
그날도 다른 날이랑 똑같았다.
수련은커녕 먹고 싸는 일조차 귀찮아하는 나태한 남편에게 질린 왕비는 인간들의 마을로 휴가를 떠났다.
일국의 왕비가 어찌 혼자 다니겠는가?
그녀 곁에는 엘브하임 왕국이 자랑하는 다섯 호위기사가 있었다.
땅의 기사(검사)
불의 기사(마법사)
바람의 기사(궁수)
물의 기사(치유사)
마음의 기사(조련사)
대대로 왕비의 호위를 맡는 이 호위기사들은 정령의 속성에 맞춰서 5가지 직업을 대표하는 ‘최강의 여성’으로 구성된다.
남성은 안 되는 이유?
서로 교대해가면서 24시간 호위하는 이들이 시녀 역할도 겸하기 때문이다.
“너는 마음의 기사겠군?”
“그렇습니다.”
“생존자가 더 있나?”
현재까지 내가 수집한 기사는 둘이었다.
바람, 마음.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용사의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까지 죽은 동료는 없었습니다.”
“그래…?”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의 영토가 대부분인 중앙대륙 곳곳을 누비던 요정 왕비는 어느 마을에서 입담이 좋은 인간 남성을 만나게 됐다.
그는 술집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다.
음유시인의 이야기는 악마랑 관련된 서사시가 주를 이뤘는데, 판타지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음담패설에도 악마가 섞여 있었다.
“과연….”
나는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이해가 됐다.
“그 음유시인은 왕비님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하지만 왕비님은 불쾌하시긴커녕 웃으면서 맞장구치셨지요….”
“이때 왕비란 사실을 들켰군?”
“네. 따지고 보면 왕비님도 잘못했습니다. 악마 중의 악마라는 마왕의 불기둥이 태양처럼 그리 대단하다면, 엘브하임 왕비의 말라버린 늪을 적셔보라고 술집에서 도발하셨거든요. 이것도 꽤 순화해서 표현한 겁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됐다.
악마숭배자였던 음유시인은 악마에게 “우리 마을에 요정왕국 왕비가 왔습니다.”라고 보고했고, 그 보고를 들은 상급 악마는 “그래? 이게 웬 떡이야?”라며 찾아왔다.
결과는 보다시피 악마의 완승.
호위기사들은 패배했고 왕비는 납치됐다.
“...그게 끝?”
그렇다면 상당히 실망스러울 것이다.
“왕비님께선 옛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희 왕국에서 척결대상으로 지정한 암흑상회의 단골손님이십니다. 명목은 노예로 팔리는 동족의 평화적인 구조입니다만, 노예 경매가 아닐 때도 방문하셔서 무언가를 찾으시는 듯했습니다.”
“무언가를?”
“네. 하지만 저는 조련사라서 제 친구를 돌보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왕비님께서 인간의 영토로 외유하시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던 땅의 기사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땅의 기사라면…. 검사?”
“네. 땅처럼 온몸이 단단한 동료죠.”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연결되는 모양이다.
악명 높은 연계 퀘스트!
마왕이랑 새로운 사랑을 쌓는 중인 요정 왕비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뒀다.
“마지막으로 본 장소는?”
“언제나 짝을 이루던 물의 기사랑 함께 동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악마는 생포한 왕비님의 간절한 부탁으로 우리를 죽이지 않았지만, 떠난 직후에 음유시인을 포함한 악마추종자들이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악마의 저주로 약해진 저희는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 궁수E에게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요정 조련사는 사족이 무척 길었지만, 잡것들이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기에 참아주기로 했다.
“이야기는 그걸로 끝?”
고맙다는 말로 끝이라면 무척 실망스러울 것이다.
다행히도 이 요정은 양심이 있었다.
“오크들에게 붙잡혀서 모든 걸 빼앗긴 저에게 남은 거라고는 정보와 이 몸뚱이뿐입니다. 용사님께서 원하신다면 오크들에게 더럽혀진 이 몸이라도 드릴 수 있지만, 그건 용사님께서 원치 않으시겠죠….”
그건 편견이다.
하지만 지금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가진 게 정보와 몸뿐이라면서 뭔가를 더 내놓을 것 같은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25년 경력의 용사님이 감이 어디 가겠는가?
내 예상대로였다.
“악마추종자들을 뿌리치고 도망치던 저는 용의 알을 주웠습니다. 제 친구가 몬스터들에게 당하면서 도중에 떨어트리고 말았지만, 그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용의 알이라고?
조련 스킬을 올릴 좋은 기회였다.
“너는 합격.”
“네?”
“마음에 든다는 뜻이야.”
은혜를 맨입으로 때우려는 누구랑 달랐다.
아무튼, 일정을 살짝 조정하기로 했다.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숨결에 이 일대는 조만간 녹아서 황폐해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 알부터 회수하기로 했다.
“어디에 있는데?”
“그러니까….”
조련사E의 설명을 들은 나는 머릿속으로 중앙대륙 지도를 시뮬레이션해봤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문제는,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둥지랑도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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