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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130화 (130/430)

 130화

[9회차] 지구의 상태가...?

비밀통로 내부는 깔끔히 정리된 상태였다.

내가 오기 이전에 누군가 드나든 적이 있었다는 방증.

마법사E가 탈출용 스크롤을 이용해서 여기로 왔었다고 했으니, 최근에도 이 통로가 이용된 셈이다.

나는 그대로 안까지 쭉 들어갔다.

요령 좋게 치유사E가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집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까.

“...음? 없다고? 그런 건 빨리 말해라. 짜샤.”

던전에 사는 정령들이 이야기해줬다.

이 통로는 안전하다고.

그 뒤부터 나는 탐색하지 않고 빠르게 이동해서 통로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헤에~ 정말이네.”

마법사E와 치유사E가 말한 것처럼 기계장치가 있었다.

골렘을 보았을 때도, 마법으로 굴러가는 판타지 세계 같지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여기는 좀 더 심했다.

마법보다 과학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골렘은 동력원 같은 중요한 부분이 마법 덩어리라서 과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실 끊긴 인형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어도 인형이다. 하지만 이게 마법으로 움직이는 순간, 인조인간이란 이름이 붙는다.

눈앞의 기계장치는 그 반대였다.

그 형태를 굳이 표현하자면 캡슐이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는데, 포르말린으로 가득한 표본 시험관처럼 생긴 여기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이것은,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과학의 멋이로군.”

나의 얄팍한 고등학교 과학지식으로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쓰인 언어는 알았다.

“오랜만에 보는 구수한 모국어로군.”

설계도로 짐작되는 물건에 적힌 장문의 설명을 쭉 읽어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궁금: 뭐라고 쓰여있는데요?

아주 나쁜 질문이야, 교생 아가씨.

내가 그대로 읽어줄게.

“여기가 나를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정원이란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왕따에다가 공부도 못했던 내게 이건 너무나 힘든 과제였다. 그러던 차에 아름다운 악마를 만나게 됐다. 그녀의 이름은 쏘시아. 블랙홀처럼 빨려들 것 같은 가슴을 가진 마성의 여자였다.”

그 뒤로는 주절주절 잡다한 이야기가 한가득했다.

마왕의 딸 쏘시아를 찬양하는 내용을 한가득 채운 글쓴이는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한다.

덕분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내 가슴에 못을 박은 쏘시아는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기계장치를 만들 과학지식을 내게 전수해줬다. 고등학생 때는 힘들었지만, 판타지 능력치로 똑똑해진 지금의 나는 가능했다. 쏘시아가 알려준 대로 똑같이 만들었다.”

이 새끼. 남이 가르쳐준 설계도대로 만들어놓고선 자기가 똑똑하다고 말하는 건가?

진짜 내용은 그 뒤부터였다.

“나는 쏘시아에게 속았다. 아니, 그녀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지구로 돌아갔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잠깐뿐. 내 경험치를 응축해서 만든 아바타를 지구로 보내서 그 힘이 다할 때까지 원격조종 할 수 있었다. 절반의 성공. 내 몸과 영혼은 여전히 판타지아 대륙에 묶여있었다.”

“세상에…. 정말이었다니….”

내 말을 경청한 치유사E가 기계장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안 믿었던 모양이네.”

“네. 차원이동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아직 글쓴이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이젠 설계도보다는 일기에 가까웠다.

“차원이동의 대가가 너무나 끔찍했다. 한순간에 레벨과 스킬을 전부 잃은 탓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지구에 머물 수 있었지만, 고작 일주일 만에 내가 7년 동안 모은 힘을 소진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약해진 나는 이 비밀기지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글쓴이의 나머지 내용을 읽을 가치가 없었다.

배고프다는 내용이 전부였으니까.

“불쌍하네요.”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네.”

글쓴이가 얼마나 부지런히 용사로서 활약했는지 모르지만, 7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다 소모하고도 고작 7일.

