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9회차] 어떤 여인의 유품
치마 안쪽이라고?
1회차 때는 치마 안쪽에 흉기를 보관한 동료도 있었지만, 황녀는 전사가 아니었다.
레벨이 높은 덕분에 건강과 체력은 높으나, 좀도둑 하나 제대로 쓰러트리지 못하는 비전투원.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종류는 얼마 안 된다.
속옷, 성인용품A, 성인용품B, 성인용품C
“도둑E. 확인차 물어보는 거다만, 황녀의 치마 밑으로 보이는 양말과 구두는 아니지?”
“아니다.”
나는 도적E의 대답을 듣고 오늘 할 일을 결정했다. 안 그래도 지지부진한 스킬 ‘조련’의 숙련도에 따분하던 참이었으니까.
“너희에게 새로운 임무를 줄게.”
“뭔데요?”
잡것들의 대표로 라누벨이 질문했다.
나는 녹색 새끼용을 가리켰다.
“쑥떡을 최강의 용으로 키워내는 일이지! 이 녀석을 데리고 근처 던전이라도 다녀와. 위치를 모르면 내가 가르쳐줄게. 너희가 죽을 정도로 어려운 곳도 많이 알고 있어. 어때? 내 말에 발끈해서 막 도전하고 싶어지지 않아?”
“아뇨!”
나는 일전에 챙겨둔 신성제국 지도에 붉은색 점을 찍었다. 그리고 황궁에서부터 쭉쭉 그 점들을 기차선로처럼 이었다.
붉은색 점은 던전 위치.
점들을 이은 선은 찾아가는 순서다.
최적의 성장코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내 1회차 때는 이렇게 친절한 지침서가 없었다.
우연히 발견한 던전에 들어갔다가 너무 쉬워서 시간만 낭비한 적도 있고, 반대로 너무 어려워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컴퓨터게임이나 다름없다.
못 하면 사람이 아니다.
“질문 없으면 얼른 가.”
“Greee….”
하지만 쑥떡이 바로 안 가고 성녀H를 빤히 쳐다봤다. 우는 소리와 울먹이는 눈동자만 봐도 의미는 쉽게 예측됐다.
망룡왕 2세가 될 녀석이 어찌 이리도 한심할 수가!
“주인님. 제가 동행할까요? 혹시라도 쑥떡이 죽으면 부활시켜야 할 테니까요.”
“음…. 그것도 그렇네.”
성녀H의 말이 옳다.
보름 동안 부지런히 키운 새끼용이 죽어버리면 아깝잖은가?
“함께 다녀와.”
“네, 주인님. 들었지? 쑥떡아. 가자.”
“Greee~!”
나는 쑥떡의 성장을 도울 잡것들 파티에 성녀H를 합류시켰다. 이러면 스킬 ‘무한’이 해제되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서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스킬 봉인.
이러면 내가 약해지고 위험에 노출된다는 건 틀림없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판타지 능력치로부터 하나하나 독립해가는 것이다.
언젠가 완전히 독립할 날을 꿈꾸며.
“자! 그러면 나는….”
지체할 틈이 없었다.
나는 혼돈의 유물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져야만 이게 유물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황녀를 당장 만나야 했다.
색골처럼 황녀의 옷장을 뒤적거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녀가 다른 속옷으로 갈아입기 전에 접촉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황녀의 뒤를 쫓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건 쉽다.
사람이 사는 마을과 도시에는 뜸하긴 하지만, 정령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정령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대가를 요구하면 괘씸죄로 소멸시켜버릴 생각이었지만, 종족 자연인의 가호를 받는 내게 정령들은 호의적이었다.
돈을 가진 용사에게만 호의적인 마을주민들이랑 다르다.
땅의 정령이 말하길.
황녀는 자기 숙소로 향하는 중이라고 한다.
사실, 영지에서 일하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황녀의 패션은 눈에 띄기 때문이다.
“용사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황녀의 숙소 입구에는 예쁘장한 시녀가 대기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무척 약해 보이는 30대 여성이지만, 황녀가 어릴 적에 거둬들인 심복 겸 호위기사다.
