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9회차] 은색 여우
게임이나 만화에서 보면, 애완용으로 키우는 몬스터는 양손으로 껴안거나 머리 위에 얹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귀엽다.
하지만 내가 키우는 용은 그렇지 않았다.
“걸어봐.”
“Greeeee~?!”
덩치가 커서 안고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무겁다기보다는 정면의 시야를 가려서 거슬린다.
녹색 새끼용이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섰다.
하지만 바로 털썩.
독기(毒氣) 가득한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으며 주저앉았다.
성녀H가 조심스럽게 참언했다.
“주인님. 외람되오나, 이 용은 발육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약한 것 같아요. 제대로 움직이려면 익숙해질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입니다.”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귀족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마음씨 착한 오라비의 목숨을 노리는 사악한 황녀를 응징해서 신성제국 백성들을 구원해주고 싶었건만!
키우는 애완동물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 며칠만 참기로 했다.
성녀H가 새끼용 앞에 쭈그려 앉더니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리 온.”
“Gree? Greee!”
새끼용이 귀여운 척하며 성녀H의 부드러운 품에 안겼다.
하지만 모양새가 좋진 않았다.
가녀린 미녀가 병든 새끼코끼리를 번쩍 들었다고 할까?
나는 성녀H의 소환을 해제하지 않았다. 내가 저 못생긴 새끼용을 들고 다니긴 싫었으니까.
성녀H가 새끼용의 커다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러다가 물리면 어쩌려고….
“내 이름은 히프리아. 너는 쑥떡. 이해했니?”
“Gree!”
“후후. 쑥떡은 똑똑하네.”
“Greeee~”
노예와 애완동물은 금방 잘 어울렸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도시로 천천히 이동했다.
당장 황성으로 쳐들어가서 ‘황녀 시식회’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내 예상보다 새끼용이 무능해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사악한 기사단을 무찔렀는데 말이지!
▶질문: 동료들은 안 기다리실 건가요?
교생 아가씨. 웬 동료?
▶대답: 있잖아요. 오크 사냥을 보낸 세 사람.
아! 잡것들?
동료라고 말해서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교생 아가씨의 지적처럼 잡것들을 기다려줄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를 텐데?
▶추측: 강한수 생도님이 날아가는 방향을 확인했을 거예요.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의 덩치는 그야말로 산맥. 이 거대한 용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놓치기가 더욱 힘들다.
하물며 라누벨은 용사의 길잡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서 ‘25년 경력 용사님’ 다음으로 지형에 빠삭한 인물이 그녀였다.
라누벨이라면 내 위치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존재는 판타지아 대륙에 많다. 판타지 세계에는 수명이 엉터리 같은 존재와 종족이 수두룩하니까.
요정왕이나 악마 같은?
하지만 그것들은 돌아다니지 않고 한 장소나 대륙에 아주 오랫동안 머문다. 여행했더라도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서 지형정보가 틀리다.
반면에 내 정보는 따끈따끈한 최신지도!
13년 뒤의 중앙대륙과 북대륙 지형까지 생생하게 알고 있다.
“흠…. 고민되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짐꾼과 도적E는 내가 경매장에서 산 사유재산이다.
맹독밖에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그들을 기다려야 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바람의 정령아. 잡것들에게 내 위치를 알려줘.”
내 겨드랑이에 사는 바람의 정령이 호응했다.
하지만 직접 행동하진 않았다.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다른 바람의 정령에게 턱짓으로 명령했다.
휘이이잉~
세찬 바람이 불며, 정령 몇 마리가 내 이동 경로의 반대 방향으로 총알 택배처럼 떠났다.
이것으로 쓸모없는 우정도 과시했다.
판타지 신이 내 인성 점수로 딴죽 걸지 못하리라.
“다음은…. 평판과 업적이군.”
업적은 충분하다.
내 2회차 경험을 반추해보면, 망룡왕 뇌비우스를 지금처럼 빨리 토벌하면 업적 점수는 최소 S학점 확정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평판뿐.
