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9회차] 승전 파티
이후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우리의 목적이 일치한 덕분이다.
공작은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결단력 있는 남자이기에 귀족파의 수장이 될 수 있었고, 자신의 혈통을 다음 황제로 옹립시킨다는 야망도 성공한 게 아닐까.
“하지만 용사님.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우는 과감한 듯하면서도 조심성이 많지.”
“잘 아시는군요.”
“조금?”
이가 갈릴 만큼은 안다.
“신성제국 최고의 미녀로 유명한 그 음흉한 여우- 실례, 황녀님은 적이 많습니다. 용사님께서 그분을 얻고 싶으시다면 직접 찾아가는 편이 좋다고 사료됩니다.”
“그것도 한 방법이지.”
“마,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한 달 뒤에 제 딸의 생일이 있습니다. 그날 초대한다면 반드시 참석할 겁니다. 자신의 편을 만들고 싶은 황녀라면, 제국의 거의 모든 귀족이 참석하는 파티를 마다할 리 없습니다.”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남들이 모르는 정보가 있다.
“공작님.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망룡왕 뇌비우스를 토벌했다는 소문을 냈다.
허공에 뜬 채로 50콤보 이상 얻어맞기만 한 전투였기에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졸업하려면 명예 점수가 꼭 필요했다.
거짓말한 것도 아니다.
내가 쓰러트린 건 틀림없으니까.
토벌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2회차처럼 중앙대륙 절반을 맹독으로 오염시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상당한 피해를 남겼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재앙!
수백 년 동안 잠잠하던 ‘중앙대륙의 5대 재앙’의 등장에 긴장했던 사람들은 환호했다.
“용사님께서 망룡왕을?!”
“뭐? 용사는 언제 소환됐데?”
“나는 망룡왕을 봤어요!”
“허허! 참으로 놀랍군!”
우매한 판타지 원주민들이 나를 찬양했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용사님께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주진 않지만, 공짜 칭찬으로 기분을 띄워서 지갑을 열도록 유도할 줄은 알았다.
내가 여기에 예민한 이유?
1회차 때, 마을주민들의 이런 호객행위에 넘어간 동료들이 흥청망청 써서 재정이 파탄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다.
급기야 용사력 7년에는 ‘마을주민 일동은 용사 파티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라는 플래카드마저 등장했다.
그게 또 좋다고 함박웃음이 돼서 여행자금을….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다.
하지만 좋다.
마음에 안 들어도 지금은 상관없다.
나는 이 얍삽한 도시주민들에게 지갑을 절대 안 열 것이고, 내게는 부양해야 할 동료가 없다.
“Greee~♪”
잘 처먹는 용 1마리가 있을 뿐.
하지만 이쪽은 괜찮다.
성녀H가 안고 영지 내의 시장을 돌아다니면, 주민들이 “어머! 귀여워라!”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면서 먹이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굶주린 용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야 낫잖은가?
“그래. 쑥떡아. 얼른 커서 최강의 용이 되렴.”
“G, Greee….”
내 소문은 금세 도시를 넘어서서 신성제국 전역에 퍼졌다.
당연히 황녀의 귀에도 들어갔다.
“허허! 용사님의 말씀대로 정말 왔군요. 마치, 그분의 속옷 색깔까지 아시는 것 같습니다.”
공작이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불쾌한 발언을 했다.
숙녀의 속옷 색깔을 논하다니….
“비유가 품위 있는 귀족답지 않군, 공작.”
청순가련한 척하려고 하얀색으로 준비했을 것이다.
*
왕족과 귀족은 사람을 함부로 만날 수 없다.
그 광경을 본 주위에서 뚜렷한 근거도 없이 오해하기 때문이다.
힘 있는 군벌 귀족들이 만나면, 사교였다고 해도 역모를 꾸미려는 사모임으로 몰리기 십상.
젊은 귀족자제 남녀가 거리를 함께 걸어가면, 사귄다는 의혹은 기본이고, 벌써 하룻밤 불장난을 했을 거란 이야기가 나온다.
언제나 언행에 주의해야 하는 연예인, 정치인이랑 비슷하다.
이러한 현상은 신분이 높은 권력자일수록 심하다.
왕족과 귀족이 어딘가에 가면 “아이고!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라며 호들갑 떠는 이유가 괜한 게 아니다.
또한, 남성보다 여성이 곤란해지기 쉽다.
술 먹고 친구끼리 충동적으로 즐기다가 애가 생기면 결혼하는 서민들의 연애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귀족은 다르다.
정치적으로 걸리거나 명예가 훼손되면 갓난아기도 죽인다. 그리고 숙녀가 사내를 만나면 “혹시?”라고 의심받는다.
그래서 명분이 필요하다.
귀족들이 자주 파티를 여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서민들의 생각처럼 단순히 사치를 부리기 위함이 아니다.