▷종족: 휴먼
▷레벨: 296
▷직업: 시녀(주인→매력↑)
▷스킬: 색적A 검술B 내성C 체력C 잡역C…
▷상태: 대기
황녀에게 은혜를 입은 그녀의 충성심은 진짜다.
하지만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왜냐하면, 1회차에서 내가 황녀를 만났을 때는 이미 죽은 이후였기 때문이다. 이 시녀는 황녀를 탈출시키고 본인은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술에 취한 황녀에게 들은 이야기다.
“만나고 싶은데.”
“약속은 안 하셨지요?”
“음.”
“후후! 그럴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셨다면 황녀님께서 저를 막 보채셨을 테니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숙녀의 방에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딸랑.
살포시 웃은 시녀가 문 옆에 설치된 방울 달린 줄을 당겼다.
딸랑!
그러자 몇 초 후에 방울이 또 흔들렸다.
이번에는 그녀가 한 게 아니다. 줄이 연결된 방 안에서 황녀가 당긴 것이다.
허락을 받은 시녀가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몇 초 뒤.
문밖으로 고개만 내밀며 미안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용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황녀님께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부탁하십니다. 하지만 절대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옷을 갈아입는 건가?”
황녀의 속옷이 바뀌면 곤란하기에, 나는 예의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질문했다.
흠칫한 시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기다리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오래 안 지나서 출입할 수 있었다.
황족이 쓰기엔 변변찮지만, 검소한 귀족의 집무실 같은 분위기로 반듯하게 꾸며놓은 방이었다.
화분과 실내장식에서 여성스러움이 묻어났지만, 책상 위에 쌓인 문서와 만년필은 판타지아 대륙 여성의 방에 어울리지 않았다.
황녀는 책상 의자에 앉아있지 않았다.
책상 앞에 놓인 테이블용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을…?”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용사님.”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띤 황녀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복장부터 살폈다. 뭔가 준비할 게 있다고 했는데, 복장은 바뀌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점이라면 단 하나.
구석에 놓인 향로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나고 있었다.
악마의 꽃을 태울 때 나는 향기다.
누구든 복용하면 마기가 체내에 쌓이기에 비싸게 거래되지만, 돈 많은 귀족은 이처럼 태워서 다른 효과를 본다.
수월한 밤일을 위한 흥분제로.
간접흡연한 마기가 일시적으로 체력을 올려준다.
전쟁터에서 후계자를 잃은 노년의 왕족과 귀족이 늦은 후사(後嗣)를 보고자 힘을 쥐어짤 때 애용한다.
나도 몇 번 써봤기에 효과를 잘 안다.
3번이 10번으로 늘어나는 악마의 힘이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술이라면 저도 괜찮은 게 있습니다.”
이년에게 먹이긴 아깝지만, 내가 8회차 때 황제로 있으면서 꿍쳐둔 고급 과일주 한 병을 개봉하기로 했다.
스킬 창고에서 바로 소환했다.
“이것은…. 북대륙의 술이로군요.”
“아십니까?”
“네. 달콤한 맛에 현혹되어 독한 줄 모르고 마신 여인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 아기가 생긴다는…. 대단히 희귀한 독주(毒酒)입니다. 부끄럽게도 이름은 모릅니다만, 북대륙의 어느 왕자가 저에게 권했던 적이 있어서 술병의 디자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북대륙 어느 왕자 때문에 내 의도를 들켰다.
이 음흉한 여우랑 강한수 2세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기절할 때까지 술을 먹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속옷을 합법적으로(?) 벗길 수 있으니까.
들켰다고 물러서면 사내가 아니다.
나는 당당히 밀어붙였다.
“황녀님. 한잔하시겠습니까?”
“저는….”
*
그곳은 장례식장이었다.
판타지아 대륙의 신성한 분위기의 신전이 아닌, 현대 지구의 엄숙한 장례식장이랑 매우 흡사했다.
바로 그곳에,
어린애처럼 우는 최초의 용사가 있었다.
그는 뚜껑 열린 관에 눈을 감은 채 편안히 누워있는 여인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고 있었다.
무릎 꿇고 오열하는 최초의 용사 뒤편에는 미녀들이 ‘시간 아까워서 죽겠네!’라는 짜증 섞인 얼굴로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최초의 용사가 일어서면서 싹 사라졌다. 그리고 침울한 표정을 연기했다.
