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9회차] 태권Z
석유처럼 시커먼 액체가 지상에 작열했다.
나는 조금 전에 천벌이 무섭지 않다고 호언장담했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맹독은 위생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세균을 뒤집어쓰는 기분이 드니까.
내 움직임은 신속했다.
의자 크기의 알을 걷어 차올려서 오른쪽 어깨에 짐짝처럼 짊어지고, 왼손으로는 조련사E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붙잡았다.
“캑캑?!”
목이 졸린 조련사E가 숙녀답지 못한 경박한 소리를 내면서 호흡곤란을 호소했지만, 맹독에 샤워하는 것보다는 낫잖은가?
그 상태로 나는 정의의 날개를 펄럭였다.
휘이잉-
바로 하늘로 수직 비상했다.
그 아래는 시커먼 맹독이 홍수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방금까지 아름다웠던 계곡이 검게 오염됐다. 동식물은 중독되어 시커멓게 변하다 못해 녹아내렸다.
“Chaooo…!”
5대 재앙의 수좌로 불리는 망룡왕 뇌비우스.
온몸에 빼곡한 비늘이 칠흑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용이 하늘을 지배하고 있었다.
몸집에 걸맞은 3쌍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폭풍이 몰아치고, 갈고리처럼 휜 손톱이 인상적인 양손은 성(城)의 망루도 움켜쥘 수 있을 만큼 크고 흉흉했다.
이것이 황혼에 접어든 고룡의 위상.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압도감!
용사 페스티벌 당시, 천사들에게 사육당했던 ‘망룡왕 주니어’하고는 체급부터 달랐다.
이걸 토벌한다고?
차라리 최상급 악마가 더 쉬울 것이다.
아! 페널티로 빌빌거리는 마왕님은 더욱 쉽고.
나의 친애하는 전우의 검은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노안이 와서 잘 안 보이는 두 눈을 찡그리며 불쾌감을 표시한다.
▷종족: 카오스 드래곤
▷레벨: 999+
▷직업: 패왕(정벌→패기↑)
▷스킬: 혼돈SS 파괴SS 망각SS 패기S 맹독S…
▷상태: 분노, 흥분, 황혼
회귀가 괜히 회귀겠는가?
벌써 15년이 흘렀음에도 능력치는 2회차랑 똑같았다.
초월영역 스킬 하나 없었다. 하지만 종족과 레벨은 그 전부를 무시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엄청나군.”
성장한 만큼 보인다고 했다.
2회차 때, 나는 망룡왕 뇌비우스를 쓰러트렸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건 이 친우가 세월 앞에 체력이 달려서 자멸한 것에 가까웠다.
심지어 제대로 죽이지도 못했다.
정령검 앤드미온의 칼날이 거의 박히지 않았다.
과장 살짝 보태면 ‘바늘에 찔린 타이밍에 수명이 다해서 죽었다.’라고 할 수 있다.
펄럭! 펄럭! 펄럭!
뇌비우스가 3쌍의 날개를 움직이며 돌격해왔다.
고층 아파트가 내게 달려드는 것 같다.
헌데,
“그놈의 노안은….”
망룡왕 뇌비우스는 똑바로 직진해서 날아오지 못하고 방향이 살짝 어긋나 있었다.
내게 정면으로 들이박을 줄 알았던 덤프트럭이 옆으로 스쳐 지나간다고 할까.
그래도 몸집이 워낙 커서 회피는 불가능했다.
해일을 어찌 피한단 말인가?
퍽!
시커먼 벽에 충돌한 나는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덩치가 비슷했다면 내가 압승했을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
내 근육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받아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결과다.
하지만 체급 차이는 어쩔 수 없다.
발달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힘은 근육의 단면적에 비례한다.
근육을 극한까지 발달시킨 나는 단면적 대비 효율이 매우 높다. 하지만 그 단면적이 100배 넘게 차이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건 이미 효율 문제가 아닌 압도적인 폭력!
▶감탄: 굉장하네요. 다른 5대 재앙이랑 능력치 자체는 비슷한데, 실질적인 전투력 차이가 엄청나네요.
당연하지. 교생 아가씨.
내가 괜히 동료로 인정한 게 아니다.
“아이고….”
추락을 멈추고 허공에서 균형을 잡은 내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실, 이렇게 균형을 잡은 것도 대단한 것이다.
