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29화 (129/430)

 129화

[9회차] 꿈과 희망을 향해...!

하지만 우리 사이엔 극심한 실력 차이가 존재했다. 유명한 S급 용사님과 무명(無名)의 마법사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나설 것도 없었다.

불의 정령이 마법사의 불덩이를 공중에서 인위적으로 터트리고, 물의 정령이 2차 피해를 막고자 불을 껐다.

치이이….

검게 그을린 요정 마법사는 도망치고자 했다. 하지만 바람의 정령이 강풍으로 떨어트리고, 땅의 정령이 요정의 가느다란 팔다리를 땅에 묻어버렸다.

마무리는 마음의 정령.

마법사 요정의 정신을 휘저어놓았다.

“꺄아아아-?!”

찢어지는 절규를 터트린 요정은 마법을 쓰지 못했다.

나는 여관방 2층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친 채로 활공해서 요정 마법사 앞에 착지했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크읔! 내가 순순히 말할 줄….”

“절대 말하지 마.”

“엣…?”

“최근에 무료봉사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거든. 합법적인 정당방위는 흔한 기회가 아니지. 비열한 기습공격을 받은 정의로운 용사님은 대화로 좋게 해결하고 싶었지만, 사악한 요정이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우후후♪”

나는 요정의 입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움켜쥐었다.

“우읍?!”

“요정 아가씨. 나는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었어. 거부한 건 너야. 그건 확실히 하자고.”

“우으으읍-?!”

나는 마법사E를 데리고 여관방으로 돌아갔다.

*

친애하는 망룡왕 뇌비우스에게 얻어맞고, 쑥떡의 조련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황녀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까지 참아야 했다.

인고(忍苦)의 보름!

스스로 돌이켜봐도 참으로 대견했다.

하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누적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

그러나 지금은 개운했다.

힘들어하는 용사님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요정 마법사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이 요정은 심지어 소중한 정보랑 경험치도 아낌없이 퍼줬다. 이러면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잖은가?

그래서 내 가슴 속에 고이 묻어두기로 했다.

“충격적이네요….”

뒤따라오는 치유사E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충격적이지. 나도 10년이나 뼈 빠지게 일하고 동료들에게 배신당했을 때, 웃음밖에 안 나왔어.”

내 1회차는 몇 번을 돌이켜봐도 화가 치솟는다.

언제나 훼방만 놓으면서 위선적인 행동으로 더 큰 불행을 세상에 뿌리고 다녔던 동료들. 그 연놈들이 저지른 악행을 뒷수습하느라 정말 고생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가는 배신!

마왕을 쓰러트린 후에 나를 처리하기로 공모했다.

치유사E가 내 말을 정정하듯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이 용사란 게 충격적이라고요.”

“내가 왜?”

“그야…. 음…. 불의 기사처럼 나이를 밝힐 생각은 없지만, 저는 살면서 꽤 많은 용사를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용사는 정말 처음이에요.”

“그야 그렇겠지.”

소환되고 하루 만에 마왕을 토벌하는 S급 용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불의 기사는 우리의 추측대로 배신했었다.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는 동료들을 전부 처리한 후에 엘브하임 왕국으로 혼자 귀환할 생각이었다.

왕비는 악마에게 납치당했으니, 5대 기사들만 처리하면 진실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는 셈.

“그런데 용사님. 정말로 그곳에 갈 셈인가요?”

“당연하지.”

우리는 불의 기사가 가르쳐준 장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마탑의 공간이동 마법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이 세계에서 ‘판타지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란 직함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현지민의 조력을 기대할 수 없고, 원주민들은 용사를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두둑한 돈주머니가 함께하면 달라진다.

마을과 도시의 주민들은 친절해지고, 어여쁜 아가씨들의 미소와 말투 또한 묘하게 사근사근해진다.

타국으로 국경을 넘는 일도 마찬가지.

경비병에게 “수고하십니다. 이걸로 밤에 술이라도….”라고 하면서 약간의 수고비를 건네면, 성검을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내가 용사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Trooog~?!”

“Troooom~?!”

“Trooox~?!”

가는 길에 갈색 트롤들도 마주쳤다.

무척 배고프다는 얼굴을 한 채 득의양양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놈들은 내 미소를 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게 아닌가?

웃는 용사 기분 나쁘게!

