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9회차] 어떤 왕비의 꿈
나는 유랑극단에서 물의 기사를 빼낼 수 있었다.
요정 남성 몸값을 치르면서 돈주머니가 조금 가벼워지긴 했지만, 도적E의 뽕에 속아서 날린 돈에 비하면 정말 푼돈이었다.
물의 기사.
그녀는 치유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요정이었다.
아픈 환자를 부드럽게 보듬어줄 수 없을 것 같은 외모랑 달리, 그녀의 능력치는 썩 나쁘지 않았다.
▷종족: 엘프
▷레벨: 999+
▷직업: 치유사(나이→치유↑)
▷스킬: 치유S 농사B 축복C 정령D 요리D···
▷상태: 저주
요정답게 스킬 구성이 잡스럽다.
평상시에는 농사짓다가 사건이 터지면 싸우는 이중생활. 그래서 대다수 요정은 스킬 숙련도가 한 분야로 특화되지 않고 어정쩡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요정 종족은 숫자가 적어서 한 사람이 맡아야 할 역할이 많으니까.
반면, 판타지아 대륙의 인간은 분업이 확실한 편이다.
용병이나 직업군인 같은 싸움꾼은 죽을 때까지 전투 스킬만 갈고 닦는다. 늙어서 은퇴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판타지 능력치가 올라가면서 저절로 젊음이 연장되고, 강인한 육체를 손에 넣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명의 한계는 여간해선 못 뛰어넘지만.
“안녕? 나는 정의로운 용사라고 해.”
“당신이 용사라고요…?”
“어째서 멀쩡한 사람을 무덤에서 튀어나온 언데드처럼 쳐다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용사라는 사실은 하늘과 땅이 증명하지. 아! 순진한 척하는 정령들도.”
내가 자기소개했음을 뒤늦게 눈치챈 걸까?
물의 기사도 서둘러 말했다.
“저는 엘브하임 왕국의 아름다운 왕비님이신….”
“다 알고 있으니깐, 짧게 말해.”
“안다고요?”
“네가 왕비의 호위 5인방 중 하나이며, 상급 악마에게 패배해서 저주받았다는 것까지. 내가 궁금한 건, 왕비가 무슨 목적으로 인간들 나라를 돌아다녔냐는 거야.”
마왕의 성에 쳐들어가서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이번 회차의 목표는 정상적인 졸업이다.
4회차 때, 과정 생략하고 마왕의 멱을 따서 실패했잖은가?
이론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활한 마왕 페도나르를 하루 만에 토벌함으로써, 그 어떤 용사보다도 빠르게 판타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나는 판타지 신의 불공정한 편파판정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그때의 실패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의문: 강한수 생도님. 요정 기사들을 모으는 작업.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요?
교생 아가씨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완벽주의자야.
▶깜짝: 정말로 몰랐어요!
나는 1회차 때 수많은 사건을 해결했다.
판타지아 대륙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큼직한 사건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런데 모르는 사건이 떡하니 출현했다.
내 판타지 경력 25년이다.
경험에 반추해보면, 희귀한 사건일수록 보상도 훌륭해진다.
초월적인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기획한 건지도 모르지만, 이 공식은 꽤 높은 적중률을 보인다.
이번 사건은 그중에서도 희소성이 가장 높았다.
막 소환된 용사가 시작부터 강하지 않으면, 암시장에서 바람의 기사(궁수E)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 다음도 마찬가지.
마음의 기사(조련사E)는 오크 족장이랑 화합의 장을 열고 있었다. 오크 군락지에서 이 요정을 빼돌리려면, 용사의 레벨이 높거나 야비한 우정의 힘으로 찍어눌러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제한이 있다.
즉, 매우 어려운 사건이다.
▶납득: 그렇기에 대단한 보상이 나올 거라고 보시는 거군요?
맞아. 교생 아가씨.
다섯 요정 기사를 모으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과정을 생략하면 결과가 어긋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꽤 신중하게 접근 중이다.
“치유사E. 네가 모시던 음란한 왕비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봐.”
“왕비님의 목적, 말씀이신가요?”
▶당혹: 이 요정. 모시는 분이 음란하다고 말해도 반론하질 않네요.
교생 아가씨. 조용.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거라구?
“그분은 인간 세계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특히, 다른 세계에서 소환된 인간 용사에게. 그들이 소환될 때마다 판타지아 대륙 인간들의 문화가 변화하고 발전했기 때문이죠.”
“호오…?”
“제 동료들은 못 보셨나요?”
“봤지.”
“정말인가요?!”
치유사E가 눈물을 글썽이며 안달했다. 인간들에게 붙잡힌 이후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나는 도시의 여관에서 방을 잡으며 답했다.