이 일대는 이미 망룡왕 뇌비우스의 비행으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존재 자체가 재앙.
그렇기에 5대 재앙인 것이다.
“야. 괜찮아?”
“......”
조련사E는 대답이 없었다.
실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축 늘어진 요정의 가느다란 팔다리가 덜렁거린다.
조금 전의 충돌로 목이 부러진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2813레벨→2833레벨
내가 죽인 것처럼 처리됐기 때문이다. 그녀의 경험치는 고스란히 내게 전달됐다.
하지만 성장 폭을 보고는 살짝 질려버렸다.
800레벨 요정의 경험치를 100% 먹고도 고작 20레벨 오른다니? 정상적인 사냥으로는 올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사냥감 부족으로.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283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정령MAX 축복MAX 조련SS 영감SS 체력SS···
▷상태: 성검, 성녀, 마검
스킬 등급으로는 내가 뇌비우스보다 우위에 있는 건 틀림없었다. 문제는 스킬의 구성이 비실비실한 요정이랑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근력과 맷집 같은 스킬은 평균 S등급.
그 이상은 잘 오르질 않았다.
“이것들 챙겨서 뒤로 빠져 있어.”
“네, 주인님.”
나는 용의 알과 죽은 조련사E를 성녀H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큰 포물선을 그리며 선회하는 전우를 돌아봤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이 날아다니는 듯했다.
“좋은 기회야.”
틈틈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판타지 능력치를 완전히 잃을 날이 언젠가 찾아오리라. 그리고 이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 판타지 스킬을 남발하는 ‘판타지 신의 노예’들이랑 싸우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이길 수 있을까?
블랙박스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마음 편히 사용했었다.
하지만 ‘시험의 동굴’에서 여사제는 이 힘을 ‘최초의 용사가 개발한 힘’이라고 했다. 늙은 왕자도 같은 말을 했다.
여기까진 솔직히 걱정하지 않았다.
개발했다고 해서, 본인이 특허 낸 건 아니잖은가?
하지만 그 생각이 최근에 바뀌었다.
혼돈의 유물에 기록된 과거의 영상에서 최초의 용사는, 마누라에게 선물했던 브로치에 담은 자신의 힘을 조정했었다.
유감스러운 요정왕의 후손 전용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Chaooooo-!”
“쯧. 느긋하게 생각할 틈을 안 주는군.”
블랙박스도 온전히 내 힘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최초의 용사가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있다.
그런 불안한 힘에 내 인생을 걸 순 없다.
내가 믿을 거라고는 ‘자신(自身)’뿐.
지금이 테스트해볼 좋은 기회였다.
5대 재앙을 상대로 어느 정도 먹히는지 알아봐야 한다.
▶종족: 네츄럴 휴먼
▷레벨: 283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S 통역A
▷상태: 마검, 성녀
최초의 용사가 제작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성검 뉴클리온과 스킬은 싹 다 블랙박스에 넣어서 봉인했다.
단숨에 몸이 나른해졌다.
“그러면 다시….”
퍼억-!
망룡왕 뇌비우스랑 충돌한 나는 또 빙글빙글 돌면서 추락했다. 방어계통 스킬들도 봉인한 탓에 피해가 더욱 컸다.
갈비뼈도 몇 군데 나갔다.
실험 종료.
만용을 부려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예 싸움이 되질 않는군요!
“Chaooo…?”
칠흑색 벽 같은 몸으로 가차 없이 나를 치고 지나간 줄도 모르는 노안의 고룡은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
내가 너무 작아서 못 찾는 듯했다.
“아하! 시력이 나빠서 기운을 추적하던 거였군. 하지만….”
빼꼼! 빼꼼! 빼꼼! 빼꼼! 빼꼼!
내 몸에는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기운의 정령들이 골고루 달라붙어 있었다.
그 기운이 미약하지도 않았다.
“Chaooo!”
예상대로 망룡왕 뇌비우스가 나를 발견했다.
이젠 눈으로 보지 않았다.
스스로 시력이 나쁘다는 걸 알기에 깔끔히 포기하고, 오랜 연륜과 예민한 감각으로 기운을 읽었다.
그리고 아가리를 정조준.
“오! 맙소사!”
나는 서둘러서 마검에 경험치를 불어넣었다.
콰과광!