가격대성능비가 너무 떨어졌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캡슐만 따지면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여기에 딸린 육면체 쇳덩어리 설비들이 만만치 않았다.

이걸 다 스킬 창고에 집어넣을 순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판타지아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경험치는 얼마든지 조달되지만, 스킬까지 소모된다면 간과할 수 없었다.

“계륵(鷄肋)이네.”

사용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초월영역 스킬까지 갈리면 내 혈압이 터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용사님. 이거 작동하긴 할까요?”

치유사E가 조심스럽게 캡슐을 만지며 물었다.

“궁금하면 써볼래?”

“아, 아니요!”

이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나는 기계장치를 미련 없이 포기했다. 그리고 이 기계장치 설계도를 글쓴이에게 넘긴 ‘쏘시아’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그 비겁한 악마라면, 경험치만 소모해서 아바타를 생성하는 방법도 알 것이다.

▶깜짝: 강한수 생도님. 써보시려고요?

경험치만 소모하게 개조할 수 있다면 사용할 의향이 있다. 나는 종족 자연인 덕분에 경험치를 모으기가 수월하니까.

이 기계장치는 경험치 효율이 최악이지만, 내가 사냥으로 얻는 경험치 효율은 최상이다.

최악과 최상이 만나면 평균이잖은가?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쏘시아를 찾으려면…. 북대륙인가.”

마음만 먹으면 먼 북대륙까지 갈 순 있지만, 굉장히 귀찮다. 그리고 거기에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쏘시아가 암흑상회 간부나 두목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지만, 암흑상회 분점을 찾아가서 만남을 요청해도 들어줄 리 만무하다.

암흑상회랑 지긋지긋하게 싸웠던 1회차 당시에는 ‘쏘시아’의 존재조차 몰랐으니까.

악마가 용사를 만나줄 리 없었다.

차라리 마왕의 성으로 쳐들어가서 깽판 치는 편이 낫다.

마왕 페도나르가 그녀의 친부이기 때문이다. 딸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지 않겠는가?

순순히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가자. 볼일 끝났다.”

“잠시만요! 이 글이 왕비님의 필체로 쓰여있어요.”

치유사E가 얄팍한 종이 쪼가리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문제의 기계장치에만 주목했지만, 여기에는 다른 잡다한 물건이 꽤 많았다.

굶어 죽었는지, 아니면 탈출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글쓴이가 여기서 생활했었기 때문이다. 그 생활용품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공간이동 마법진 하나.

저것이 탈출용 스크롤이랑 연동된 게 틀림없었다.

“뭐라고 쓰여있는데?”

“이건…. 유언장이에요. 혹시라도 이 기계장치를 발견한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파괴하지 말고 활용해달라는 내용이에요. 판타지아 대륙의 발전에 꼭 필요하다는 당부가 적혀 있어요. 아무래도…. 왕비님은 직접 사용해보셨던 것 같아요. 아주 잠깐뿐이긴 했지만.”

지구의 경험담이 쓰여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벽 곳곳에 유치원생 수준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실력이라서 무시했었는데, 미화(美化)해서 보니 지구의 도시 풍경이었다.

빌딩, 자동차, 신호등, 현수교, 지하철….

판타지 세계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운 마음이 강해졌다.

지구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

“미치겠군.”

1회차 때, 비위생적인 요강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힘주던 나날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했다.

지구의 수세식 변기가 그립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도 부모님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이 기계장치로 지구로 가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우선은 안전.

내가 캡슐로 들어간 사이에 공격받을 수 있다.

대가도 무시할 수 없다.

스킬이 싹 사라지면 곤란하다. 언젠가 스킬 없이 자립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당장은 내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

그 외에도 안전성과 후유증 등이 걱정됐다.

그래서,

“치유사E. 들어가.”

“네?!”

“극장에서 꺼내준 용사님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며? 설마, 말뿐이었던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아니지만….”