“그래. 마음의 기사와 바람의 기사를 만났지. 무사하냐고 물어볼 생각이었지? 궁수는 무사히 왕국으로 돌아갔는데, 조련사는 내게 협조해서 망룡왕 뇌비우스를 토벌하던 중에 전사했어.”
참으로 안타까운 우연의 사고였다.
하필이면 목이 부러지다니?
“그랬군요…. 언니는 끝까지 용맹하게 싸웠나요?”
“그럼! 처음부터 굉장했지. 내가 조련사E를 발견했을 때, 오크들에게 포위된 그녀는 비무장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어. 그 열기에 나마저 동조할 뻔했다니까?”
LED 모니터를 보자마자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굳이 거기까지 이야기하진 않았다.
“엘브하임 왕국의 귀중한 별이 떨어졌네요…. 하지만 용사님을 도와서 5대 재앙에 맞서 싸웠다면, 엄격하면서도 상냥했던 언니도 만족했을 거예요. 엘브하임의 가호가 그분의 영혼을 축복해주길.”
“분명히 기뻐할 거야.”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정말인데.”
조련사E는 내 가슴 속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으니까. 치유사E가 두 손 모아 명복을 비는 걸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왕비가 소환된 용사들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네. 요정왕께서 탐탁지 않게 여기셔서 적극적으로 조사하진 못하셨지만, 왕비님은 기분전환이란 명목으로 인간 세계를 직접 돌아다니시면서 용사들의 정보를 모으셨어요.”
“과연….”
9회차에선 고인(故人)이 돼버렸지만, 나서스 왕자가 누구 때문에 그토록 훌륭하게 자랄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딸은 무능한 아빠를 닮았고, 아들은 유식한 엄마를 닮았다.
도시 여관방의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은 치유사E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요정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인간의 땅은 제한적이라서 성과는 그리 많지 않았어요.”
“대충 예상이 가.”
인간 세계에서 활동하는 모든 요정이 노예인 건 아니다. 난폭한 요정 용병도 있고, 인간이랑 결혼해서 동등한 시민권을 얻은 행복한 요정도 있다.
심지어 동족을 사고파는 요정 상인까지!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차별은 엄연히 존재하니까. 귀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핍박하고 해코지하는 인간들이 어딜 가나 있다.
특히, 암흑상회.
상품이 자기 발로 왔다면서 기꺼이 환영해줄 것이다.
치유사E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요정왕께서는 부정하시지만, 판타지아 대륙의 대다수 가공품은 역대 용사들의 지식입니다. 이 푹신한 침대의 스프링 기술도 최초의 용사가 3대 요정왕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게 정설이죠.”
“그래…?”
판타지 차원은 얼마나 야만적인 세계였던 걸까?
용사들의 문화사업은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치유사E의 이야기는 내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선배 용사들은 마왕 토벌보다 더 중요한 복지사업을 해냈다.
치유사E가 툭 던지듯 말했다.
“허무맹랑하게 들리시겠지만, 왕비님의 꿈은 용사들의 고향으로 여행하는 거예요. 그 방법을 오랫동안 찾아다니셨죠.”
“...음? 으으음?!”
내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나도 1회차 때, 왕비랑 비슷한 생각을 품은 판타지 원주민들을 제법 만났었다.
아름다운 지구를 견학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하지만 근성 없는 그들은 소망으로 그쳤다. 가는 방법을 열심히 찾지 않았다. 진즉에 포기했거나.
그런데 요정왕국의 음란한 왕비는 달랐던 모양이다.
“용사께서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그래.”
왕비가 얼마나 알아냈는지 궁금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땅의 기사나 불의 기사를 찾아보세요.”
“야! 혼날래?”
평평한 가슴이 부르틀 때까지 맞아볼래?
“그렇게 재촉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왕비님의 호위와 시중 역할만 맡았던 나머지 기사들이랑 달리, 저는 왕국 수도에서 치료소도 운영했었으니까요. 왕비님 곁에 없었던 시간이 은근히 길어요.”
“쓸모없는 요정이었군.”
“남자가 되라고 강요하던 그 끔찍한 극장에서 꺼내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조금만 배려해서 말씀해주실 수 없으세요…?”
“거짓말보다는 낫지.”
“우으….”
새침한 소녀처럼 토라진 치유사E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깃털이 든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박은 그녀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더니,
“새근새근….”
바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눕자마자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허! 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건방지게! 야!”
찰싹!
나는 치유사E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엄마얏?!”
소스라치게 놀라며 깬 치유사E가 정신없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원망 담긴 시선을 보냈다.
“다 큰 숙녀의 엉덩이를 함부로….”
뭐? 숙녀?