“용사님. 파티장 분위기는 마음에 드십니까?”
“화려하지 않고 적당하네.”
“...용사님은 파티에 익숙하신 모양입니다. 이걸 화려하지 않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다니.”
“하하. 조금?”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한 공작은, 망룡왕 뇌비우스를 토벌한 용사님의 용맹을 기리는 승전파티를 열어줬다.
이렇게 판을 깔아주면, 엉덩이 무거운 줄 알았던 귀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르르 달려온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남의 눈치 보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기 싫어한다.
겸사겸사, 5대 재앙을 쓰러트린 용사님에게 눈도장도 찍고.
눈앞의 소녀도 그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용사님.”
유력한 황족이면서 묘령의 미혼녀.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힘든 모든 조건을 갖췄다.
노출은 없으나 자신 있는 몸매를 강조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치마 끝자락을 살포시 들며 인사했다.
불여우 같은 눈매가 참으로 매섭다.
미끄러진 손가락으로 이 여인의 두 눈을 찔러주고 싶지만, 승전파티장이라서 보는 시선이 많았다.
평판과 명성을 위해 충동을 꾹 참으며,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그리면서 회답했다.
“반갑습니다, 황녀님.”
신성제국 1황녀.
서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촌스러운 판타지아 여성 중에서 그나마 패션이 뭔지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재능 하나는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종족: 휴먼
▷레벨: 194
▷직업: 황녀(서열=주목↑)
▷스킬: 매력S 기품A 불로B 정치B 지력B···
▷상태: 설렘
능력치는 매우 준수했다.
전투력을 형편없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이랑 비교할 수 없는 우수한 스킬들을 다수 보유했다.
꼭 여성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스킬 정치가 B등급이면, 뒷배 하나 없는 빈손으로 당장 정치계에 입문해도 강한 설득력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다.
여기에 높은 매력과 기품.
정치 꽤 한다는 노련한 수컷들의 눈을 현혹해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들면, 회의장은 순식간에 그녀의 독무대로 전락한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어머!”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이년이 어디서 놀라는 척이야.
“그것이….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오해하실지도 모르지만, 용사님의 강렬한 눈빛을 보자마자 가슴이 막 두근거려서….”
황녀는 그리 대답하면서 부채로 자기 얼굴을 살포시 가렸다. 그러면서 부채 위로 두 눈만 빼꼼.
“처맞으려고 아주- 크흠! 나중에 황녀님께 제가 키우는 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녀석이 처맞는 걸 좋아하거든요. 아름다운 황녀님이랑 비교하면 참 누추하게 생겼지만, 귀엽게 봐주십시오.”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기본입니다.”
판타지 25년 경력 용사님께는 정말로 기본이다.
나는 지구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 같은 근육질 야만인이 아니다.
모든 국가의 예의범절을 꿰차고 있다.
신성제국도 예외가 아니며, 파티에 참석한 여성의 미모를 칭찬하는 것은 사교계에선 기본 중의 기본이다.
황녀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 터.
하지만 그녀는 내 칭찬에 몸을 비비 꼬면서 부끄러운 척했다.
▶의견: 강한수 생도님께 반한 게 아닐까요?
교생 아가씨. 로맨스 드라마와 소설은 적당히 봐.
황녀는 지금 연기하는 것이다.
1회차에서도 그랬다.
산적으로 위장한 신성제국의 기사들에게 쫓기던 그녀는 용사의 동료들에게 구원받았다.
그 뒤, 미인계와 칭찬으로 동료들의 호감을 얻어낸 빈털터리 황녀는 파티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때 뭐라고 한 줄 아는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라누벨이 귀엽다고 했다.
황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양심과 진실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독한 여자다.
“용사님. 망룡왕을 쓰러트린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황녀는 노골적으로 내 전투력을 물어왔다.
들려오는 소문처럼 ‘이용하기 좋은 말’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기대치보다 약하다면 바로 태도를 바꾸고 본성이 튀어나올 터.
나는 1초쯤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망룡왕을 토벌한 사실을 알린 이유는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신성제국 백성들에게 위험이 사라졌다고 알리고 싶었을 뿐.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하든 허풍처럼 들리지 않겠습니까? 결과가 말해줄 따름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년이 갑자기 왜 죄송하다는 거야?
“아니요. 용사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소녀가 천박한 요구를 해버렸습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아! 사죄의 뜻으로 파티 후에 따로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영광입니다.”
모두가 보고 듣는 파티장에서 숙녀가 동성이 아닌 이성에게 먼저 만남을 제안하는 ‘용감한 행동’은 평판에 악영향을 준다.
하지만 일단 제안이 들어오면, 그 숙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무조건 수락해야 한다.
예의를 아는 신사라면.
“황녀님이 용사님이랑?”
“오늘 처음 만났을 텐데….”
“음흉한 여우답게 빠르군.”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속닥거렸다.