우선은 가까운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 일대에 흩어져 있는 맹독을 ‘내 신성함’으로 정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아무도 내가 했다는 걸 모를 터.
참으로 짜증 나는 판타지 시스템이었다.
“선행을 남에게 보여주려고 한다니….”
지방선거 때만 노인정을 방문하는 정치인이랑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이건 위선(僞善)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험문제를 엉터리로 출제한 판타지 신이 그걸 원하니까.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규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 표를 주고 싶은 후보가 없어도 억지로 한 명을 골라야 하듯이.
내가 점점 바보가 돼가는 기분이다.
가장 가까운 도시로 향하던 중, 남성의 호소가 들렸다.
“도와주십시오! 독에 중독됐습니다!”
소수의 구조요청은 무시했다.
곤경에 빠진 한두 명에게 계속 발목 잡히면, 5개 대륙의 원주민들을 최대한 많이 구원하기 힘들어지니까.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에 욕심부리면 큰 것을 잃는다고 했다.
아무리 못해도, 마을이나 도시 규모로 몰살될 사건이 아니면 내가 나설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전히 포기하질 않았다.
주위에 도움받을 사람이 그리 없는 걸까?
“이분은 영주님의 무남독녀(無男獨女)이십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이 용사님께 맡겨달라구!”
이곳의 영주라면 ‘신성제국의 3대 공작’이다.
그는 신성제국을 지탱하는 귀족파의 우두머리로서, 공작의 딸은 훗날 황제에 오르는 황태자의 아내가 된다.
즉, 유력한 황비 후보.
역사가 틀어지지 않는다면 황비 확정이다.
1회차 때는, 황위를 노리다가 패배하고 도망친 황녀의 말에 현혹된 ‘용사의 동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소수의 압도적인 폭력 앞에 신성제국의 황궁은 점령당하고, 신임황제는 옥좌에서 숨을 거둔다.
황비는?
임신 중이었는데,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게 죄를 묻는 건 잔인하다는 동료들의 만류로 처형 대신 추방된다. 그러나 산길에서 마주친 산적들에게 살해당했다.
제국의 기사단보다 강한 산적 무리라니?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여깁니다!”
도움을 호소하던 남자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저 건방진 팔을 잘라버릴까, 고민하던 나는 남자의 뾰족한 귀를 보고는 혼잣말하듯 질문했다.
“너, 요정이네?”
“그렇습니다! 나중에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우선은 저희 아가씨부터 구해주십시오! 여기서 꽃을 꺾고 계시던 중, 갑작스럽게 출현한 망룡왕의 숨결에 중독되셨습니다!”
변변찮은 요정 수컷의 소개 따위는 나도 관심 없다.
능력치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종족: 엘프
▷레벨: 486
▷직업: 집사(저택→능력↑)
▷스킬: 관리A 호위B 서류C 통역D 매력D…
▷상태: 초조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일하는 요정이었다.
경매장에서 산 요정 노예를 성욕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귀족과 상인은 저급한 하류다.
생각 있는 귀족과 상인은 ‘요정의 장점’을 활용한다.
수천 년을 사는 긴 수명.
엔간한 대가문이 아니면 500년도 유지하기 힘든 게 현실이지만, 기나긴 세월을 버텨온 가문에는 공통점이 있다.
충성스러운 요정
귀족은 세대가 교체될 때마다 영지와 가문이 어수선해진다.
설상가상으로, 영지와 가문의 후계자가 어리숙하거나 게으르면 치명적인 암흑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옆에서 보필하는 요정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수백 년 동안 가문과 영지를 지켜본 요정은 훌륭한 스승이며, 무능한 영주를 대신할 수 있는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은 약하다.
인간이 아니라서 인간사회 귀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흠. 아가씨의 목숨이 매우 위험하군요.”
“으으….”
망룡왕의 독은 스치기만 해도 위험하다.
국경 변두리에 사는 하급귀족의 영애처럼 촌스러운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이 소녀는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독가스를 마신 호흡기는 완전히 녹아내린 상태였다.