코웃음 친 나는 정의로운 용사로서 따끔히 훈계해줬다.
“씻고 자라. 이 더러운 야만인아.”
이것들은 배려해줘도 고마운 줄 모른다.
내가 나쁜 용사였다면, 이 요정의 뼈가 부러지든 말든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힘껏 걷어찼을 것이다.
엉덩이라서 그나마 안 다친 거다.
▶감탄: 그런 깊은 뜻이….
*
과정을 중요시한 이번 여정은 확실히 성과가 있었다.
마왕의 성에 쳐들어가서 왕비에게 직접 물어봤다면 정보를 얻지 못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왜냐?
용사는 ‘마왕의 적’이기 때문이다.
마왕이랑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왕비가 협조적일 리 없다.
내가 왕비에게 질문하면 엉뚱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중요한 정보는 빼놓고 이야기하든가.
정말로 그렇게 흘러갔다면, 나는 이 사건을 별거 아닌 거로 취급하지 않았을까?
“치유사E. 너는 앞으로 어쩔래?”
다음 날 아침.
나는 치유사E에게 동행 의지를 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싶지만, 저도 언니처럼 용사님의 여정을 도울 생각이에요. 겸사겸사 실종된 동료들을 수소문해보고요. 그보다 걱정이네요. 왕비님이 악마에게 납치된 사실을 안 왕족 분들의 상심이 얼마나 크실지….”
“너무 걱정하지 마.”
“말이야 쉽죠.”
“이 용사님이 보증한다구?”
용사님 가슴 속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나서스 왕자와 실비아 공주는 실종된 모친(母親) 걱정할 겨를이 없으니까.
그 유감스러운 요정왕이야 뭐….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쯧. 진심을 말해도 몰라주네.”
“죄송해요. 용사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제 마음이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아서요.”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지금보다 더 넓어지면 어떻게 살라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살래살래 저었다.
임신한 고양이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 난폭한 요정의 피해망상은 단시간에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 주제를 환기하기로 했다.
“불의 기사는 어디에 있지?”
조련사E와 궁수E는 모른다고 했었다. 여기서 치유사E마저 모른다고 하면, 동대륙으로 넘어가서 ‘땅의 기사’를 수소문하거나 마왕의 성으로 진격해야 한다.
“그녀는 요정왕국 최고의 마법사죠.”
“장소만 말해.”
“악마에게 패배한 불의 기사는 저희처럼 추종자들에게 쫓기지 않고 탈출용 스크롤을 사용했어요. 그 스크롤에는 모든 제약을 무시하고 특정 장소로 단숨에 이동시켜주는 공간이동 마법이 깃들어있죠. 원래는 왕비님께서 항상 소지하고 계시던 물건인데…. 저는 불의 기사가 동족을 배신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저기, 듣고 계세요?”
“그래. 계속 말해.”
사족이 길어서 짜증 나기 직전이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탈출지점은, 좌표를 설정한 불의 기사와 왕비님이 가장 신임하는 땅의 기사만 알고 있어요.”
“왕비는?”
“설명을 들었어도 까먹으셨을 확률이 높아요. 위기에 상당히 무지각한 분이시라….”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지구로 이동하는 방법.
보상으로 그게 주어진다면 대박이지만, 높은 확률로 “실마리는 찾았으나 방법은 찾지 못했다.” 같은 불확실한 정보가 보상으로 주어질 확률이 농후하다.
이걸 위해 바다 너머의 동대륙까지 건너가야 할까? 아니면 마왕의 성으로 쳐들어가서 왕비를 고문….
아! 방금 발언은 못 들은 거로 해줘. 교생 아가씨.
▶난감: 그리 말씀하셔도…. 채점은 제가 하지 않는걸요?
거기까지 고민하던 나는 여관방의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 나는 치유사E를 본 적이 없었네.”
내 1회차는 10년이나 된다.
그동안 판타지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유랑극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건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랑극단이란 것이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요정왕을 연기하는 치유사E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제 찾아갔던 유랑극단과 그 꽃중년도.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
“남자로 모자라서 이젠 없는 요정 취급인가요…?”
“그게 아니야. 이 피해망상증 요정아.”
촤르륵-
나는 여관방 창문과 커튼을 동시에 활짝 열면서 등의 날개도 함께 펼쳤다.
그리고 입가에 편안한 미소를 그리며, 도시의 하늘을 향해 말했다.
“어서 와. 나는 정의로운 용사라고 해.”
야만스러운 요정들마저 포용하는 S급 용사님의 따뜻한 시선에 화들짝 놀라는 요정 마법사.
화르륵!
손바닥 위에 소환한 수박 크기의 불덩이로 회신했다.
거참! 수줍음과 난폭함이 공존하는 낭자로군?
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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