▷종족: 우드 트롤

▷레벨: 247

▷직업: 도적(약자→행운↑)

▷스킬: 내성D 추적E 질주D 심장D 행운F

▷상태: 공포, 공복

능력치는 트롤의 평균 레벨인 150레벨보다 훨씬 높았다. 종족도 약간 더 우수했고, 스킬 등급도 트롤치고 준수했다.

그런 놈으로 3마리.

신출내기 파티쯤은 간단히 밟아버릴 수준이다.

하지만 뭐든 상대적이다.

“Trook…?”

“Troooob?!”

“Trooof…!”

이번에도 정령들이 알아서 해결했다.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를 차지한 다섯 정령이 고개만 까딱거리면서 명령하면, 주위에서 기웃거리던 힘없는 정령들이 군말 없이 일한다.

이런 정령들이 순수하다고?

판타지 원주민들의 사고방식은 역시 야만적이다.

아무튼,

우리의 목적지는 해상왕국이랑 인접한 성왕국(聖王國)이었다.

중앙대륙에서 가장 많은 영웅을 보유한 나라.

넓은 영토와 병력으로 중앙대륙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신성제국은 황제를 신격화한 반면, 성왕국은 판타지 신을 모시는 진짜 종교 국가다.

성녀A와 인어공주 아쿠아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이 맞나요?”

걸리적거리지 말라고 악마의 저주를 치료해준 후부터 고분고분해진 치유사E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내가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틀리면 어쩔 건데? 따질 거야?”

“그, 그건 아니지만요….”

치유사E의 입을 다물게 한 나도 짜증 나긴 마찬가지였다.

불의 기사가 가르쳐준 장소는 나도 예전에 가봤던 어느 숲의 던전이었던 까닭.

1회차 때, 성왕국에 방문한 나는 성녀A의 명령 같은 부탁을 받고 그곳을 공략했었다.

숨겨진 비밀통로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단순히 놓친 거면 그나마 낫다.

그곳에 평범한 보물상자가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라며 대충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로 이동하는 장치라….”

불의 기사가 말하길.

탈출용 스크롤로 이동하는 장소에는 ‘기계장치’가 있다고 한다.

판타지 세계에 무슨 기계냐고 할 수 있겠지만, 북대륙에선 이미 슈퍼로봇도 만든 전적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마도공학의 발생지인 남대륙의 난쟁이들은 판타지아 대륙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향수병에 빠진 선배 용사 중 누군가 차원이동 마법을 구현한 기계장치를 만들었을 가능성.

그 선배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얌전히 따라오던 치유사E가 침묵을 깨며 운을 뗐다.

“뭐가?”

“엘브하임 왕국은 대륙의 서쪽에 있어요. 그리고 성왕국은 동쪽이고요. 그 중간은 인간의 나라와 인어들이 사는 호수로 가로막혀서 통행이 매우 어려워요. 어째서 왕비님은 탈출 장소를 이런 곳으로 잡으신 걸까요? 그것도 하필 던전에….”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중에 마왕의 성에 찾아가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추측으로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방문하는 던전은, 성왕국에서 몬스터가 많기로 유명한 어느 숲의 정중앙에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얀 바위지만, 자세히 보면 산사태나 지진 등으로 신전(神殿)이 땅에 파묻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던전을 출입하는 방법은 2가지.

무식하게 땅을 파서 원래 입구로 들어가든가, 땅 위로 불쑥 드러난 시계탑을 이용해서 굴뚝 청소부처럼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치유사E. 정말로 여기에 와본 적 없어?”

“네. 처음이에요.”

수상하긴 했지만,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치유사E가 용사를 속여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와.”

1회차 때는 밧줄 같은 걸 매달아서 아래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지금은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로 벽을 찍어가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우아하게 이동했다.

“저는 어떻게 내려가라고요?”

시계탑 위에서 치유사E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

“네 문제를 왜 나에게 물어?”

“그야…. 저를 안고 내려가실 줄 알았죠.”

“우리가 딱딱한 가슴을 맞댈 만큼 친한 사이였던가?”

굳이 정의하자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일 텐데.

“죄송해요. 제가 괜한 착각을 했네요.”

“알면 됐어.”

치유사E는 내가 바닥에 착지한 이후에 밧줄 없이 시계탑에서 수직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피떡이 되진 않았다.