아직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나는 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블랙박스를 활성화했다.
이 아가씨의 치료를 성녀H에게 시켜도 되지만, 내가 돋보이려면 직접 나서는 게 효과적이다.
바로 이렇게,
우우우웅-
신성한 빛이 미래의 황비 몸을 감쌌다.
곰팡이 핀 버터처럼 녹아내렸던 폐와 기도가 원상태로 회복되고, 파랗게 질렸던 피부도 살짝 불그스름한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치유사님.”
정신을 차린 아가씨가 내게 인사했다.
하지만 치유사라니?
정정해주려던 나는 현재 내 복장을 보고 이해했다.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에게 50콤보 이상 얻어맞으면서 기존의 전투복은 걸레짝이 됐다.
그래서 이전에 꿍쳐둔 ‘천사의 옷’을 입었다.
고급 천으로 치마처럼 하반신만 가린 복장으로, 등의 날개 때문에 등판을 훤히 드러내야 하는 천사의 고증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아무튼,
“저는 치유사가 아닌 용사입니다.”
내 선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제대로 된 신분을 알려줬다.
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하는지 살짝 자괴감마저 들었으나 어쩌겠는가?
허허! 평판의 노예로다!
변변찮은 원주민을 구해줬다면 별거 아닌 일로 그쳤겠지만, 눈앞의 앳된 여인은 신성제국에서 매우 특별했다.
귀족파 수장의 하나뿐인 딸.
평판은 기본이고, 보상 또한 확실할 것이다.
황태자의 짝으로 이어줄 여식을 살려줬는데, 고맙다는 한마디로 끝낼 만큼 공작은 야박한 인물이 아니다.
...아마도?
“방금, 용사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요정 집사가 끼어들었다.
“왜? 내가 용사란 증거라도 보여줘야 하나?”
“아닙니다. 은인께 어찌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용사님을 저희 영지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가씨를 구해주신 은혜를 당장 보답하는 게 도의상 옳으나, 현재는 보시다시피 준비된 게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명문가에서 오랫동안 일한 요정이란 걸까?
긴 수명만큼 게으르고, 좁은 어깨처럼 소심한 요정답지 않게 말을 매우 잘했다.
“저…. 용사님.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뭡니까, 아가씨.”
“저 녹색 새끼용은 용사님께서 키우시는 건가요?”
건강을 회복한 아가씨가 성녀H의 품에 안긴 쑥떡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보기 불편할 정도로 징그러우시다면 멀리 치워놓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너무 귀여워서….”
취향이 참 독특한 아가씨였다.
“Greee?”
“어머! 우는 소리도 참 귀엽네요! 그렇지 않나요?”
아가씨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요정 집사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는 가문의 후계자가 독가스에 중독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호위기사와 시녀들을 꾸짖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선 그의 표정은 다른 사람처럼 온화했다.
“네. 아가씨의 말씀대로입니다. 정말로 귀엽군요. 숲을 사랑하는 녹색 용종(龍種)이라서 더 그리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젠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제 고향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이 용이 성장하면 분명히 늠름한 숲의 수호자가 될 겁니다.”
요정 집사가 마지못해 맞장구쳤다.
사회생활 할 줄 아는구먼?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운 도시 정중앙에 우뚝 솟은 영주의 성으로 이동했다.
*
“제 여식을 구해주셔서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귀족파 수장으로서, 신성제국의 실질적인 이인자나 다름없는 공작이 체면 다 던지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야망이 성사되려면 딸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25년 경력이 담긴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기술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피붙이의 목숨을 물질적인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공작님?”
“그, 그렇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 하하….”
나의 논리정연한 설득에 탄복한 공작이 긍정했다.
“저는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양측에 유익한 사업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우매하여 용사님의 뜻을 전부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사업이라고 하시면?”
아주 좋은 질문이다.
“신성제국에 불필요한 은색 여우를 갖고 싶습니다.”
은빛 여우.
그것은 황족의 지위를 잃고 후작이 된 황녀의 가문 표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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