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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123화 (123/430)

 123화

[9회차] 제대로 키워줄게!

살짝 충격받긴 했다.

호위 5인방 중 하나이며, 상급 악마에게 패배해서 저주받았다는 것까지. 내가

궁금한 건, 왕비가 무슨 목적으로 인간들 나라를 돌아다녔냐는 거야.”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할 말은 있다.

죽을 때까지 감추다니?

위기에 빠지면 자존심 버리고 남의 손이라도 빌려서 구질구질하게 살아남으려는 게 상식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적어도, 나의 친애하는 전우는 그렇지 않았다.

패배할지라도 판타지 신이나 최초의 용사 하수인은 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했다.

“패배도 아닌가…?”

망룡왕 뇌비우스는 끝까지 블랙박스의 봉인을 풀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위기에 빠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사용했다.

친구는 목숨 대신 자존심을 챙겼고, 나는 그 반대. 하지만 자존심을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걸어둔 생명보험을 사용했다는 느낌?

하지만 맹독이 되어 대지로 녹아내리는 친우의 시신을 보면서 자존심이 상해버렸다.

내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자존심은 살아서 다시 챙기면 그만이니까.

나의 굴욕적인 장면을 목격한 자들을 전부 죽여서, 불명예를 ‘없었던 일’로 해버리면 그만이다.

▶당황: 저도 목격자인가요?!

당황하지 마. 교생 아가씨. 우리는 비밀 친구잖아?

공유하는 비밀이 하나 더 늘어난 것뿐이다.

찜찜한 승리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였다.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

망룡왕 뇌비우스가 남긴 마지막 말처럼 ‘때가 된’ 자연사나 다름없었지만, 그가 남긴 경험치는 내게 몽땅 흡수됐다.

2833레벨→1506레벨→3795레벨

싸우면서 소모한 경험치 이상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간담이 서늘해진 것도 사실이다.

경험치를 투자하고도 패배한다면?

아직은 그런 끔찍한 전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런 날이 영원히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대비책도 필요해 보였다.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25년 경력의 판타지 용사에게 휴식은 사치란 걸까?

판타지 능력치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품자마자 해야 할 일들이 죽순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내 기반을 새롭게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판타지 신의 노예가 되리라.

아주 간단한 이치다.

갑자기 판타지 능력치가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용사의 우수한 능력치를 사랑했던 연인들이 곁을 떠날 것이고, 동료와 부하들도 약해진 용사를 외면할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용사에게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경쟁자와 적대세력이 좋다고 달려들지 않을까.

폭력, 강간, 고문, 거세, 굴욕, 수치, 강탈, 착취….

그들이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복할 리 없다.

이때, 판타지 신이 제안하는 것이다.

능력치를 돌려줄 테니, 내 노예가 되지 않을래?

▶난감: 충분히 가능한 전개이긴 한데요. 제가 그분을 직접 뵙고 면접을 본 게 아니라서 뭐라고 단정해서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정의로운 용사를 키우시는 분이 그렇게까지 할까? 라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강한수 생도님께 제 주관을 강요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지금처럼 대비할 것이다.

판타지 신이 능력치를 빼앗고 노예가 되길 제안했을 때, 호쾌하게 거절하고도 무사할 수 있도록.

이것도 나만의 복수다.

꼭 신(神)이 아니더라도, 대기업 CEO나 정치인, 톱스타처럼 대단한 사람들은 뭐든 자기 뜻대로 된다고 착각하니까.

그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굉장히 불편해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돌이켜보니, 어느새 나도 꽤 오만해져 있었다.

너무나 힘겨웠던 1회차를 제외하면, 내가 무력이든 권력이든 약자였던 적은 손을 꼽을 정도로 없었다.

그래서 착각했던 모양이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내 뜻대로 될 거라고.

실제로 8회차에선, 나는 귀여운 아기의 몸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북대륙에 막강한 대제국을 세웠다.

오만해져도 어쩔 수 없었다.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내 지시로 용의 알을 챙긴 성녀H가 3쌍의 천사 날개를 접고 우아하게 착지하며 질문했다.

그녀는 요령 좋게 커다란 알을 오른쪽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조련사E의 가느다란 발목을 쥐고 있었다.

“기껏 구해낸 요정 몰골이 참….”