미녀 중 하나가 최초의 용사에게 말했다.
“여보.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당신 곁에는 제가 있잖아요.”
“저도요.”
“저도 잊지 마세요.”
다른 미녀들이 질세라 한마디씩 했다.
“...고마워.”
쥐어짜듯 대답한 최초의 용사는 다시 돌아서서 관을 봤다. 그리고 관 옆에서 뚜껑을 닫을 준비하는 여인에게 물었다.
“성녀의 힘으로도 살려낼 방법이 없어?”
“당신이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똑같아요. 죽은 동생의 영혼이 너무 미약해서 부활시킬 수 없어요. 고문으로 손상된 육체를 이 정도로 복원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에요.”
“고문! 대체 왜!? 내 아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화르르륵-!
분노를 담아서 포효한 최초의 용사 몸에서 보라색 기운이 지옥의 화롯불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그 기운을 느낄 수 없지만, 주변의 미녀들은 하나둘 견디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털썩, 털썩….
그렇게 다 쓰러질 때쯤에 최초의 용사가 힘을 거뒀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 혼자 있게 해줘.”
신색을 회복한 미녀들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최초의 용사에게서 등을 돌린 그녀들의 얼굴에는 ‘야호! 드디어 끝났네!’라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때,
“너 빼고. 쏘시아.”
최초의 용사는, 장례식장 구석에 있다가 맨 마지막으로 나가던 여인을 붙잡듯 불러세웠다.
쏘시아.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마왕의 딸이 맞았다. 6회차 때의 모습에서 약간의 오차도 없었다. 복장이 좀 더 촌스러운 것 빼고.
하지만 성검마저 튕겨냈던 그녀의 비겁한 가슴이 그 촌스러움마저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내가 괜히 비겁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왜?”
굉장히 불편하다는 듯이 쏘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아내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 아내가 하나 줄어들어서 그 빈자리에 나를 앉히려고? 꿈 깨. 영원히 고자가 되는 저주를 받기 싫다면.”
“...쏘시아.”
“야. 궁상떨며 시간 끌지 말고 본론만 말해.”
쏘시아의 표정이 좀 더 적나라해졌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체면을 따지는 다른 아내들이랑 달리, 내가 해달라는 코스프레를 대가 없이 다 해줬거든. 이 가터벨트도 그렇고.”
자기 손에 쥔 가터벨트를 본 최초의 용사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쏘시아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이딴 놈에게 패배한 아빠는 대체…. 음? 둘이 별 차이 없나? 바보야. 그걸 나에게 말하는 이유는?”
“정말로 살려낼 수 없어?”
“후후! 왜? 악마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
“그래.”
최초의 용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최강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던 최초의 마왕 페도나르를 처치한 정의로운 용사님이 할 소리는 아니네. 하지만 이래서 인간이 재미있는 거겠지. 가능성이 모든 종족을 통틀어서 가장 다양한….”
“방법만 말해.”
“칫! 마음에 안 드는 녀석. 너의 손에 쥐어져 있는 그 가터벨트. 네 아내의 유품이겠지?”
“맞아. 연애하던 시절부터 나를 위해 항상 착용하고 다녔지….”
애절한 얼굴로 답하는 용사에게, 악마는 짓궂게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전혀 없진 않아. 성녀는 영혼이 부족해서 부활시킬 수 없다고 했는데, 아끼던 물건에도 사용자의 영혼이 약간씩 깃들거든. 마기로 유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지. 이걸 인간들은, 마(魔)가 꼈다고 하던가? 실패하더라도 작별인사쯤은 나눌 수 있을 거야. 아내를 끔찍하게 고문해서 죽인 원수의 정체를 묻는다던가? 후후♪”
*
나는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볕 탓에 눈을 떴다.
바로 옆에는 태초로 돌아간 황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는 바른 자세가 아닌 엎드려서 누워있었다.
이유는 엉덩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아파서 이불을 덮지 못하고 훤히 내놨다.
“아아, 그랬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녹음된 비디오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술에 취한 황녀가 덥다면서 먼저 시비를 걸었고, 나는 마다하지 않고 그녀의 치마 안쪽을 공략했다.
이건 그 전리품.
내 왼손에는 황녀의 가터벨트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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