이 또한 황녀의 노림수일 터.
그렇다면,
“하지만 황녀님. 용사의 시간은 비쌉니다. 제가 사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만큼 구원받는 백성의 숫자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충분한 보상을 각오하시길.”
나를 이용하고 싶다면 충분한 이용료를 내야 할 것이다.
“보상이라니….”
뺨을 사르르 붉히며 자기 왼쪽 가슴을 움켜쥔 황녀는, 나랑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무식한 줄 알았던 용사의 정치력에 놀아난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당혹: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쯧쯧. 교생 아가씨. 이번 기회에 보고 배워.
25년 경력 용사님이 무료로 정치의 정석을 가르쳐줄게!
*
나는 승전파티가 끝난 후에 다시 만난 황녀에게 상당한 지원금을 뜯어낼 수 있었다.
그게 너무나 분했던 걸까?
황녀는 적진(敵陣)이나 다름없는 공작의 영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인계로 어떻게든 나를 유혹하고 발악했다.
그 애쓰는 모습이 봐주기 안쓰러울 정도.
“귀찮게 하는군….”
공작의 영지를 떠난 박복(薄福)한 황녀는, 우연히 마차를 뚫을 만큼 강력한 낙석에 하필이면 머리를 맞고 죽을 운명이다.
그런데 도통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쑥떡아. 너만 믿는다.”
“Greeee…?”
주인의 참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녹색 새끼용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녀석이 황녀를 잡아먹으면 신성제국의 미래와 평화는 지켜지고, 내 명성에 흠집이 생길 걱정도 없다.
어린 애완동물이 실수로 사람을 물 수도 있잖는가?
제대로 된 훈련이 필요했다.
S급 용사님의 마검에 베인 알에서 태어난 날로부터 15일째.
뒤뚱뒤뚱.
쑥떡은 이제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됐다.
자빠지거나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꼬리를 밟거나 걷어차면서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것도 안 한 성녀H의 스킬 숙련도만 폭등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용사님. 동료라고 주장하는 무리가 찾아왔습니다.”
내일부터 사냥을 시켜보기로 계획을 짜고 있는데, 영지에 소속된 기사가 내게 이상한 소리를 했다.
동료?
“사기꾼들이야. 내게는 동료가 없어.”
“그렇습니까? 거참!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자 라누벨이 거짓말을 하다니. 별일도 다 있군요.”
“...잠깐.”
동료는 없지만, 잡것들을 부양 중이긴 했다.
“용사님! 라누벨이 한참 찾았어요!”
“영문도 모른 채 맹독에 녹아내릴 뻔했습니다.”
내 허락이 떨어진 후, 기사의 안내를 받아서 영주의 성으로 들어온 라누벨과 짐꾼이 한마디씩 했다.
그런 둘 뒤를 도적E가 조용히 따라왔다.
“용케도 살아있네.”
짐꾼은 몰라도 라누벨은 죽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긴커녕 이전보다 강해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종족: 휴먼
▷레벨: 349
▷직업: 학자(지식=마술↑)
▷스킬: 마술SS 마법S 매력A 불로B 요리B…
▷상태: 양호
어째서 라누벨은 나에게 살해됐음에도 1레벨도 떨어지지 않고 부활이 가능했던 걸까?
그녀는 조련사E랑 달랐다. 하지만 무엇이 다른지는 모르겠다.
수상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어머! 용사님이 아끼시는 동료분들이신가요?”
차가운 눈 속에서 먹이를 발견한 북극여우가 이러할까?
내가 쑥떡을 훌륭한 마룡으로 키워내는 모습을 염탐하던 황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선 친한 척했다.
나는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딱 잘라서 대답했다.
“아니.”
“다행이네요.”
“음?”
내 옆에서 한참 동안 떠든 황녀는 라누벨에게 귀엽다고 단 한 번도 칭찬하지 않고 떠났다.
황녀의 여우 같은 미모에 넋을 놨던 짐꾼은 ‘황녀’란 소개를 들은 이후부터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하고 완전히 굳어버렸다. 하루살이 용병에게 황족은 너무나 지고한 존재였으니까.
도적E는 그냥 말이 없었다.
가짜 가슴으로 선량한 용사를 기만한 사기꾼이긴 해도, 족보상으로는 요정 왕족이기에 황녀의 신분에 위축되지 않았다.
그런 도적E가 떠나가는 황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야만용사.”
“왜? 가짜 가슴으로 황녀를 이겼다는 자랑이면 하지 마.”
도적E에게 미모에서 살짝 밀린다고 착각한 황녀가 상당히 분한 표정을 지었었다.
“아니다! 나를 대체 어찌 보고…!”
“그게 아니면 뭔데?”
“혼돈의 유물을 찾았다.”
“이 영지에서?”
부정하듯 좌우로 고개를 저은 도적E가 떠나가는 황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인간 암컷의 치마 안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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