교수대(絞首臺)의 형구에 모가지 대신 한쪽 발목이 걸린 여인이 거꾸로 매달려있다고 생각해보라. 두 다리는 쫙 벌어져 있고 혀가 튀어나온 입술 사이로 침이 줄줄 흘러내린다.

...음란한 상상을 했다면 병원에 가보는 게 좋다.

“시체가 온전해도 경험치가 없어서 못 살렸습니다.”

성녀H가 부활시킬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흠. 내게 죽은 탓인가?”

사냥으로 얻어지는 경험치는 대단히 극소량이다.

예를 들어,

1레벨에서 2레벨로 오르기 위해선 경험치 100이 필요하고, 2레벨에서 3레벨이 되려면 경험치 200이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자.

판타지 능력치의 법칙으로는, 충분한 경험치를 흡수한 대상은 레벨이 오른다.

즉, 2레벨의 몸에는 경험치 100에 해당하는 힘이 깃들어있고, 3레벨은 경험치 300을 보유한 셈이다.

여기서 문제.

이론상으로는 1레벨이 3레벨이 되려면 2레벨 셋을 사냥해서 경험치를 흡수하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훨씬 많은 숫자를 사냥해야 한다.

▶긍정: 맞아요. 경험치를 전부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시체에 남는 경험치는 약 90%.

자연으로 흩어지는 경험치는 약 8%

죽이고 빼앗는 경험치는 약 2%

여기서 변수로 적용되는 것이 용사의 특전.

용사는 자연으로 흩어지는 경험치까지 흡수해서 약 10%의 경험치를 획득한다. 특전의 설명처럼 5배의 효율을 발휘하는 셈.

하지만 나는?

시체에 경험치를 남기지 않고 100% 흡수한다.

“생물은 죽으면 모든 경험치를 상실해요. 그렇기에 시체는 1레벨로 취급되지만, 성녀는 직업특성으로 시체 주위에서 맴도는 경험치가 보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이라고 할까요? 그 영혼은 시체의 훼손이 심하거나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다가 끝내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그 영혼까지 빨아들여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효율이 발생한다.

“즉, 영혼이 안 남아서 부활시킬 수 없다는 거군?”

“정확하십니다.”

“영혼을 되돌려주는 건…. 안 되는 것 같네.”

나는 혀를 찼다.

실비아 때는 그래도 1레벨로 살아있어서 경험치를 돌려주는 게 가능했었는데, 영혼이 1%조차 남지 않으면 재구축이 힘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블랙박스를 활성화한 나는 마기를 조련사E의 시체에 주입했다. 일전에 난산으로 생을 마감한 유모를 부활시킬 때 썼던 방법이다.

마기도 일단은 힘.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벌떡!

마기로 육체를 회복한 조련사E가 자력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섰다.

눈을 뜬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우워어어어….”

“어라?”

문명의 언어가 아니라서 통역A로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짐승이라고 할까? 아니, 그 미만이었다.

왜냐하면….

▷종족: 언데드

▷레벨: 1

▷직업: 조련사(조련→경험치↑)

▷스킬: 사육S 조련A 교감B 채집C 정령D…

▷상태: 조종, 공허

애초에 생명체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데드(Undead).

죽지 않는다는 뜻이기에 언뜻 보면 불사신(不死身)처럼 들리지만, 좀비나 강시처럼 시체가 움직인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정상적인 생물이 아니다.

“히프리아. 영혼의 반응은?”

“음…. 요정의 육체에 남아있던 1레벨에 해당하는 미약한 힘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걸 그 요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 마기로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영혼이라고 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쩝. 실패로군.”

상대를 부활시킬 의향이 있다면 앞으로는 주의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죽이면 안 된다는 제약이 생겼다.

털썩.

마기를 회수하자마자 조련사E는 힘을 잃고 도로 쓰러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부스스….

죽은 몬스터처럼 시체가 자연으로 녹아들며 사라졌다.

“주인님. 이 알은 어떻게 할까요? 스킬 창고에 넣어두는 것도 괜찮다고 사료됩니다. 생명체를 창고에 보관하면 자폐증 비슷한 정신공황에 빠지긴 하지만, 이건 알이니 괜찮을 겁니다.”

“아니. 당장 깨볼 건데?”

내 창고는 보육시설이 아니다.

“그것도 좋고요.”

“용의 알껍데기는 기념품으로 보관해야지.”