검은색과 녹색 기운이 하늘에서 충돌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승자는 너무나 뚜렷했다.
“Chaooo-!”
“저 맹독의 항체가 없었으면 죽었겠는걸….”
2회차 때, 나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맹독 숨결로부터 살아남고자 필사적으로 항체(抗體)를 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골수에서 대량으로 생성된 백혈구가 식균 작용으로 항원(抗原)인 맹독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너덜너덜해졌다.
망룡왕의 맹독은 간단히 견뎌냈지만, 숨결을 원거리로 토해낼 정도의 순수한 물리력에 얻어맞은 피해가 적지 않았던 탓이다.
수압(水壓)이 센 물대포에 맞은 느낌이랄까.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찢어진 옷 사이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정령들이 “도와줄까?”라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됐어. 끼어들지 마.”
아까부터 압도적인 체급 차이로 계속 밀리고 있지만, 내 몸도 평범하진 않았다.
스르륵, 우득, 뿌득….
부러진 뼈가 도로 붙고 파열되어 늘어진 힘줄이 팽팽해졌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퍽! 푸욱-
나도 이번에는 학습했다.
재차 돌격해오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몸이랑 충돌하면서도 한순간 정신을 놓지 않고 날개를 기민하게 움직였다.
암벽등반의 하켄(piton)을 바위 틈새에 박아 넣듯이, 날개 첨단의 낚싯바늘처럼 생긴 골격을 비늘에 꽂았다.
그리하여 떨어지지 않고 매달렸다.
“Chaooo?!”
눈치챈 망룡왕이 나를 떼어내고자 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나도 그 정도는 예상했다.
비늘 깊숙이 박혀서 안 빠지는 날개 첨단의 뼈마디만 포기하고, 새 골격을 생성한 후에 다시 망룡왕의 비늘에 박는 식으로 장소를 빠르게 옮겼다.
원리는 암반등반이랑 똑같았다.
어느 영화의 ‘거미 인간’이 된 기분인걸?
나는 용의 팔이 닿지 않는 날갯죽지에 도달했다.
우선은 이 미친 비행속도부터 봉인시키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마검에 재차 경험치를 불어넣었다.
예쁘게 베어줄게!
부웅-
내 회심의 일격은 허공만을 갈랐다.
원인은 간단했다.
폴리모프(Polymorph)
구미호가 사람으로 둔갑하듯이, 일정 능력을 갖춘 용(龍)은 다른 종족으로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치매 걸린 것처럼 어린 인간 흉내를 내는 유치한 용들이 많지만, 망룡왕 뇌비우스는 나잇값을 제대로 했다.
매우 진지하게.
“이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군.”
중후한 인간 남성의 목소리.
하지만 순수한 인간의 형태는 아니었다.
피부는 옅은 회색이었고, 검은색 눈동자는 파충류처럼 동공이 위아래로 찢어져 있었다. 이마 정중앙에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칠흑색 뿔이 돋아 있었다.
분명히 알몸이었지만, 중요 부위를 포함해서 비늘로 부분부분 덮여 있어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등에 달린 3쌍의 날개가 황제의 망토처럼 늘어져 있었으며, 손과 발은 육식공룡처럼 생겼다.
“설마, 뇌비우스…?”
맹독에 녹아내린 지상에 착지한 나는 반신반의하며 질문했다.
“그렇다. 혼돈의 용사여.”
형태를 바꾼 뇌비우스가 긍정했다.
내가 고개 쳐들고 올려다 봐야 할 만큼 기골이 장대하고 허리는 꼿꼿이 펴져 있었지만, 이마의 깊은 주름은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의 무게를 알려주는 듯했다.
그렇다고 늙었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온몸의 폭력적인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고, 허리까지 기른 턱수염은 새까맸다.
하지만 내가 반신반의한 이유는 달리 있었다.
바로 능력치.
▷종족: 카오스 드래고니안
▷레벨: 999+
▷직업: 패왕(정벌→패기↑)
▷스킬: 태권Z 검술SSS 혼돈SS 파괴SS 망각SS…
▷상태: 냉정, 황혼, 변신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꾸면 거기에 걸맞은 스킬이 추가되거나 봉인되는 건 당연하지만, 이건 전혀 상정하지 못했다.
“태권이 Z등급…? 농담이 심한데….”
태생적으로 숏다리인 용(龍)의 발차기 경지가 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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