요정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으로 벽을 지그재그로 몇 번 밟으면서 내려왔다. 999레벨을 넘어선 신체이기에 가능한 묘기.

나는 태연자약한 치유사E를 보며 혀를 찼다.

그녀의 판단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 아니라, 무척 힘들게 밧줄을 타고 내려왔던 내 1회차가 떠오른 탓이다.

그때는 정말….

▶의견: 그만큼 강한수 생도님이 발전했다는 뜻이 아닐까요?

교생 아가씨도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네.

▶딴청: 저는 교생으로서 맡은 임무를 할 뿐이에요. 신께서 걸어둔 제약을 무시하고 지구로 이동할 수 있다는 그 기계장치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렇다고 해두자고. 히쭉.

나는 몸에 묻은 거미줄과 먼지를 가볍게 털었다.

그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다면 옷이 엉망이 돼야 했었지만, 도굴꾼과 모험가들이 이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몇 차례 들어왔었던 탓에 거미줄과 먼지가 많지 않았다.

선객이 자기들 옷으로 닦아놨으니까.

그 선객에는 성왕국이 자랑하는 영웅들도 포함된다.

“용사님. 어둡지 않으세요?”

“나는 상관없어.”

스킬 ‘시각’이나 ‘암살’의 효과 보조가 없어도 어둠 속에서도 잘 보였다.

이것도 종족 ‘네츄럴 휴먼’ 덕분이다.

자연의 가호를 받는 내게 이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시각정보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자연으로 채워져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하아…. 저만 상관있는 모양이네요. 불 좀 밝힐게요.”

치유사E는 불의 정령을 실체화했다.

머리카락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붉은색 소녀가 치유사E가 아닌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거참. 이놈의 인기란….”

“앗?! 정령 친화력이 떨어지다니…!”

내게 정령을 빼앗긴 치유사E가 충격과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해. 여긴 던전이라고.”

“죄, 죄송합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막힘없이 전진했다.

무심코 함정을 밟을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지만, 이 던전을 몸소 경험해본 적이 있었던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빌어먹을 라누벨.

실수가 아닌 고의로 함정을 밟는 그년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치유사E가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용사님께선 이곳에 와보신 적이 있으신 듯한데요. 걸음걸이에 갈등이나 망설임이 없으세요.”

“왔었지. 20년 전에. 아니, 22년 전인가?”

어디를 여행하긴 했는데 내가 몇 살 때 다녀왔었는지 헷갈리듯, 용사력 몇 년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던전의 구조는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 곧,

“Guoooo~”

“Guooo~”

목디스크로 고통받는 영혼처럼 으스스한 목소리가 어두컴컴한 복도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도깨비불처럼 녹색으로 타오르는 안광(眼光)!

1회차 때도 이 부근이었다.

던전의 함정에 빠져 죽은 얼간이들이 튀어나올 타이밍.

▷종족: 구울

▷레벨: 475

▷직업: 영웅(경험치 200%)

▷스킬: 냉정A 철벽A 금강B 투창B 포효B…

▷상태: 공복, 공허

레벨이 높든 낮든 미로에 빠져서 굶어 죽는 건 똑같다. 그리고 던전에서 죽은 모험가는 ‘물귀신’으로 변한다.

자기 같은 얼간이 동료를 늘리려는 몬스터로.

“흠…. 확실히 내가 일찍 오긴 했네.”

처음 보는 잘생긴 면상의 구울이었다.

레벨도 무려 475레벨! 1회차 때 마주쳤다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힘겨운 전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25년 경력 앞에선 부질없었다.

가볍게 썰어주고 계속 전진!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던전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보물상자가 있는 던전의 중심부로 향하게 되지만, 내 목적은 그딴 골동품이 아니다.

무언가로 감추지 않고 노골적으로 보이는 낭떠러지 함정. 밑바닥에는 강철 송곳이 가득했다.

이런 곳에 비밀통로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래서 던전은 재미있어.”

가파른 벽에 날개를 박으며 내려간 나는 히쭉 웃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낭떠러지 사각지대에, 불의 기사가 가르쳐준 입구가 정말로 있었다.

두근두근.

오랜만에 심장이 뛰었다.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25년 경력 용사님이 모르는 던전이라니?

여기에 꿈과 희망이 가득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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