치유사E가 망설였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안다.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

“스킬은 어쩔 수 없지만, 경험치는 내가 책임지고 복구해줄게. 원한다면 정령도 잔뜩 붙여주지. 이 기회에 정령사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정말요?”

“나는 정의로운 용사야. 거짓말하지 않아.”

“으으…. 알겠습니다.”

망설이던 치유사E가 캡슐 뚜껑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닫자마자 자동으로 특수한 녹색 기체가 투명한 시험관 안으로 독가스처럼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요정이 불안으로 떨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호흡곤란으로 질식사하는 게 아닐까? 내 걱정을 비웃듯 치유사E는 제대로 호흡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

“가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찰하는 거야. 내가 하루쯤은 어떻게든 연장해줄 테니.”

“네, 용사님.”

사명감을 품은 올곧은 눈빛으로 대답한 치유사E의 눈동자가 얼마 안 가서 마약중독자처럼 풀렸다.

그리고 레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999레벨→756레벨→755레벨→754레벨

한 번에 대폭 떨어지고, 그 뒤부터는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1레벨 올리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나로선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이건 정말로 깨진 항아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753레벨→796레벨→831레벨→875레벨

깨진 항아리에 물을 열심히 부었다.

지구에 처음 가보는 요정이 허둥대면서 촌년 티를 얼마나 많이 낼지는 굳이 상상해볼 것도 없다.

그렇기에 못해도 하루는 유지해줘야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끔찍하긴 하네.”

글쓴이의 설명을 읽으면서 아니길 조금이나마 기대했었는데, 사용하기 전에 설명서를 읽어보길 잘했다.

▷종족: 엘프

▷레벨: 638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

▷상태: 환각

치유사E의 스킬이 깔끔해졌다. 인정머리 없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녀의 레벨도 내가 끊임없이 경험치를 보급해주지 않았다면 진즉 1레벨로 떨어졌을 것이다.

▶기대: 결과가 궁금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교생 아가씨. 음?

638레벨→637레벨→253레벨→1레벨

치유사E의 레벨이 갑자기 급격히 떨어졌다. 하루가 지나려면 아직 멀었고 공급한 경험치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치이이이-

캡슐 안에 가득했던 녹색 연기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장치가 종료됐다는 뜻이리라.

“콜록콜록!”

캡슐 밖으로 튕기듯 나온 치유사E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헛구역질하면서 마구 기침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알 바 아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용사님. 콜록콜록! 제가 인간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돌과 유리로 된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구경하던 중이었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미녀들이 나무들을 파괴했고, 저는 인간들이랑 깔렸어요. 몸이 튼튼해서 바로 죽진 않았지만, 결국에는…. 인간들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여자들을 발키리라고 부르는 것 같았어요.”

“발키리…!”

그것은 최초의 용사가 부리는 골렘 군단의 총칭이다.

지구가 외계인들에게 공격받는 듯했다.

다시 치유사E를 들여보내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할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다고 상황이 나아질 리 없기 때문이다. 지구에는 용사들이 있고, 그들이 외계인들을 막을 것이다.

“망할! 더 안심이 안 되네! 우선은 수고했어. 잠시 실례.”

“우으읍-?!”

나는 약속했던 보상을 치유사E에게 줬다.

경험치와 정령이다.

▷종족: 엘프

▷레벨: 999+

▷직업: 주술사(축복=정령↑)

▷스킬: 정령A 축복B 매력F 사랑F

▷상태: 혼란, 흥분, 상기

서투른 치유사E의 얄팍한 입술에서 혀를 뺀 나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느긋하게 모험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헤어지면서 덕담 한마디 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치유사E- 아니, 주술사E. 너를 여자로 봐주는 착한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길 빌어줄게. 아무튼 신성한 용사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마. 몰랑.”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출구를 향해 질주했다.

“비켜!”

“Guoooo~?!”

“Guooo~?!”

던전의 머저리들이랑 느긋하게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마왕을 만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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