나는 히쭉 웃으면서 마검을 소환한 후, 알을 반으로 쪼갰다. 알맹이가 죽지 않도록 꽤 섬세하게 작업했다.

그리고 개봉박두!

“Greeee….”

내 예상대로 연녹색 새끼용이 들어있었다.

너무 일찍 태어난 탓일까?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인 통통한 도마뱀은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종족: 그린 헤츨링

▷레벨: 358

▷직업: 마법사(나이→마력↑)

▷스킬: 마력B 은신D 생존F 체력F 내성F…

▷상태: 부화, 미숙, 불안

판타지 세계관 최강의 종족다웠다.

막 태어난 새끼용이 알렉스보다 레벨이 높았으니까.

정말로 둘이 붙는다면 스킬이 아직 변변찮은 용이 패하겠지만, 내가 잘 조련하면 머지않아서 알렉스를 잡아먹을 수 있는 훌륭한 마룡이 될 것이다.

▶당혹: 이 귀여운 용을 악당으로 키우신다고요?

교생 아가씨의 심미안이 의심스럽다.

좌로 봐도, 우로 봐도 징그러운 파충류인데 말이다.

도마뱀이든 로봇이든 일단은 크고 강해야 한다. 그래야만 멋져 보이기 때문이다.

도마뱀은 용(龍). 로봇은 슈퍼로봇.

내가 키우는 용이라면 무조건, 3년 이내에 망룡왕 뇌비우스의 새끼발가락 수준은 돼야 한다.

용은 양성 생명체다.

본인의 뜻에 따라 수컷도 될 수 있고, 암컷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성별은 용(龍)의 형태일 때는 논할 필요가 없다. 수컷처럼 근육질의 강인한 전투력을 확보하면서, 암컷처럼 총배설강으로 새끼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족 없이 혼자서 번식도 가능하다.

단, 피부의 색상과 속성은 유전법칙을 따른다.

“신기하네. 중앙대륙에 알을 낳을 만큼 성숙한 녹색 용이 있었나? 아니면 남대륙의 녹색 멍청이가 똥이랑 알을 구분 못 하고 싸지른 후에 떠난 건가….”

“Greee…?”

“...뭐, 족보는 아무렴 어때. 누가 키우느냐가 중요한 거지.”

딱 봐도 약해빠진 이 새끼용은 망룡왕의 뒤를 잇는 최강의 5대 재앙이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

▶조언: 신생아가 약한 건 당연한 거예요. 3살에 북대륙 황제가 돼서 후손까지 낳은 강한수 생도님이 이상한 거고요...

교생 아가씨. 잘 들어.

애완동물은 주인을 닮는 법이야.

25년 경력 용사님이 키우는 용이 평범하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걱정하지 마. 쑥떡아.”

“Gree? Gree?”

“나는 알렉스처럼 비인도적(非人道的)으로 가르치진 않아. 너는 인간이 아니니 상관없겠지만.”

너를 망룡왕 2세로 키워줄게!

*

“그나저나. 꽤 멀리까지 날아온 것 같네.”

날갯짓 몇 번만으로 음속을 가볍게 찢는,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몸에 매달린 채 체공(滯空)한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태생이 용사 페스티벌 대륙인 성녀H는 이곳의 지리를 전혀 모르기에 도움이 안 됐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내가 판타지아 대륙에서만 25년을 보냈다. 웬만한 토박이 애송이보다 더 오랫동안 이 땅에 살았다.

우울하게도….

이젠 고향별보다 판타지아 대륙이 더 친숙했다.

지구의 7개 대륙을 다 가본 적이 없는데, 판타지아 차원의 5개 대륙의 지형은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다.

머릿속에 3D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수준!

친애하는 망룡왕의 맹독 숨결에 지형이 좀 오염되면서 변형되긴 했지만, 중앙대륙에서 호수가 많은 지역은 그리 흔치 않다.

“Gree….”

“배고픈 모양이네. 잘 됐어.”

“Greee?”

이곳은 내게 안 좋은 추억으로 가득한 신성제국. 오라비를 죽이고 황제가 되려는 탐욕스러운 여자가 사는 나라였다.

보상과 경험치가 풍부한 던전이 꽤 많다.

하지만 그전에,

“쑥떡아. 황녀를 먹어보지 않을래?”

“Greee-?!”

“어허! 편식은 나쁜 거야.”

훌륭한 용(龍)이 되려면, 사람 맛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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